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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3/24 14:22:35
Name   烏鳳
Subject   화장실을 엿본 그는 왜 무죄판결을 받았나
#0. 들어가면서

http://www.ytn.co.kr/_ln/0115_201605241648397403

작년 5월이었지요. 술집 화장실에 침입해서 여성들이 용무(!)를 처리하는 장면을 엿보았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1심에서 무죄판결, 항소심에서도 무죄판결을 받았었지요.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9/17/0200000000AKR20160917049700004.HTML

결국 대법원에서까지도 무죄라고 판단했습니다.

공소장에서 그에게 적용한 법률은 이 조항이었습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2조(성적 목적을 위한 공공장소 침입행위) 자기의 성적 욕망을 만족시킬 목적으로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 제2조제1호부터 제5호까지에 따른 공중화장실 등] 및 「공중위생관리법」 제2조제1항제3호에 따른 목욕장업의 목욕장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공공장소에 침입하거나 같은 장소에서 퇴거의 요구를 받고 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공중화장실"이란 공중(公衆)이 이용하도록 제공하기 위하여 국가, 지방자치단체, 법인 또는 개인이 설치하는 화장실을 말한다.
2. "개방화장실"이란 공공기관의 시설물에 설치된 화장실 중 공중이 이용하도록 개방된 화장실 또는 제9조제2항에 따라 특별자치도지사·시장·군수·구청장(구청장은 자치구의 구청장을 말하며, 이하 "시장·군수·구청장"이라 한다)이 지정한 화장실을 말한다.
3. "이동화장실"이란 많은 사람이 모이는 행사 등에 일시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화장실을 말한다.
4. "간이화장실"이란 공중화장실을 설치하기 어려운 지역에 설치한 소규모의 화장실을 말한다.
5. "유료화장실"이란 화장실의 설치·관리자가 이용자에게 이용료를 받을 수 있는 화장실을 말한다.


#1. 국가의 형벌권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사적 제재는 금지됩니다. 몇 년 전, 한 재벌회장이 자기 아들을 쥐어팬 사람을 찾아서는, 동행한 조폭들과 함께 폭행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적 제재의 전형적인 예이지요. 이후 다들 알다시피, 그 재벌회장의 사적 제재는 법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즉, 나나 내 가족이 범죄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내가 복수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죄를 지은 이들은 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 벌을 주는 권한은 각자 개개인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오직 국가에게만 그러할 권한이 있지요. 형벌권의 행사를 국가가 독점하는 겁니다. 다만 그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국가는 형벌권을 독점하는 만큼, 국가 구성원에게 형벌을 가하려면 그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입증할 의무를 집니다. 무고한 사람을 엮어서 다짜고짜 형벌을 부과하는 것은, 오늘날 사회에서는 국가라 해도 용납할 수 없는 "범죄"지요.


#2. 죄형법정주의

그런데, 무엇이 '죄'일까요.

누군가가 보기에는 명백한 범죄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광화문광장에서 갑돌이가 인터내셔널 가(歌)를 열창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죠. 어떤 이에게는 갑돌이의 행위가 명백한 현행법 위반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또, 그걸 죄라고 한다면... 그 죄에 대하여 얼마만큼의 벌을 줄지도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행위니까 사형에 처하자고 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벌금이면 충분하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래도 교도소에 처 넣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안에서도 다시 교도소에 얼마나 복역시키는 게 적절할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평생 그 안에서 썩혀야 한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한 달이면 족하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죠.
.
때문에 국가는, 어떤 행위가 [죄]인지 명백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저촉되는 행위를 할 때에만 국가의 형벌권을 동원하기로 했습니다. 뒤이어 특정한 죄를 저질렀을 때, 어느 정도의 벌을 줄지도 기준을 마련해 둡니다. 이것을 죄형법정주의라고 합니다. 범[죄][형]벌은 엄격하게 [법][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처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이는 뒤집어 말하면... 국가에서 세운 "죄"의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 행위라면, 결코 국가의 형벌권이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국가가 이러저러한 행위만을 처벌하기로 법으로 정해 놓은 만큼, 그 외의 행위는 무엇을 하든 국가가 처벌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이로 인하여, 국가 구성원 개개인은...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행동함에 있어서 예측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법이 금지하는 행위만 안 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3.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추해석 또는 확장해석의 금지

때로는 언뜻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법률인데, 막상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애매모호한 케이스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생 독립국인 뿌레땅 뿌르국이 있다고 해 보죠. 이 나라 사람들은 어찌나 담배를 피워대는지, 피우고 버린 담배 꽁초가 거리에 널려있을 뿐만 아니라 산에서도 담배를 피워대서 그 때문에 산불 피해도 엄청났습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뿌레땅 뿌르국에서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자를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기로 하는 법률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뿌레땅 뿌르국 시민 이담배씨는 용감하게도 국립공원 장백산 안에서 맛나게 담배를 한 대 피웠고, 이 때문에 체포되어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여기까진 문제될 게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김커피씨는 처벌받는 이담배씨를 보고서는.. 뿌레땅 뿌르국 국립공원 장백산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김커피씨는 뿌레땅 시에서 시립공원으로 지정한, 헌강 시민공원에서 담배를 피웠습니다. 김커피씨를 처벌해야 할까요?

또 박소주 씨는 국립공원 장백산에 들어오기 전, 공원 입구에서 맛있게 담배를 한 대 피웠습니다. 자.. 이제 다 피웠으니 들어가자.. 하면서 담배불은 아직 켜져 있는 상태에서... 박소주 씨는 장백산에 들어온 다음, 담뱃재를 털었습니다. 박소주씨를 처벌해야 할까요?

뿌레땅 뿌르국 검찰은, 국립공원의 보존을 위해 국립공원 안에서의 흡연을 금지한 것인 만큼, 장백산에서 불이 붙어 있는 담뱃재를 턴 박소주 씨도 당연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국립공원은 아니어도, 시립 헌강 시민공원에서 담배를 피운 김커피씨도 마땅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짐작하시겠지만... 사실 이건 뿌레땅 뿌르국의 법이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는 겁니다. 헌강 시민공원이 그만큼 중요하다면, 애초에 법을 만들 때 국립공원만 넣을 것이 아니라, '뿌레땅 뿌르국에 존재하는 국립공원과 시립공원'에서도 흡연을 금했어야 했습니다. 또 '담배를 피우는 자'라고 할 것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거나, 그 재를 터는 행위'까지도 금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김커피씨나 박소주씨 처럼 '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자유롭게 행동한 사람'이 불의의 일격에서 해방될 수 있겠지요.

어떠한 행위가 [죄]에 해당하는지에 관해, 법을 어설프게 만들어 놓은 것은 전적으로 뿌레땅 뿌르국 국가의 잘못입니다. 국가가 법을 잘못 만들어 놓고서는, 잘못 만든 법을 근거로 구성원을 처벌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지요. 때문에 국가형벌권을 발동할 때 만큼은, 다시 말해 형사재판에서만큼은 피고인에게 불리한 쪽으로 법을 유추해석하거나 확장해석하는 것은 철저히 금기시됩니다. 민사재판이나 행정재판에서는 사안에 따라 법령의 유추해석이나 확장해석이 허용되고, 때로는 당연시되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요.

다시 말해, 위에서 예를 들었던 가상의 사례에서
헌강 시민공원에서 담배를 피운 김커피씨나, 밖에서 담배를 다 피우고 재만 털었던 박소주씨에게 위의 법률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4. 사안에 적용

문제가 되었던 사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나사가 하나 빠져있는, 잘못된 입법이지요. 성폭법의 해당 규정이 적용되는 장소를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에서 규정한 화장실로 입법을 해 뒀습니다. 위의 뿌레땅 뿌르국의 법만큼이나 어설픈 법이죠. 이 때문에 공중화장실로 지정된 화장실에는 성폭법이 적용되지만, 이 사건에서와 같은... 다중이 이용하는 폐쇄화장실은 그 적용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후자의 화장실도 전자의 화장실만큼이나 성폭법이 적용되어야 할 대상인데도 말이지요.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하는 공중화장실이나.... 술집이나 음식점에 있는, 고객이 이용할 수 있도록 설치한 폐쇄화장실이나... '엿보기' 같은 성폭력범죄로부터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달라보이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 판결을 내린 판사를 두고 손가락질합니다. 쉽죠. 일반인의 법 감정에 어긋나는 판결이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손가락질 자체는 괜찮은데요... 그 손가락질은 그 법을 적용한 판사가 아니라, 어설픈 법률을 상정하고 의결한 국회의원들과 정부에 대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판사의 주관에 따라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추해석이나 확장해석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국가의 형벌권은 극대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너그러운 판사에게 걸린다면 그 판사는 유추해석이나 확장해석은 피하겠지만, 엄격한 판사에게 걸린다면 유추해석이나 확장해석을 통해 처벌받는 이가 생기겠지요.

그 결과 남는 건 모두의 불안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직접적으로 법에 저촉되지는 않더라도, 법의 유추해석이나 확장해석에 따라 언제든 나 또한 처벌받을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불안 말이지요. 그나마... 그러한 유추해석이나 확장해석이 언제나 상식선에 부합하리라 장담할 수도 없지요. 누가 보더라도 말도 안 되는 유추해석이나 확장해석인데... 내 재판에서의 판사가 유추해석 또는 확장해석으로 나를 처벌한다니... 용납할 수 없다는 항의가 잇따르겠죠.

'열 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피해야 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지요.

이번 사건에서처럼 파렴치한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 죄를 벗는 것은 정의롭지 않습니다. 분명하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 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만드는 길을 열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알고 보니, 그 판결을 내린 판사도 이건 뭔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피고인이 들여다 본 화장실이 공중화장실 이용 등에 관한 법률에서 규정하는 공중화장실에 해당하는지 알아보려고 했고, 전주시에 사실조회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에서는 '그 화장실은 시에서 지정한 공중화장실이 아니다'라고 답변을 했고, 그 때문에 성폭법을 적용할 수 없어서 무죄판결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5. 결국은 입법자의 일, 나아가 모든 시민의 의무

작년 5월에 첫 기사가 나온 이후, 9월 대법원의 판결 확정 이후로 아직까지도 이 법률은 그대로입니다. 참으로 한심하죠. 위와 같은 법의 맹점이 존재하고 있다는 게 만천하에 알려진 이후로도 해당 법률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법이 바뀌지 않는 한, 기사에서 나왔던 파렴치한 같은 이들은 여전히 - 적어도 성폭법으로는 - 처벌받지 않을 겁니다. (물론 경범죄처벌법을 적용한다면, 여전히 처벌을 받기는 하겠죠.)

일차적으로는 국회의원들이 이 법률을 개정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주권자인 시민들은, 국회의원들이 이 법률을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압력을 넣어야 할 것이고요.


* 덧붙임 : 작년에 페이스북에 썼던 글을 살짝 수정, 추가하였습니다. 저도 스티커를 받고 싶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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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내용이네요.
  • 좋은 글!
  • 입법자의 의무!!
  • 어려운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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