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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03/25 06:13:52 |
Name | 三公 |
Subject | . |
작성자가 본문을 삭제한 글입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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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redtea.kr/pb/view.php?id=timeline&no=29454 이 글을 쓰기 전에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가 생각나더라고요. 지하철의 풍경을 잘 묘사한 작품이라서 한 번 읽어보고 나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구글에 검색해보니까 이 단편이 교과서에 올랐더군요. 덕분에 쉽게 PDF 파일도 발견해서 첨부합니다. (저작권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 파일만 지울께요.)
그런데 소설을 읽고 나니 정말 서늘... 더 보기
그런데 소설을 읽고 나니 정말 서늘... 더 보기
http://redtea.kr/pb/view.php?id=timeline&no=29454 이 글을 쓰기 전에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가 생각나더라고요. 지하철의 풍경을 잘 묘사한 작품이라서 한 번 읽어보고 나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구글에 검색해보니까 이 단편이 교과서에 올랐더군요. 덕분에 쉽게 PDF 파일도 발견해서 첨부합니다. (저작권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 파일만 지울께요.)
그런데 소설을 읽고 나니 정말 서늘해졌어요. '푸시맨'만 찾아 바꾸기로 '병원 인턴'이라고 고쳐도 그대로 말이 되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이건… 시간당 삼만원은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다시 불만에 사로잡혔지만, 지금 관두면 억울하지 않니? 코치 형의 코치도 과연 옳은 말이다 싶어 이를 악물고 출근을 계속했다. 어쩌면 피라미드의 건설 비결도 ‘억울함’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관두면 너무 억울해. 노예들의 산수란, 보다 그런 것이었겠지.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소름이 끼친... 왜 그럴까 고민해봤는데 이 소설이 인간성을 고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병원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나름 정리해보고 싶어서 써봤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고 나니 정말 서늘해졌어요. '푸시맨'만 찾아 바꾸기로 '병원 인턴'이라고 고쳐도 그대로 말이 되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이건… 시간당 삼만원은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다시 불만에 사로잡혔지만, 지금 관두면 억울하지 않니? 코치 형의 코치도 과연 옳은 말이다 싶어 이를 악물고 출근을 계속했다. 어쩌면 피라미드의 건설 비결도 ‘억울함’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관두면 너무 억울해. 노예들의 산수란, 보다 그런 것이었겠지.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소름이 끼친... 왜 그럴까 고민해봤는데 이 소설이 인간성을 고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병원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나름 정리해보고 싶어서 써봤습니다.
저기서도 은머니께 혼나고 계셨군요.. 갑자기 저는 또 왜 등장한 것이며.. ㅋㅋ 슬램덩크의 명대사중 개인적으로 손에 꼽는 것이 있습니다. 서태웅의 '농구는 산수가 아니야' 입니다. 서태웅의 농구가 산수에 그치지 않고 수학의 경지에 이르러서 했던 말은 아닐겁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2곱하기2는 5'라는 말도 좋아해요. 작가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사실은 현실을 알면서도 거부하고 싶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린입니다에서 말하는산수도 그런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삶을 ...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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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서도 은머니께 혼나고 계셨군요.. 갑자기 저는 또 왜 등장한 것이며.. ㅋㅋ 슬램덩크의 명대사중 개인적으로 손에 꼽는 것이 있습니다. 서태웅의 '농구는 산수가 아니야' 입니다. 서태웅의 농구가 산수에 그치지 않고 수학의 경지에 이르러서 했던 말은 아닐겁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2곱하기2는 5'라는 말도 좋아해요. 작가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사실은 현실을 알면서도 거부하고 싶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린입니다에서 말하는산수도 그런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삶을 기계적으로 부속품처럼 살 수 있다면 오히려 꽤 편리해진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제 인간성이 말살될수록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견디기 힘든 감정들도 줄어들고요. 그래서 저는 그런 식의 삶, 수학은 못하니까 산수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했는데 당연히 잘 안 되지요.
다른 사람들과 행복과 불행에 대한 개똥토론을 할 때면 항상 느끼는것이, 쾌락=행복, 고통=불행 - 이 공식을 전제로 깔고 가는 분들이 많아 대화가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제 생각에는 행복에도 불행에도 쾌락과 고통은 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는서 같아요. 다만 그 배합된 모양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이 삶을 자꾸 수학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 모양을 행복 쪽에 가깝도록 고통을 배치시키려는 시도 아닐까.. 그런데 그런 시도를 하다보면 자신의 수학의 목적이 고통을 제거하기 위함이라 착각하게 되고, 인간의 삶에서 고통이란 일정 수준 이하로는 절대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행복은 점점 더 멀게 느껴지고, 그 이유가 자신의 수학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삶을 점점 더 수학적으로 만드려 하고,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거 아닐까..
수학적 삶에 완전히 성공한 사람이 매우 드물 것이기에 섣불리 장담은 못하겠지만, 개인적 예상으로는 그 드물게 성공한 몇몇 사람들도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을거 같아요. 인간은 수학적으로, 산수적으로 살기 참 어렵습니다. 적응해가는 투쟁뿐인 삶, 이거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하는데 특정 기간 반짝 동안은 가능할지 몰라도 지속되기는 어렵다고 보거든요. 자본주의의 한 단위로 산다는 것도 꽤 비극적인 의미로 보기 쉽지만 많은 사람들이 게을러서 그렇게 못 사는거 같아요.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불완전함에 대해서 이야기 하잖아요? 저는 만약에 자본주의가 무너진다면 그것은 어떤 이상적 복지국가의 등장이나 혁명 때문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게으름과 엉뚱함 때문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과학이 아무리 단언해도 인간은 상상 이상으로 병신이라서 인간성은 보존될 거라고.. 그래서 단언하지 못하고 헤매는 문학 쪽이 그 속에서 인간을 찾기에는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고.. 뭐 그런 식으로 경알못 과알못 문알못이 망상의 나래를 펼쳐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삶을 기계적으로 부속품처럼 살 수 있다면 오히려 꽤 편리해진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제 인간성이 말살될수록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견디기 힘든 감정들도 줄어들고요. 그래서 저는 그런 식의 삶, 수학은 못하니까 산수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했는데 당연히 잘 안 되지요.
다른 사람들과 행복과 불행에 대한 개똥토론을 할 때면 항상 느끼는것이, 쾌락=행복, 고통=불행 - 이 공식을 전제로 깔고 가는 분들이 많아 대화가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제 생각에는 행복에도 불행에도 쾌락과 고통은 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는서 같아요. 다만 그 배합된 모양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이 삶을 자꾸 수학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 모양을 행복 쪽에 가깝도록 고통을 배치시키려는 시도 아닐까.. 그런데 그런 시도를 하다보면 자신의 수학의 목적이 고통을 제거하기 위함이라 착각하게 되고, 인간의 삶에서 고통이란 일정 수준 이하로는 절대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행복은 점점 더 멀게 느껴지고, 그 이유가 자신의 수학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삶을 점점 더 수학적으로 만드려 하고,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거 아닐까..
수학적 삶에 완전히 성공한 사람이 매우 드물 것이기에 섣불리 장담은 못하겠지만, 개인적 예상으로는 그 드물게 성공한 몇몇 사람들도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을거 같아요. 인간은 수학적으로, 산수적으로 살기 참 어렵습니다. 적응해가는 투쟁뿐인 삶, 이거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하는데 특정 기간 반짝 동안은 가능할지 몰라도 지속되기는 어렵다고 보거든요. 자본주의의 한 단위로 산다는 것도 꽤 비극적인 의미로 보기 쉽지만 많은 사람들이 게을러서 그렇게 못 사는거 같아요.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불완전함에 대해서 이야기 하잖아요? 저는 만약에 자본주의가 무너진다면 그것은 어떤 이상적 복지국가의 등장이나 혁명 때문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게으름과 엉뚱함 때문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과학이 아무리 단언해도 인간은 상상 이상으로 병신이라서 인간성은 보존될 거라고.. 그래서 단언하지 못하고 헤매는 문학 쪽이 그 속에서 인간을 찾기에는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고.. 뭐 그런 식으로 경알못 과알못 문알못이 망상의 나래를 펼쳐 봅니다..
'기린'의 내용이 조금씩 기억나네요. 내용을 성실하게 되짚어 주시고, 원문도 올려주셔서 따라갈 수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사라지고, 기린이 되어 나타나는 장면이 인상깊게 기억나요. 책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적'인 궤적에서 탈주한 아버지 혹은 양복입은 기린에게 주인공의 언어가 가닿을 수는 없었겠지요. 책에서 그려내는 사회의 양상은 자본주의 특성에 더해 재생산 부담이 가족에게 과다부여 되는 등 한국 맥락을 깊이, 그리고 과장스럽게 반영하고 있어요.
생산/재생산 기능을 수행하는 개인을 넘어, 그 너머의 욕망 혹은 다른 무엇에서 인... 더 보기
생산/재생산 기능을 수행하는 개인을 넘어, 그 너머의 욕망 혹은 다른 무엇에서 인... 더 보기
'기린'의 내용이 조금씩 기억나네요. 내용을 성실하게 되짚어 주시고, 원문도 올려주셔서 따라갈 수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사라지고, 기린이 되어 나타나는 장면이 인상깊게 기억나요. 책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적'인 궤적에서 탈주한 아버지 혹은 양복입은 기린에게 주인공의 언어가 가닿을 수는 없었겠지요. 책에서 그려내는 사회의 양상은 자본주의 특성에 더해 재생산 부담이 가족에게 과다부여 되는 등 한국 맥락을 깊이, 그리고 과장스럽게 반영하고 있어요.
생산/재생산 기능을 수행하는 개인을 넘어, 그 너머의 욕망 혹은 다른 무엇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꼭 찾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어요. 생산/재생산 기능 또한 인간을 구성하고, 그 내부에서도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나는데 말이지요. 사회학적 렌즈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성 말이에요. 삼공님의 생각은 실존주의와 연결된 걸까요?
제가 문알못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단편집 카스테라를 읽으며 느꼈던 것은 우리 삶의 질곡을 드러내다가 급작스레 환상적 요소를 집어넣어 상황을 비틀어 버린다는 것이었어요. 그 때문에 생겨나는 낯설음이 오히려 그 질곡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만들어주지 않나 했어요.
생산/재생산 기능을 수행하는 개인을 넘어, 그 너머의 욕망 혹은 다른 무엇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꼭 찾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어요. 생산/재생산 기능 또한 인간을 구성하고, 그 내부에서도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나는데 말이지요. 사회학적 렌즈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성 말이에요. 삼공님의 생각은 실존주의와 연결된 걸까요?
제가 문알못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단편집 카스테라를 읽으며 느꼈던 것은 우리 삶의 질곡을 드러내다가 급작스레 환상적 요소를 집어넣어 상황을 비틀어 버린다는 것이었어요. 그 때문에 생겨나는 낯설음이 오히려 그 질곡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만들어주지 않나 했어요.
국내의 대중소설들에서 느껴지는 한국 사회의 우울함이나 계층적으로 나눠서 보는 시각이 마음에 안들어요.
이 부분은 소설이 현사회를 반영하기때문에 어쩔수 없다고 생각도 하지만서도요. 현재를 관조적으로 바라만 보지말고 작가의 철학이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저의 바램일뿐이지요. 사실..제가 국내소설을 전혀 모르기때문에 그래서 이런시각도 편협할지도..
사실 저는 스타인벡의 소설을 좋아하는데요. 이 작가의 매력은 (제 해석이지만..)사람들의 고통을 노동자 계층에 국한하지 않고 일이라는 노동이라는 인간이라면 태어나서 해야하는 마땅함으로... 더 보기
이 부분은 소설이 현사회를 반영하기때문에 어쩔수 없다고 생각도 하지만서도요. 현재를 관조적으로 바라만 보지말고 작가의 철학이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저의 바램일뿐이지요. 사실..제가 국내소설을 전혀 모르기때문에 그래서 이런시각도 편협할지도..
사실 저는 스타인벡의 소설을 좋아하는데요. 이 작가의 매력은 (제 해석이지만..)사람들의 고통을 노동자 계층에 국한하지 않고 일이라는 노동이라는 인간이라면 태어나서 해야하는 마땅함으로... 더 보기
국내의 대중소설들에서 느껴지는 한국 사회의 우울함이나 계층적으로 나눠서 보는 시각이 마음에 안들어요.
이 부분은 소설이 현사회를 반영하기때문에 어쩔수 없다고 생각도 하지만서도요. 현재를 관조적으로 바라만 보지말고 작가의 철학이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저의 바램일뿐이지요. 사실..제가 국내소설을 전혀 모르기때문에 그래서 이런시각도 편협할지도..
사실 저는 스타인벡의 소설을 좋아하는데요. 이 작가의 매력은 (제 해석이지만..)사람들의 고통을 노동자 계층에 국한하지 않고 일이라는 노동이라는 인간이라면 태어나서 해야하는 마땅함으로 보는 숙명으로 바라보는 점이 글 속에 녹아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에 결합되어 있는 휴머니즘이 녹아있고 대자연의 이치라든가 한계가 소설에 무게감을 더하는 것 같거든요.
스타인벡의 시선은 인간을 뛰어넘은 삶이란 무엇인가 휴머니즘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는 것 같아요. 국내 소설에서도 인간 vs 인간이라는 구조를 넘어서 삶이 무엇인지 이런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성석제님 소설에서 인간 대 인간의 구조로 관조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서도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통된 철학이 깔려있는 것 같아서 가끔 그 분 책 읽을때마다 좋더라구요.
이 부분은 소설이 현사회를 반영하기때문에 어쩔수 없다고 생각도 하지만서도요. 현재를 관조적으로 바라만 보지말고 작가의 철학이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저의 바램일뿐이지요. 사실..제가 국내소설을 전혀 모르기때문에 그래서 이런시각도 편협할지도..
사실 저는 스타인벡의 소설을 좋아하는데요. 이 작가의 매력은 (제 해석이지만..)사람들의 고통을 노동자 계층에 국한하지 않고 일이라는 노동이라는 인간이라면 태어나서 해야하는 마땅함으로 보는 숙명으로 바라보는 점이 글 속에 녹아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에 결합되어 있는 휴머니즘이 녹아있고 대자연의 이치라든가 한계가 소설에 무게감을 더하는 것 같거든요.
스타인벡의 시선은 인간을 뛰어넘은 삶이란 무엇인가 휴머니즘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는 것 같아요. 국내 소설에서도 인간 vs 인간이라는 구조를 넘어서 삶이 무엇인지 이런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성석제님 소설에서 인간 대 인간의 구조로 관조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서도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통된 철학이 깔려있는 것 같아서 가끔 그 분 책 읽을때마다 좋더라구요.
삼공님은 한국소설 읽지 말고 프랑스 소설 읽어요. 19세기 프랑스 소설들(스탕달, 발자크, 졸라, 모파상)은 그야말로 인간에 대한 '단언적 시선'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의식은 훨씬 날카롭고 서사도 재미있죠. 모든 인물들은 왕당파 아니면 공화파, 오를레앙파, 정치적 당파로 형상화되고 - 마치 문재인 지지자냐 박근혜 지지자냐 이재명 지지자냐 하는 것이 그 인물의 주요 정체성이 되는 것처럼 - 그의 계급이 그의 정신의 표지가 되지요. 졸라는 근래에 좋은 번역이 나와 있고 모파상 번역도 괜찮은데 다만 아직도 스탕달 발자크 번역이 아주 꽝이라서...
별말 아니었는데... 일단 유럽에 한 번도 안 가 본 사람으로서 쓰는 편협한 댓글이라고 전제해 놓고 뭐라고 했냐면요.. 소근소근... 알또잉 님이 알고 싶다고 하시니깐 머.
인간성 상실을 주제로 한 문학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성 회복에의 열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것이 문학의 순기능이기는 하지만, 인간성 상실이나 자본주의 앞에 선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은 굳이 정제된 문학을 매개로 하지 않더라도 이미 사람들이 인터넷에 너도나도 기록을 하게 되면서부터 넘치도록 공유해 온 것들이에요. 날것이라 생생하고 독해도 쉬웠죠. 그... 더 보기
인간성 상실을 주제로 한 문학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성 회복에의 열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것이 문학의 순기능이기는 하지만, 인간성 상실이나 자본주의 앞에 선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은 굳이 정제된 문학을 매개로 하지 않더라도 이미 사람들이 인터넷에 너도나도 기록을 하게 되면서부터 넘치도록 공유해 온 것들이에요. 날것이라 생생하고 독해도 쉬웠죠. 그... 더 보기
별말 아니었는데... 일단 유럽에 한 번도 안 가 본 사람으로서 쓰는 편협한 댓글이라고 전제해 놓고 뭐라고 했냐면요.. 소근소근... 알또잉 님이 알고 싶다고 하시니깐 머.
인간성 상실을 주제로 한 문학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성 회복에의 열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것이 문학의 순기능이기는 하지만, 인간성 상실이나 자본주의 앞에 선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은 굳이 정제된 문학을 매개로 하지 않더라도 이미 사람들이 인터넷에 너도나도 기록을 하게 되면서부터 넘치도록 공유해 온 것들이에요. 날것이라 생생하고 독해도 쉬웠죠. 그래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같은 소설 속의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은 너무나 진부해요. 더 이상 감흥이 없음.
그래서 말인데 최고의 행복지수를 자랑하는 노르웨이 및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원래 보편적 복지가 잘 구축되어 있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서들 행복하다지만 커뮤니티 가치가 공고히 지켜지는 덕분에 행복한 거거든요. 헬조선이 뭔지 잘 알 것 같지 않은 그런 나라에선 지독한 가난이나 자본주의에 압도당해 무기력해지는 인간을 소재로 우리만큼이나 지긋지긋하게 문학을 통해 표출하지 않을 것 같아요. 불신이나 가난이 덜한 그런 나라에선 어떤 문학이 융성하는 걸까요? 공상과학 소설이라든지 마약이나 우울증의 병폐를 읽고 인간성에의 회복을 갈망할 것 같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냥 그런 게 궁금했셔영.
인간성 상실을 주제로 한 문학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성 회복에의 열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것이 문학의 순기능이기는 하지만, 인간성 상실이나 자본주의 앞에 선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은 굳이 정제된 문학을 매개로 하지 않더라도 이미 사람들이 인터넷에 너도나도 기록을 하게 되면서부터 넘치도록 공유해 온 것들이에요. 날것이라 생생하고 독해도 쉬웠죠. 그래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같은 소설 속의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은 너무나 진부해요. 더 이상 감흥이 없음.
그래서 말인데 최고의 행복지수를 자랑하는 노르웨이 및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원래 보편적 복지가 잘 구축되어 있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서들 행복하다지만 커뮤니티 가치가 공고히 지켜지는 덕분에 행복한 거거든요. 헬조선이 뭔지 잘 알 것 같지 않은 그런 나라에선 지독한 가난이나 자본주의에 압도당해 무기력해지는 인간을 소재로 우리만큼이나 지긋지긋하게 문학을 통해 표출하지 않을 것 같아요. 불신이나 가난이 덜한 그런 나라에선 어떤 문학이 융성하는 걸까요? 공상과학 소설이라든지 마약이나 우울증의 병폐를 읽고 인간성에의 회복을 갈망할 것 같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냥 그런 게 궁금했셔영.
문학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 앞에 끊임 없이 마주하는 과정이라고 정의 하는 이에게, 박민규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다는 이야기겠죠. 박민규의 미덕을 '인간성 상실' 이를 풀어내는 핍진성에서 찾는다면 그건 너무 따분한 일일거에요. 은머러님이 말씀 하신 것처럼, 그건 박민규'만'의 미덕이라 할 수가 없어요.
다만 덧붙이자면, 세상에 박민규를 좋아하는 문잘알들은 많아요. Moria님이 자기착취의 대명사라고 말한 신형철이 대표적이겠네요. 다만 스탕달이나 발자크, 졸라, 모파상을 첫번쨰로 뽑는 사람들과, 박민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문학에 대한 정의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덧붙이자면, 세상에 박민규를 좋아하는 문잘알들은 많아요. Moria님이 자기착취의 대명사라고 말한 신형철이 대표적이겠네요. 다만 스탕달이나 발자크, 졸라, 모파상을 첫번쨰로 뽑는 사람들과, 박민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문학에 대한 정의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해요.
응...? 그 부분은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리 단언하시니 당황스럽네요. 흥. 한동안 댓글 달지 않을 거예요.
사회평론과 소설 사이에 존재하는 서사성의 차이를 구태여 부풀릴 필요는 없겠고, 문알못인 제가 물은 사회 떡밥만 자세히 풀어볼게요. 삼공님께서 사회학적 단위로 개인이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문학이 그러해서는 본연의 그것을 잃어버린다고, 박민규의 작업이 역설적으로 그 점을 드러낸다고 말씀하실 때 사회학은 개인의 행위자성(Agency)과 사회의 외재적 영향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형태라 생각해요. 삼공님은 사회... 더 보기
사회평론과 소설 사이에 존재하는 서사성의 차이를 구태여 부풀릴 필요는 없겠고, 문알못인 제가 물은 사회 떡밥만 자세히 풀어볼게요. 삼공님께서 사회학적 단위로 개인이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문학이 그러해서는 본연의 그것을 잃어버린다고, 박민규의 작업이 역설적으로 그 점을 드러낸다고 말씀하실 때 사회학은 개인의 행위자성(Agency)과 사회의 외재적 영향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형태라 생각해요. 삼공님은 사회... 더 보기
응...? 그 부분은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리 단언하시니 당황스럽네요. 흥. 한동안 댓글 달지 않을 거예요.
사회평론과 소설 사이에 존재하는 서사성의 차이를 구태여 부풀릴 필요는 없겠고, 문알못인 제가 물은 사회 떡밥만 자세히 풀어볼게요. 삼공님께서 사회학적 단위로 개인이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문학이 그러해서는 본연의 그것을 잃어버린다고, 박민규의 작업이 역설적으로 그 점을 드러낸다고 말씀하실 때 사회학은 개인의 행위자성(Agency)과 사회의 외재적 영향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형태라 생각해요. 삼공님은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역할에 규정되지 않고(혹은 자본주의 부속품으로서만 기능하지 않고) 거기에 저항하든, 굴복하다가도 고개를 치켜들든 개인의 자율성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 찾는거라고 느꼈고요. 그렇기에 실존주의적 테마를 말씀하시는지 물었던 거예요.
저는 종종 부르디외 이론을 끌어오듯이, 사회와 개인 사이를 분열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사회학 입장에 기반해있어요. 그렇기에 박민규씨가 그려내는 모습을 두터운 사회평론이라 느끼지 않아요.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 목소리에 귀기울이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그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지점들이 넘쳐나요. 또한 환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가능성의 지평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지, 정확하게 무엇만을 하라는 지시적인 부분은 적어요. 선택은 가능하나, 주어진 지평에 구속되요. 그러나 선택을 통해 지평이 변화하고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란 구태여 사회에서 독립적인 무엇이라기 보다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사회와 분리하여 바라볼 수는 없거든요. 그 과정에서 사회적 조건에 따라 집단적으로 나타나면서도, 개개인에 따라 내밀하고 독특하게 나타나는 궤적들을 포착하는데 소설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 독특함을 쉽사리 인간/개인의 환원불가능한 무엇으로 간주하는 것은 반대해요.
삼공님이 말씀하시는 '욕망을 실현하고 한계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이 주어진 지평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지, 벗어나야 인간적이라고 느끼는지 궁금해요. 삼공님의 욕망은 그간의 삶에서 벗어나 있나요?
사회평론과 소설 사이에 존재하는 서사성의 차이를 구태여 부풀릴 필요는 없겠고, 문알못인 제가 물은 사회 떡밥만 자세히 풀어볼게요. 삼공님께서 사회학적 단위로 개인이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문학이 그러해서는 본연의 그것을 잃어버린다고, 박민규의 작업이 역설적으로 그 점을 드러낸다고 말씀하실 때 사회학은 개인의 행위자성(Agency)과 사회의 외재적 영향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형태라 생각해요. 삼공님은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역할에 규정되지 않고(혹은 자본주의 부속품으로서만 기능하지 않고) 거기에 저항하든, 굴복하다가도 고개를 치켜들든 개인의 자율성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 찾는거라고 느꼈고요. 그렇기에 실존주의적 테마를 말씀하시는지 물었던 거예요.
저는 종종 부르디외 이론을 끌어오듯이, 사회와 개인 사이를 분열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사회학 입장에 기반해있어요. 그렇기에 박민규씨가 그려내는 모습을 두터운 사회평론이라 느끼지 않아요.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 목소리에 귀기울이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그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지점들이 넘쳐나요. 또한 환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가능성의 지평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지, 정확하게 무엇만을 하라는 지시적인 부분은 적어요. 선택은 가능하나, 주어진 지평에 구속되요. 그러나 선택을 통해 지평이 변화하고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란 구태여 사회에서 독립적인 무엇이라기 보다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사회와 분리하여 바라볼 수는 없거든요. 그 과정에서 사회적 조건에 따라 집단적으로 나타나면서도, 개개인에 따라 내밀하고 독특하게 나타나는 궤적들을 포착하는데 소설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 독특함을 쉽사리 인간/개인의 환원불가능한 무엇으로 간주하는 것은 반대해요.
삼공님이 말씀하시는 '욕망을 실현하고 한계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이 주어진 지평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지, 벗어나야 인간적이라고 느끼는지 궁금해요. 삼공님의 욕망은 그간의 삶에서 벗어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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