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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3/23 14:32:36
Name   살찐론도
Subject   사생연 - 만남

시작 전 -

어제 다 쓴 담에 재미이가 없어 미련없이 창을 닫았는데, 글쓰기 페이지에 온전히 남아있는 글을 보니 다시 미련이 생기네요.

처음부터 다 잘하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꽈!?? 차차 나아질테이 고칠만한 부분만 집어주이소(뻔뻔)! 다만 시간은 좀 오래 걸릴낍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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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개강 2일째.
3월 중순이란 시기가 무색하게도 쌓인 눈이 거무튀튀 얼어있고, 영하 20도에 달하는 날씨에 너나할것 없이 모두가 걸음을 재촉한다.
오전 수업이 시작되고, 학사 졸업예정이자 대학원 진학예정인 파트강사 양양은 가장 낮은반인 F반에서 중국어입문 수업을 진행한다.

아 → 아 ↗ 아 √ 아 ↘
뽀-포-모-포-, 떠-터-너-러-

그 순간, 문이 빼꼼이 열리고,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잠시 눈치를 보다가 뒤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후 교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뒤따라 세명이 더 들어온다.
잠깐 어수선해진 분위기는 이내 잦아들고 양양은 강의를 다시 이어나가는데, 그것도 잠시. 늦게 들어온 한 학생이 몸을 베베꼬며 화장실에 간댄다.

"선생님 배가 아파요"


입문반 학생이 중국어로 의사표현한 것이 이상했지만, 양양은 별다른 의심없이 그 학생을 화장실에 보내고 수업을 이어나간다.
한창 수업에 집중할 무렵 '찰칵' 기계음이 들려 돌아보니, 사진찍은 사람은 상의로 세상 두꺼운 패딩을 입고 하의는 반바지에 맨발 슬리퍼를 신고 늦게 온 한국인. 뭐 이런 정신나간 사람이 다 있나 속으로는 아연실색을 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 양양은 수업 중 불필요한 행동을 자제하라는 경고를 하고 다시 강의를 이어나간다(화장실에 갔던 학생이 돌아온다).
양양은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학생들의 행동이 달갑진 않았으나, 마음을 다잡고 학생들에게 번갈아가며 발음 및 성조 연습을 시킨다. 50대 한국인 아주머니도, 10대후반 혹은 20대 초반처럼 보이는 조선 사람도, 어렵지 않게 발음을 연습해 나간다(그 사이 배아픈 학생은 또 한번 화장실에 간다). 한 서양인은 특유의 억양으로 인해 성조가 정확하진 않아 수차례 반복연습을 시켰고, 비교적 정확한 발음을 구사할 수 있게 되자 뿌듯함을 느끼며 차례대로 다음, 또 다음 학생을 지목하는데,

아→r 아↗r 아√r 아↘r
뽀r-포r-모r-포r-, 떠r-터r-너r-러r-

.......뭔가 많이 이상하다. 혀가 굽었나 왜자꾸 r 발음이 섞여있지?
양양은 그 학생에게 혀를 자연스레 둔 채 발음해 보라 하지만, 영 못알아듣는 눈치다. 할수없이 자신의 혀를 빼꼼히 내밀고는 굽히지 말라고 손짓을 한다. 하지만 다시 시켜봐도 나아지는 것은 없다(사람들은 키득키득거리고, 그 사이 화장실 간 학생이 들어온다). 양양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말하려는 찰나, 수업시작 후 눈치보다 들어온 학생이 자신에게 얘기를 한다.
"점마 북경어투가 머리에 박혀서 그래요, 어쩔 수 없어요크크(중국어)"
양양은 그 때 확실히 알았다. 이 네명은 수업을 들으러 온 게 아니라 자신을 놀리러 온 것이란 것을. 허나 어쩌랴, 수업중인데 학생을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으로 그저 이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긴장해서일까 아니면 화가 나서일까, 양양의 이마와 인중에 땀이 맺히고 초보강사의 머리는 이미 새하얘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미리 준비한 교보재를 꺼낸 양양은 예정대로 수업을 이어나가는데, 이젠 학생들도 집중력을 잃었다. 곳곳에서 잡담과 소리죽인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지한 표정으로 잡담을 자제시키고 수업을 이어나가려는데,

"선생님 예뻐요, 전화번호 가르쳐주세요(찡긋)"

입문반이었지만 워낙 유용(?)했던 말이어서인지, 대부분의 학생이 알아들었고, 분위기는 말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너는 중국어를 잘하네, 여기 입문반에 있으면 안될 것 같아, 다른반에 가는게 어때?"
"요즘 분반기간이잖아요, 친구들 수준에 맞는 반 찾아주러 왔어요"
".....알았어. 하지만 더이상 수업 분위기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예~ 예~ 마음 놓으세요"

양양은 그의 무례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상황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고, 수업이 끝나면 다음시간엔 저들을 다른반으로 보내버리리 생각하며 수업을 마무리했다.

간신히 1교시를 끝마친 양양은 잠시 휴식하고자 자리에 앉았는데, 조금 전 수업 중 사진찍은 학생이 주춤주춤 다가와 무언가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拍照(사진찍다)"라고 예상되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무심코 기초 한국어 시간에 배운 "사진" 이라는 한국어를 뱉었고, 또 그걸 알아들은 학생은 헤벌쭉 웃으며, yesyes photo, together, ok? 란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모습에 약간의 거부감이 든 양양은, 단둘이 사진찍자는 학생의 의도를 알아챘지만 그걸 외면한 채 자신이 담당하는 2교시까지 마친 뒤에 모두 함께 사진찍는 것을 제안하며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도망치듯 화장실로 향한다.


잠시 후 2교시가 시작되고, 양양은 그 4명이 없어진 사실에 크게 안도하며 수업을 진행한다.
그리고는 수업이 끝날때까지,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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