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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6/30 01:40:41
Name   王天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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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Love Wins - 2015 퀴어 퍼레이드 후기




트위터를 돌아다니며 늑장을 피우다가 마침내 집을 나섰습니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깔끔하게 밀고, 햇볕과 뻘쭘함에 대비해 선글라서도 간만에 챙겼습니다. 살짝 겁이 나긴 했습니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덜렁 혼자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기대감으로, 긴장을 설렘으로 스스로 바꿔 해석하며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서울 시청은 벌써 나바호의 인디언들이 펼치는 축제처럼 이색적으로 바뀐 것은 아닐지, 익숙하던 공간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신기한 체험이더군요.

그러나 입장하는 과정부터 무시하기 힘든 난관들이 있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광장으로 향하는데 굉장히 많은 이들이 모여 퀴어 축제를 규탄하고 있더군요. 수많은 어르신들이 동성애 반대라 적힌 모자를 쓰고, 피켓이나 종이를 들고 혐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현장을 헤쳐나가는 건 웃고 넘기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자녀로 보이는 분들을 안거나 무릎에 앉히고서 “동성애 OUT!”이라 적힌 팸플릿을 버젓이 들고 있는 장면은 무시무시하기도 했구요. 개중에는 울며 기도하고 방언을 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실소와 한숨을 번갈아 뱉으며, 그렇게 빽빽히 모인 분들 사이로 나 있는 좁은 공간을 따라 광장으로 걸었습니다. 아, 이 사람들 정말 뭐하는 걸까, 해도 너무한다 는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연단 위에서는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대한민국은~~” (애국가도 불렀던 것 같은데 제 기억이 확실치 않습니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월드컵 응원이나 일종의 정부 규탄 행사라고 봐도 전혀 무리가 없는 광경이기도 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존재 자체를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즐기는 곳에 가기까지 가는 길은 참 멀게 느껴지더군요. 더군다나 시청역 6번 출구가 아니면 빙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저는 수많은 기독교 인사들의 호통과 울부짖음과 노래를 견디며 한 10분 정도를 더 걸어야 했습니다. 저는 어쩌다보니 퀴어로 태어나지 않아서 이런 일들이 잠깐 지나치고 말 일이지만, 정작 그 입장에 처해있는 분들은 뭘 느꼈을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고작해야 인터넷 여론이 변화한 걸로 이분들이 실제 삶에서 느꼈을 고통을 가볍게 여긴 건 아닌가 하는 반성도 했구요. 자신을 게이라  밝힐 수 있는 연예인은 아직도 홍석천씨 한명뿐이고, 동성애는 죄라며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길을 메울 정도로 많은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무지개가 그려진 부채를 열심히 찾았는데 나눠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늦게 온 탓에 사고 싶었던 팔찌나 뱃지도 이미 판매가 종료된 상황이었습니다. 어쩐지 퀴어 축제에 혼자 온 이성애자라는 사실이 티가 나는 것 같아서 괜히 뻘쭘하게 여기 저기를 둘러봐야 했습니다. 선글라스를 썼던 게 참 다행이다 싶었어요. 내 눈에 담긴 동요를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할 거란 사실이 꽤 자신감을 북돋아주더군요. 이것저것 좀 사고 싶었는데 풀빵이나 컵케익 같은 건 이미 볼 수가 없었고 정의당 부스쪽에 가서 손목에 띠 하나 두르고서 본격적으로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더워서 금새 목이 타기 시작했습니다. 폴키친이었나 랭엔벨라였나, 아무튼 파랑색 음료로 목을 축이며 여기저기를 빨빨거리며 다녔습니다. 프랑스대사관에서 나눠준 책자로 열심히 햇빛을 가리며 다녔어요.

늦게 간 터라 공연을 많이 보지는 못했습니다. 어쩐지 대학교 축제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아마츄어리즘을 차마 감출 수 없는 퍼포먼스들과 열띤 호응을 보니 귀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단 한분도 악에 받쳐있거나 서러워하시는 분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공연 내내 광장 안에서 제가 느낀 건 해방감과 흥겨움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방방 뛰고 환호하며 축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제가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레즈비언 네분이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의 안무를 재연한 공연이었습니다. 그 노랫말이 이렇게 절실하게 들린 적이 없었거든요.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마 눈 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상처 입은 내 맘까지
시선 속에서 말은 필요 없어 멈춰져 버린 이 시간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이 노래는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소녀다움과는 다르게 무언가에 맞서고,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상처와 의지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가사에 맞춰 리듬을 타는 사람들을 보니 그렇게 애처로우면서도 씩씩해보일 수가 없더군요. 어떤 경험을 하고 나면 어떤 노래들은 절대 이전과는 마찬가지로 무덤덤하게 감상할 수 없는 변화를 체험하는데, 아마 다시 만난 세계도 저에게는 그런 노래로 남을 겁니다.  

얼마 안있다 공연이 끝나고 퍼레이드가 시작했습니다. 많은 퀴어 분들이 열을 지어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는 곧 바깥에서 북을 두드리고 죄와 부정을 소리치는 분들과 정면으로 맞다뜨려야한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저는 이게 정말 불편하고 속상하더군요. 그러나 이런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아주 재미있고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퀴어축제에 참가한 모든 분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포비아 분들의 소리를 덮어버렸기 때문이죠. 제가 걱정한 것처럼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거나 인상을 쓰거나 역으로 혐오를 뱉어내며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무시하거나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어요. 그저 박수를 치고 열띤 응원의 소리를 내며 이 분들에게 반응했습니다. 퍼레이드로 향하는 인파 속에서 저는 북소리와 통곡소리가 힘찬 소리에 차단되어버리는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를 막아낼 수 있다는 지극히 과학적인 사실, 그리고 어떤 증오를 증오 아닌 존재와 애정으로 막아낼 수 있다는 상황을 실제로 체험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건 야유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힘을 불어넣어줄 때 전하는 톤과 울림의 목소리였으니까요.

총 여섯대의 트럭이 차례차례 퍼레이드를 주도했습니다. 저는 이십팔이라 적힌 두번째 트럭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저는 동성애 OUT이라 적힌 피켓을 흔들거나 일갈하는 사람들을 마주쳤고 그 때마다 열렬한 환호하는 퀴어 분들을 보았습니다. 너네는 나쁘다, 죄인이다, 이런 행사는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을 향해 사람들은 환한 표정으로 박수치고 환대하는 반응을 보냈습니다. 신나는 음악과 스포츠 경기 못지 않은 환호소리에 포비아 분들은 어쩔 줄 몰라하시더군요. 이 분들은 살짝이지만 흥을 타기도 했고 활짝 웃기도 했습니다. 그 웃음이 당황스러운 탓인지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우리가 공유하던 즐거움에 동화된 탓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퍼레이드 중반까지 저희는 간간이 이런 분들의 출현을 봤고 그 때마다 박수치고 즐겁게 맞아드리며 계속해서 걸어나갔습니다. 행복을 방해하는 자들에게 맞서려면 그저 계속 행복할 것, 그리고 더 행복할 것.  그렇게 일정 속도로 한시간 가량 꾸준하게 걸어본 건 오랜만이라 저한테는 조금 버겁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울려퍼지는 노래에 맞춰, 트럭 위의 분들의 춤을 보며 다 같이 그렇게 행복하려 하고 행복해지는 경험에서 많은 걸 느꼈습니다. 버스 안, 건물 안의 일반 시민들도 손을 흔들며 맞아주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모여서 노래하고 들썩거리고 걷는 것, 그리고 그런 우리를 받아주는 사람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희미하던 희망이 더 뚜렷해지는 걸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퍼레이드를 마치고서는 광장으로 돌아왔습니다. 퀴어 축제를 마무리하는 공연들이 이어졌고 저는 일곱시쯤 해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렇게 현장을 떠나면서 다시 동성애와 박원순 시장을 지탄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시는 분들을 지나쳐야했지만, 그곳을 같이 걷는 무지개 부채를 든 분들을 보니 입장할 때처럼 답답하지는 않더군요. 대단한 후원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열심히 뛰놀았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 자리에 있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사랑이 이긴다는 것, 이걸 이렇게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에는 사랑으로, 증오에도 사랑으로, 멸시와 차별을 당해도 그렇게 사랑하며 존재하고 말꺼라는 위대한 선언에 동참할 수 있어서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어딘가에 있기만 해도, 그저 노래 듣고 함께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역사는 만들어지고 그렇게 많은 것들은 바뀔 수 있을 겁니다.

@ 외국인들의 비율이 꽤 되던데 퍼레이드 때에 좀 대중적인 팝송도 섞어주면 좋을 것 같더군요. 퍼렐 윌리엄스의 해피 나 케이티 페리의 파이어워크 는 퀴어 퍼레이드에 아주 잘 맞는 노래들 같습니다.

@ 좀 엉뚱하긴 한데, 빌리지 피플의 마초맨도 꽤나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전 진짜 이 노래를 좋아합니다. 마초마초맨을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은 꽤나 재미있지 않나요? 실제 가수들도 게이들이고. 오래된 노래라는 흠은 있지만, 촌스러운 맛이라는 게 또 있잖아요.
  
@ 후원하는 사이트입니다. http://www.kqcf.org/xe/support 우리가 옳다고 믿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인터넷 댓글로만 이루어지진 않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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