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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1/06 19:04:23
Name   SNUeng
Subject   자작 시 모음 (삶 - 1)
[자격]

조각상을 세우는 것은
자격이 필요한 일이다

얼마만큼 보아왔는가
얼마만큼 생각했는가
얼마만큼 고민했는가
얼마만큼 도대체 얼마만큼

나는 어찌됐든 자격따윈 없을거다
나는 한움큼도 움켜쥐지 않았으니
정을 내려놓고 쉬는것이 일상같은
지친 조각사의 한풀이는 계속됐다

[늪]

늪지대 어디께에
사람 한명이 빠져있다
나는 발버둥치지 않는
그 사람을 의아해한다

나아가지 못하는 그 사람의
처지가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겨져 새끼발가락 하나를
슬며시 넣어만 본다

늪이 발가락을 물고
천년 묵은 진주를 품은
조개마냥 당최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늪에 반영되어
조금이지만 아주 착실히
늪에 빠져들게만 된다

내가 늪에 빠져들수록
늪지대 어디께의 사람은
점점 빠져나오고 있다
뻣뻣해진 관절을 추스리고
새끼발가락을 꺼낸다

나는 이제 늪이 되었다
나는 이제 나아갈 수 없는
답답하고 답없는 사람이다

[레고]

와그르르 거리는
경쾌하고 시원한 소리

이빨 사이사이에
때가 덕지덕지 낀
작은 레고블럭들을
재활용 쓰레기 봉투에
탈탈 털어 넣는다

사용당한 적이
별로 없는 레고들은
그래서 특히 더 때가
더럽게 붙어있다

추악한 레고 블럭들은
봉투 안에서 조립되어
나의 모습을 완성한다
부정하고픈 내 더러움은
저 레고에도 담겨있다

깨끗한 레고블럭은
당연히 보관의 대상이지만
더럽지만 유용한 블럭도
보관해야만 할 때가 있다
여기저기 쓰이다보니
더러움을 무릅써야하는
그래서 내 손이 더러워지는

그런 블럭들에게
물을 뿌리고만 싶지만
그랬다간 중요한 부품들이
파업을 할 수도 있어
나는 계속 더러워져야만 한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깨끗한 레고블럭들을 매만진다
더러움이 묻는 게 미안하다
이내 깨끗함은 흐려지고
나에게만 더러운 레고블럭이 된다

[가짜 손님과 가짜 주인]

대문을 넘어선 사람들은
곧바로 돌아서 도망간다
무서운 개집을 보고나면
아무도 머물러 있지않지
그래서 창고에 가둬봤어
아무도 도망은 안가겠지
그렇게 생각한 와중에는
북적인 마당에 시체한구
어찌된 일인지 거들떠도
보려고 하지를 않는건가
이상한 상황을 해소코자
그늘에 다가가 살펴본다
시체가 뼈까지 화장했다

[날계란]

친구가 어느날 얘기했다
날계란을 깨먹다가
엄마에게 걸렸다고
바보같고 어리석게

날계란이 맛있는 이유는
생명을 품었기 때문이다
깨지기 쉬운 껍질 속
작고 여린 생명 하나

날계란에 집착하면
안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생명에 집착하다
생명을 괄시하게 되니까

미래의 우리의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자

[뱀의 귀환]

총천연색 무지개와
촛불 건물 쥐불 선물
놀아나는 어리석은 인간들

머리가 꼬리를 물자
뱀은 사무치게 아파한다
야전침대가 필요해

물고 있는 꼬리를
베고 자면 되는 쉬운 일
죽어도 놓지 않으리라

그 다짐이 언제까지 갈까
뱀은 이미 사과를 먹었기에
영원할 수 없는 염원이다

언젠간 반드시 허물을 벗으리

[녹아들다]

침대에 누우니 녹아든다
원래 내몸인 것처럼 축축하게
감싸안을 수 있는 아량이

계단에 앉으니 녹아든다
원래 내맘인 것처럼 척척하게
버티어낼 수 있는 인내가

난간에 서보니 녹아든다
원래 내것인 것처럼 칙칙하게
뛰어나갈 수 있는 용기가

발가락 끝부터 정수리 끝까지
녹음이 닿아보고 나면
선명하게 다가온다
용해액의 주성분이

[이것밖에 안 되는 놈]

너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야?
나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야

나는 사회부적응자야
남들한테 싫은 소리 찍찍하고
정작 내가 그런 말 들으면 기분 나빠
그러고나서 부끄러워하는건 왤까

나는 게으름뱅이야
너희들이 보기엔 내가 노력하는 것 같니
사실 나는 1cm도 가지 못해
한 걸음 가면 두 걸음 되돌아오니까

나는 무능력자야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지
육체적 정신적 활동은 전부 내 약점
잘하는 게 있다면 상처주기일까

나는 쓰레기야
먹어보려다 맛이 없어 버린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도 안되는 쓰잘대기 없는 폐기물
내 운명은 결국 활활타는 소각장이겠지

고작 이것밖에 안되는 놈이라 미안해

나아지고 싶은데
나아지질 않는게
슬프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

미래로의 축포는 허락되지 않았다
미래는 과거를 예측하지 못했다

호랑이는 사슴과 여우와 거북이를
한데 모아 담배 연기를 맛보게 했지만
숲의 정화능력은 달콤한 잿빛연기를
탐욕스럽고도 맛좋게 삼켜내버렸다

지금의 호랑이를 본다면
사슴과 여우와 거북이는
조롱하거나 비판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본성

배가 고픈지 그들을 잡아먹고
호랑이의 지위를 박탈당하여버린
금연치료육식동물은 이제
이빨이 걸레짝마냥 헐어버려
파릇한 풀떼기조차 씹어먹을 수가 없다

치과에 가서 임플란트로 메꾸어도
짜가들은 짜가를 알아본다

[히스테릭으로의 해방]

드디어 오늘 나는 철길과 이별을 고했다
말을 할 수 없으니 편지를 써볼까나
나는 네가 기차를 맞을 때 덜걱거리는 게 싫어
오직 기관사, 나만이 통제할 수 있는 이를 찾고 싶어
철길에 화약가루를 잔뜩 뿌리곤 전부 바람에 날린다
뜨내기들은 소문으로 제거될 것이기 때문

기차와 연을 끊은지는 오래되었다
언제나 타고 있는 기차임에도 어색했지만
사나운 철제바퀴로 나를 깔아뭉개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배신감에 몸서리쳐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

어렸을 땐 열차가 철길을 벗어나면 어떡하지
라는 한심하고 아쉬워 하는 마음을 가졌다
마침내 신호등이 고장나 전철끼리 부딪친다
이것은 확신적인 예언보다 확실한 회고

목적지로 가기보단 걸어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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