-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10/31 19:05:40
Name   nickyo
Subject   너 누나랑 잘래요?
타임라인이 키스라인이 되는걸 보고
옛날 글을 재탕해 옵니다. 읽으신분도 꽤 있으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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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소주잔을 채우다 말고 벙 찐 표정으로 되묻는다. 이 아가씨가 뭐라는거지? 눈 앞에 있는 누나는 단발머리가 찌개에 젖을 듯 말듯 하게 고개를 푹 숙인채로 기울어 있었다. 누나 잔에 한잔 주고 내 잔에 한잔 따르는 그 사이에 내가 꿈이라도 꾼건가? 아무말도 하지 않는 누나를 보며 멈칫한 손으로 다시 술을 따른다. 쪼르르르, 잔이 꽉 차고 병을 내려놓자 그녀는 단발머리를 쓸어올리며 고개를 든다.


"건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씨익 웃으며 앞에 놓인 잔을 번쩍 든다. 너무 빠르게 마시는 것 같아서 그녀에게 좀 천천히 마시라고 했지만 입술만 삐죽이며 내 앞에 놓인 소주잔에 잔을 쨍깡 하고 부딫혀 온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잔을 들고 꼴깍 마시려고 입에 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잘거냐고 말거냐고요....."

먹던 소주가 살짝 튀어 나갔다. 드라마처럼 푸훕 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턱 주변으로 슬쩍 흐르는 정도로. 누나는 아까와는 달리 빤히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무슨말을 해야할지 몰라 몇 초간 멍하니 있었다. 그 큰 눈망울을 꿈뻑, 꿈뻑 하더니마는 "나 갈래." 하고는 주섬주섬 외투와 가방을 집어든다. 어어? 가게요? 같은 멍청한 소리를 하며 일어섰다.


누나는 기어코 카드를 꺼내며 "여기는 내가 내. 쬐끄만게 돈 쓰는건 어디서 배워가지고.." 라며 자기보다 20센티는 큰 우람한 사내를 밀쳐내었다. 빙그레 웃는 알바 앞에서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잘먹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누나는 성큼, 성큼 가게 밖으로 나섰다. 휘청이는게 위태로워 재빨리 옆에가서 팔꿈치를 잡았다. 반대손으로 손을 까닥이더니 이내 내 팔을 잡고 고개를 댄 채 허리를 반쯤 숙여 매달린다. 괜찮아요? 누나는 고개를 젓다가 다시 끄덕인다. 안괜찮구나. 택시라도 잡으려면 길가로 나가야 해서 누나를 잡고 천천히 걸었다. 몇 걸음을 걷다 누나는 갑자기 히히히히, 하고 웃는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하고 물으니, 우리 모텔 안..갈래요? 히히히히 하고 웃는다. 아 진짜 누나 아오 크크크 하고 웃어넘기는데, 누나는 고개를 들어 서글픈 표정으로 위를 본다.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달 모양의 눈매로 웃으며 장난이야 이 순진한놈아 하고 팔을 뿌리쳤다. 어어, 나 잡아요. 하고 다시 누나를 붙잡으려 하자 누나는 떽! 혼자 잘갑니다....... 하고 옆으로 한 걸음 비틀거린다.



약간의 공간을 사이에 두고 거리를 걸었다. 손등이 팔과 조금 스치는 정도의 그 거리를 유지하며 가끔 오른쪽으로 비틀, 왼쪽으로 비틀 하며 천천히 밤 공기를 마셨다. 역 근처까지 나오니 택시들이 줄을 서 있다. 누나는 택시를 보더니 나 간다! 하고는 손을 두어번 흔들고 이내 뛰어간다. 그러다 넘어져요! 비틀거림은 온데간데 없고, 쏜살같이 택시속으로 쏙 빨려들어간다. 차창너머로 인사라도 하려 했건만 창문도 열지 않고 쌩 하니 출발한다. 겨우 차 넘버 네 자리만 누나에게 카톡으로 남겼는데, 1이 없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직 막차가 남아있을 시간일까 싶어 역으로 돌아가다가 문득 만사가 다 귀찮아져서 그냥 학교 과실에서 잘 요량으로 학교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내내 아까의 어리숙함이 맘에 걸렸다. 자러 간다고 냅다 좋다고 그랬어야 했을까? 진짜 잤으면 어땠을까? 누나랑 나는 무슨 사이인걸까? 장난이었던 걸까? 내가 너무 농담을 못 받아준건가? 혼란스러움 사이로 스멀스멀 후회가 올라왔다. 누나는 예뻤고, 나한테는 과분할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 인연이 이어져 종종 만나는 사이가 되었지만 친한 동생, 아는사이에 가까웠다. 그런데 오늘 그 시간들이 되려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 친구로서 보내온 시간들이 그 순간의 대답을 망설이게 했으니까. 잘 한걸까? 아쉬움과 후회, 잘했다는 다독임을 반복하며 학과실로 향했다.


"어? 오빠!"


건물에 들어가려는 찰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두 학번 후배가 종종거리며 뛰어온다. 이시간에 왠일.. 아! 술먹었죠! 술냄새 난다! 나만 빼놓고! 새초롬하게 웃는 이 녀석을 보니 남의 속도 모르는구만 싶어 꿀밤을 쥐어박고 싶었다. 능청스레 내 옆구리에 손을 대며 오빠 맨날 밤에 술먹으니까 이 살좀봐 살 하고 톡톡 두들긴다. 문득 누나가 내게 했던 농담이 생각났다. 누나랑 잘래요? 나는 그 애의 손을 낚아채 확 잡아당겨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꺅, 하는 소리와 함께 한참 작은 여자아이가 품에 쏙 들어왔다. 너 내가 남자몸에 함부로 손대면 안된다고 했지. 휘둥그레진 눈과 마주쳤다. 헤실헤실 웃으며 잘해주는 착한 오빠 이미지를 이 참에 탈피해볼까 싶어 눈을 마주친 채 한쪽 어깨를 잡고 슬그머니 그 애를 살짝 밀며 조금 허리를 숙였다. 그 애와 눈 높이가 어느정도 맞아갈 무렵, 후배는 얼굴을 살짝 뒤로 뺐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키스라도 할 기세로 천천히 눈을 바라보며 거리를 좁혔다. 후배는 약간 벌린 입으로 오..오빠.. 하더니 잡히지 않은 한 쪽 손으로 날 밀어내려는 듯 손을 들어올렸다. 이정도면 됐겠다 싶어 멈추려했더니 왠걸,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것이다. 순간 웃음이 터졌다. 야, 눈을 아주 지그시 감으시는구만 지그시. 너 뭘 기대한거야! 야밤에 빵 터진 나, 후배는 네? 네??? 아! 아진짜! 하며 들고 있던 백으로 날 후려쳤다. 아야야 미안! 야 그러니까 외간 남자한테 자꾸 손대고 그러지 말라는거지!!



후배는 몇 번을 더 때리고 나서야 오빠 진짜 못됐어!! 하고 빽 소리를 지르곤 성큼성큼 가버렸다. 아 거참 짜식 많이 민망했나.. 얼얼한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 애의 뒤에 대고 내일보자! 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누나도 나한테 이렇게 장난을 친 셈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건물계단을 오르며 스마트폰을 여니 아직도 누나의 1이 없어지지 않았다. 만약 누나랑 잤으면 오늘부터 여자친구라도 생기는 거였을까..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 카카오톡을 열었다. 이 시간에 마땅히 쓸데없는 얘기로 외로움을 달랠 사람이 없었다. 아까 그 후배나 붙잡고 차라도 마시며 수다좀 떨껄.. 하는 아쉬움이 드는 밤이었다. 난 언제 애인이 생기려나. 애인이 태어나기는 하셨나. 그놈의 썸이라는 것좀 나도 해보고 싶네. 전생에 얼마나 못되게 살았던거야...가뜩이나 추운 과실의 소파에 괜시리 투덜거리며 잠을 청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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