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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8/21 05:26:50
Name   프렉
Subject   우리 시대 새로운 화폐, 치킨.


#1.

우리가 아는 치킨, 정확히는 후라이드 치킨은 6.25 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했던 도시 근처에서 처음으로 조리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평택이나 송탄, 서울, 부산 등을 중심으로 조리법이 퍼지고 전후 경제사정이 조금씩 펴면서 음식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기록이나 관련 칼럼을 찾아보면 당시 명동에 위치한 명동 영양센터라는 닭튀김 집을 중심으로 수도권에는 널리 보급되었다고 한다.
월급타면 아버지가 닭 튀김을 사서오셨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저녁상에 닭튀김이 오른다는 것은 일대 이벤트였으리라.


#2.

글이 두서없어지긴 하지만 치킨의 역사를 되짚어보려던 글은 아니니까 중간을 과감하게 생략하도록 하겠다.

내 기준에서 치킨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난 그전엔 닭을 삼계탕이나 죽으로만 접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후라이드 치킨 한꾸러미를 사오셨고 그렇게 동생과 나눠먹었던 것이 내 첫 경험이다. 물론 맛있었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 형제가 어렸을 무렵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면서 우리를 키워야 할 정도로 경제사정이 좋지 못했다.
그런 집에서 치킨이란 음식은 있는 건 알지만 먹기는 어려운 것이었고, 그 날 나는 치킨의 맛과 함께 원인모를 감사함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지금도 왜 감사함을 느꼈는지는 의문이다. 내 기억 속의 치킨은 생각보다 더 고급 음식이었나보다.


#3.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치킨이란 음식은 다양한 변신을 꾀하는 중이었다. 기존 투 탑(?)인 후라이드와 양념에 간장, 마늘, 구워먹는 닭에다가
기발한 식재료가 죄다 동원되기 시작했다. 연예인들이 가끔 나와서 광고를 하는 본 기억은 있었지만 한창 잘나가는 젊은 가수들이 나와서
비현실적인 몸매를 자랑하며 치킨을 먹으라고 권유하는 CF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 본격적이었던 것 같다.

나는 비교적 그런 자극적인 CF에선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전라북도의 작은 소도시에서 살고 있었고 자주보는 TV라고 해봐야
할머니가 하루 종일 보시는 종교 방송, 그리고 토-일요일 할머니와 내가 함께보는 KBS 사극정도가 전부였다. 가끔 친구들이 사주는 치킨을 먹고나서
입이 궁금해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하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시장통닭을 "한 박스" 사오셨다.

시장 통닭을 드셔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정말 박스에 포장해준다. 작은 방울토마토들이 들어가는 작은 골판지 상자에 종이기름을 깔아서 넣어준다.
당연히 시내의 이름있는 매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저렴하고 맛있는데다 닭 한 마리를 다쓴다. 닭발 튀김을 먹어본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묻고싶다.

적어도 나의 학창시절에 먹고 싶은걸 못 먹으며 지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치킨도 그 중 하나였다.

#4.

제대를 하고 돌아와보니 세상은 치킨 천지였다. 이미 그 전부터 조짐은 있었지만 내가 체감한 그 무렵은 치킨춘추전국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그 무렵 분당에 있었는데 자고 일어나면 새 브랜드가 생겼다가 문을 닫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한창 배고플 시기였고 사실상 혼자살고 있었기 때문에
끼니가 귀찮으면 늘상 찾는 음식에 치킨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말 다양한 치킨이 수도 없이 나왔고, 여러가지 맛의 치킨을 맛볼 수 있었다.

그래도 늘 클래식한 후라이드로 회귀할 수 밖에 없었는데, 어떤 맛이 첨가된 치킨은 항상 가격대가 비쌌기 때문이다.
후라이드가 대강 만 천원에서 만 이천원하면, 양념이나 특이 식재가 들어간 치킨들은 만 오천원대에서 가격이 형성되어 있었다.

할머니에게 어느 날 전화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닭에 금칠이라도 했느냐며 펄쩍 뛰셨다. 나도 비슷하게 생각했기에 달리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쨌든 맛있고 한 끼 떼우기 좋은 치킨은 어느새 내 생활에 깊숙히 침투해 있었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면서 음식물 쓰레기통에 닭뼈를 넣는 일이
어색하지 않았다.

#5.

내가 직장인이 되었을 무렵에 치킨은 음식의 그것을 넘어 종교로(?) 발전하고 있었다.
사실 여러모로 물가가 불안정한 가운데 저가의 치킨 브랜드들이 보통사람들의 술안주나 한 끼 식사대용, 간식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에 사람들은 예전 춘추전국시대에서 살아남은 브랜드들을 먹고 싶어했지만 너무나도 비쌌고, 이에 발맞춰서 저가의 치킨들이 등장하는 흐름으로
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제 브랜드 치킨에서 탈피하여 동네치킨을 찾아다니며 먹기 시작했다.

다행히 골목골목의 동네치킨들은 살아있었고 각자의 맛과 서비스 방식으로 단골들 사이에선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 무렵 대부분의 후라이드가 만 오천원을 고수하고 있을 때, 동네 치킨은 만 원이 기준이었고 내 지갑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6.

요새 스포츠 선수들의 연봉을 치킨으로 환산하는 그래프가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에도 실릴 정도로 치킨은 어느새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이만원 치킨이 등장한 시점에서 치킨은 이제 당신들이 엄두도 못내는 음식이라는 것을 실감시켜주기 위함이었을까.

그 선수의 연봉이면 1년에 닭을 몇 마리 사먹을 수 있다는 비유에서 나는 화폐의 가치마저 느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먹을 수 있던 음식에서 사치의 한 기준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유머러스하게 느껴질 정도다.

기름진 서민들의 간식. 치킨의 시선은 우리와 같은 눈 높이가 아니라 더 윗 쪽에서 우리를 엄숙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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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느님은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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