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11/20 23:44:50
Name   알료사
Subject   ㅋㅋㅋ
나는 우스운 사람이다

사람들은 요즈음 나를 미친놈이라고 부른다

우스운 사람보다는 지위가 높아진 거라고 해야겠지


전에는 우스운 사람이라고 보일까 봐 무척 걱정했다

일곱 살때부터 이미 내가 우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우스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욱더 확실히 깨달았다

대학에서의 모든 학문은 결국 내가 우스운 사람이라는 것을 나에게 증명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존재했다

모든 이들은 언제나 나를 비웃었다

모욕적이었지만 나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나는 매우 오만해서 내가 우스운 사람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참지 못하고 고백할까봐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
.
.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한차원 높은 어떤 상황에 대한 고민이 심화되어 어쩐지 전보다 편안해졌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세계는 어디나 다 마찬가지라는 확신이었다

훨씬 전부터 그런 예감은 있었는데 지난해에 들어서 완전한 확신으로 나타났다

예전에는 처음부터 많은 것이 있었던 것처럼 여겨졌으나 나중에 가서는 전부터 아무것도 없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음산한,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가장 음산한 밤이었다

하루 종일 비가 퍼붓고 있었다

아주 차갑고 음산한 비

인간에 대한 단호한 적의를 품은 무서운 비

그런데 밤 열 시가 지나자 비가 뚝 그쳤고 다음에는 습기가 가득 찼다

나는 그날 저녁나절 친구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친구 두 명은 자극적인 주제에 대해 열을 내며 토론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어떻게 되나 마찬가지인 주제였으며 공연히 열을 내고 있는게 눈에 보였다

내가 불쑥 그 점을 지적했더니 그들은 나를 비웃었다





친구 집에서 나와 길을 걷다가 언뜻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지독히 캄캄했으나 구름이 갈라진 사이로 알 수 없는 검은 반점들을 분간할 수 있었다

그 검은 반점들 속에 조그만 별이 나에게 어떤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날 밤에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자살은 벌써 두 달 전부터 품어 온 생각이었다

권총을 사서 탄알도 재어 놓았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났어도 권총은 여전히 서랍 속에 있었다

매일 밤 집에 돌아가면서 오늘 밤에는 정말 자살하자고 줄곧 생각했다

무언가 핑계가 될 순간을 포착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적당한 때를 기다리다가

지금 이 순간 그 조그만 별이 내게 암시를 주어 드디어 실행하자고 결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여자아이가 나타나 내 팔뚝을 붙잡았다

여덟 살쯤 되어 보였다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홑옷을 걸치고 온 몸이 비에 젖어 있었다

여자아이는 내 팔꿈치를 잡아당기면서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엄마! 엄마! 하고 외쳤다

나는 여자아이를 쳐다보긴 했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대로 곧장 걸어갔다

여자아이는 쫓아와서 다시 내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그 목소리에는 겁에 질린 어린아이의 절망이 드러나는 독특한 울림이 있었다

여자아이는 말을 똑바로 다 하지는 못했지만

어디선가 이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죽어 가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변이 생겨서 누구를 불러야겠다고, 어머니를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밖으로 뛰쳐나온 모양이다

나는 여자아이를 도와 주지 않고 오히려 쫓아 버렸다

조그만 손을 마주잡고 흐느껴 우는 여자아이에게 발을 구르고 호통을 쳤다

여자아이는 울부짖다가 저쪽에 다른 행인이 나타나자 나를 두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내 방에 들어와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권총을 꺼냈다

권총 앞에서 '이제 됐느냐?'고 스스로 묻고

확실히 '됐다'고 스스로 대답했다

방아쇄를 당길 것이다

드디어 오늘 밤에는 틀림없이 자살하리라는 것을 느낀다

다만 결행을 하기까지 책상 앞에 얼마나 앉아 있을지는 몰랐다

정말이지 나는 방아쇄를 당겼을 것이다



그 여자아이만 아니었더라면



솔직하게 말해서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라고 했지만 그래도 고통의 느낌 같은건 있었다

가령 누가 나를 때렸다면 나는 고통을 느꼈겠지

정신적으로도, 무슨 불쌍한 일이라도 보게 되면,

인생은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예전의 시절처럼 측은한 생각이 들게 마련이지



나는 그 여자아이를 도와줄 뻔했다

그런데 왜 도와주지 않았지?

여자아이가 내 팔꿈치를 잡아당기며 말을 거는 순간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드디어 오늘 밤 자살을 하기로 결심한 바에는 지금이야말로 평상시보다 더 세상 만사가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게 당연하지 않은가

왜 나는 갑자기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라고 느끼지 않고 그 여자아이를 딱하게 여기는 걸까, 하는 생각에 화가 났다

기분이 매우 언짢아졌고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요컨대 내가 인간으로 존재하며 아직은 <무>가 아닌 까닭에,

다시 말해서 무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아직 살아 있는 까닭에 내 행위에 대해서 고통이나 분노나 수치를 느끼는 것일까

그야 그렇겠지

그러나 앞으로 두 시간 후에 자살할 텐데 그 여자아이가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그때는 수치심이고 뭐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절대적인 제로가 된다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면 여자아이를 딱하게 생각하는 마음도 없어진다

내가 불쌍한 아이에게 발을 구르고 호통을 치고 비인간적으로 굴었던 것은, 두 시간 후에는 모든 게 다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방아쇄를 당기면 그 즉시 세계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내 의식이 소멸되자마자 원래 세계가 내 의식의 부속물이었던 것처럼 홀연히 꺼져 버릴지도 모른다

가령 내가 전에 달이나 화성에서 살고 있었다고 치자

거기서 대단히 파렴치하고 불명예스러운 짓을 저지른 후 이 지구에 나타났다고 치자

그리고 전에 살던 행성에서 한 짓에 관한 의식을 계속 유지하면서 다시는 그 행성에 돌아가지 않는다는걸 알고 있다고 하자

그럼 내가 지구에서 전에 살던 그 달을 쳐다보면서 무심할 수 있을까?

그 행위에 대해서 수치를 느낄까 어떨까?



지금 책상 위에는 권총이 놓여 있다

나는 곧 죽는다

이번에는 틀림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이 순간에,

왜 이런 쓸데없는 문제를 따지고 있는가

그런데 나는 웬일인지 흥분되어 초조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죽지 못할거 같다

결과적으로 그 여자아이가 나를 살린 것이다

여러가지 의문 때문에 발사를 연기했으니까

나는 안락의자에 앉은 채 권총 앞에서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어떤 꿈을 꾸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꿈이란 매우 신비롭다

어떤 부분은 보석 세공처럼 정밀하고 뚜렷하게 나타나는가 하면

어떤 부분은 공간도 시간도 무시하고 껑춘껑충 뛰어 넘어간다

꿈 속에서 지극히 교묘하고 지능적인 행동을 하는가 하면 이성으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의 형은 5년 전에 죽었는데 가끔 꿈에 형이 나온다

나는 형이 죽었고 장례까지 치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형이 내가 하는 일에 끼어들고 우리 둘은 꽤 열중해서 그 일을 함께 한다

나는 그 꿈속의 일이 진행되는 도중에도 형이 이미 고인임을 알면서도 내 옆에 와서 같이 움직이고 있는 게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 이성은 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가?

아무튼...

그때 나는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나는 진리를 보았다

내가 자살로 없애 버리려 한 삶에 대한 꿈이었다


.
.
.
.
.



꿈에서 깨어난 나는 여자아이를 찾아 집을 나섰다



.
.
.
.
.



도스토예프스키 <우스운 자의 꿈>

요약발췌이며  가장 중요한 내용, 즉 어떤 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생략했습니다.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0611 6
    14608 음악[팝송] 조니 올랜도 새 앨범 "The Ride" 김치찌개 24/04/20 14 0
    14607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2편 11 + kogang2001 24/04/19 214 4
    14606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1편 4 kogang2001 24/04/19 218 8
    14605 게임오픈월드를 통한 srpg의 한계 극복 13 kaestro 24/04/19 406 2
    14604 일상/생각개인위키 제작기 6 와짱 24/04/17 739 11
    14603 정치정치는 다들 비슷해서 재미있지만, 그게 내이야기가 되면... 9 닭장군 24/04/16 1118 6
    14602 오프모임5월 1일 난지도벙 재공지 8 치킨마요 24/04/14 727 2
    14601 꿀팁/강좌전국 아파트 관리비 조회 및 비교 사이트 11 무미니 24/04/13 842 6
    14600 도서/문학떡볶이는 좋지만 더덕구이는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13 kaestro 24/04/13 1058 5
    14599 일상/생각가챠 등 확률성 아이템이 있는 도박성 게임에 안 지는 방법 20 골든햄스 24/04/12 1084 0
    14598 음악[팝송] 코난 그레이 새 앨범 "Found Heaven" 김치찌개 24/04/12 171 0
    14597 스포츠앞으로 다시는 오지않을 한국야구 최전성기 12 danielbard 24/04/12 989 0
    14596 정치이준석이 동탄에서 어떤 과정으로 역전을 했나 56 Leeka 24/04/11 2481 6
    14595 정치방송 3사 출구조사와 최종 결과 비교 4 Leeka 24/04/11 760 0
    14594 정치절반의 성공을 안고 몰락한 정의당을 바라보며 10 카르스 24/04/11 1326 18
    14593 정치홍차넷 선거결과 예측시스템 후기 11 괄하이드 24/04/11 904 6
    14592 정치2024 - 22대 국회의원 선거 불판. 197 코리몬테아스 24/04/10 5328 2
    14591 정치선거일 직전 끄적이는 당별관련 뻘글 23 the hive 24/04/09 1261 0
    14590 오프모임[5월1일 난지도 벙] 근로자 대 환영! 13 치킨마요 24/04/09 601 1
    14589 일상/생각지난 3개월을 돌아보며 - 물방울이 흐르고 모여서 시냇물을 만든 이야기 6 kaestro 24/04/09 384 3
    14588 일상/생각다정한 봄의 새싹들처럼 1 골든햄스 24/04/09 276 8
    14587 일상/생각탕후루 기사를 읽다가, 4 풀잎 24/04/09 421 0
    14586 음악VIRGINIA (퍼렐 윌리엄스) 신보 카라멜마끼아또 24/04/08 272 2
    14585 오프모임4월 9일 선릉역에 족발 드시러 가실분. 29 비오는압구정 24/04/08 793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