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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2/25 02:54:33
Name   팟저
Subject   비극적 영웅의 조건


‘관객에게 귀띔을 하는 것이 비극작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를 보거나 읽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이러한 귀띔이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가 자기 행동의 결과를, 즉 자기 행동의 근본적인 부도덕성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그걸 알고 있었다면, 그 비극은 더욱 더 비극적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결코 믿지 않았던 일이 갑자기 닥칠 경우에 정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것이 아니라, 미리 예측했던 일이 닥칠 경우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가령 이러이러한 일은 겁낼 필요가 없다, 그건 일어날 리가 없다,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그건 너무도 비인간적인 게 될 테니까, 라고 말해왔다 치자.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에는 모든 인간적인 것이 엄청나게, 엄청난 놀라움으로 나타나게 된다.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오이디푸스에게 끔찍한 신탁이 닥쳤다면, 오늘날의 상식으로선 그의 절망이 그럴듯한 근거를 갖지 못하게 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신판 희랍 신화 중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브레히트의 해당 인용문에서 어떤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이오카스테만이 아니라 오이디푸스 역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을 하리란 신탁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코린토스를 떠나 테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비인간성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브레히트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여기에 경제적인 필연성을 부여하기 위해선 오이디푸스의 ‘행동‘이 지칭하는 바를 달리 해석해야한다. 그러니까, 브레히트의 의견대로라면 오이디푸스는 모든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이오카스테를 취수한 자신의 행동이 내포하는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비도덕성을 알고 있었어야한다는 말이다. 그 비인간성이 너무도 두려워 [‘미리 겁낼 이유가 없다,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야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브레히트의 논리는 첫 문장의 ‘관객’과 조응하면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그 비도덕성을 느끼는 것이 ‘귀띔을 하는 것’이라면, 인용문에서 ‘관객’은 오이디푸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럼, 브레히트가 느낄 아쉬움을 덜어주기 위해, 정말 그러했다고 상정해보면 어떨까?




(이하는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본, 소포클레스/아이스퀼로스의 희곡집 '오이디푸스'에서 발췌했습니다.)

[오이디푸스]
"그의 말인즉 내가 라이오스의 살해자라는 것이오."
[이오카스테]
"그 자신이 알고서 한 말인가요 아니면 남에게서 듣고 한 말인가요?
[오이디푸스]
"그게 아니라 그는 사악한 예언자를 부추겼던 것이오. 그 자신은 비난받을 말을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으니까"
[이오카스테]
"그렇다면 그대가 말씀하시는 일들로부터 그대 자신을 해방하셔요. 그리고 내 말을 들으시고 잘 알아두도록 하셔요. 일찍이 라이오스에게 어떤 신탁이 내린 적이 있었지요. 아폴론 자신이 아니라 그분의 사제들로부터 말이에요. 그 신탁이란, 운명이 그를 따라잡아 그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손에 그가 죽게 되리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라이오스는 적어도 소문대로라면 마차가 다닐 수 있는 세 길이 만나는 곳에서 어느 날 다른 나라의 도적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거여요. 그리고 아들은 태어난 지 사흘도 안 되어서 라이오스가 두 발목을 같이 묶은 뒤 다른 사람들의 손을 빌려 인적 없는 산에 갖다 버렸어요. 그리하여 아폴론께서는 애가 아버지의 살해자가 되고 라이오스는 아들의 손에 죽는다는, 그가 두려워하던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셨던 거여요. 이렇게 되도록 예언의 말씀들이 미리 정해놓았던 거지요. 그러니 예언의 말씀들에 관해서는 걱정 마셔요. 신께서 필요해서 구하시는 것이라면 그분 자신이 쉽게 밝혀주실 테니까요."
[오이디푸스]
"부인이여, 방금 그대의 말을 듣고 나니 내 영혼은 갈피를 못 잡고 내 마음은 뒤흔들리는구려.
[이오카스테]
"어떤 불안이 그대를 깜짝 놀라게 했기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오이디푸스]
"나는 그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것 같구려. 라이오스는 마차가 다닐 수 있는 세 길이 만나는 곳에서 살해되었다고 말이오."
[이오카스테]
"그래요. 그런 말이 떠돌았고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어요."
[오이디푸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일어난 곳은 대체 어디란 말이오?"
[이오카스테]
"그 나라는 포키스라고 불리며 갈라진 두 길이 델포이와 다울리아로부터 바로 그곳으로 통하고 있지요.
[오이디푸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난 뒤로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갔소?
[이오카스테]
"그대가 이 땅의 통치권을 장악하기 직전에 그런 소식이 도시에 알려졌어요.
[오이디푸스]
"오오 제우스 신이여, 그대는 내게 무엇을 행하기로 결정하셨나이까?"
[이오카스테]
"어째서 이 일이, 오이디푸스여, 그대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거죠?"
[오이디푸스]
"아직은 내게 묻지 말아요. 라이오스가 어떤 체격을 갖고 있었으며 남자로서 얼마만큼 성숙했었는지 말해봐요."
[이오카스테]
"키가 컸고 흰머리가 갓 나기 시작했으며 외모는 그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오이디푸스]
"아아 나야말로 불행하도다! 방금 내 자신을 무저운 저주 속으로 내던져놓고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니 말이오."
[이오카스테]
"무슨 말씀이셔요? 왕이여, 그대를 보고 있자니 떨려요."
[오이디푸스]
"그 예언자가 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무섭도록 불안해지는구려. 하나 한 가지만 더 말해준다면 그대는 더 잘 보여주게 될 것이오."
[이오카스테]
"정말 떨려요. 하지만 그대가 묻는 말에 아는 대로 대답하겠어요."
[오이디푸스]
"그가 길을 떠날 때 소수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갔소, 아니면 왕자답게 무장한 호위병들을 많이 거느리고 갔소?"
[이오카스테]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전령이었어요. 그리고 마차는 라이오스를 태운 그것 한 대뿐이었어요."
[오이디푸스]
"아아 이젠 너무나 분명하구나!" (중략)
[이오카스테]
"하지만 왕이여, 그대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오이디푸스]
"내 불길한 예감이 그만큼 앞으로 나아갔으니 내 그대에게 어찌 거절할 수 있겠소? 사실 이와 같은 운명을 통과함에 있어 내가 말할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이 그대 말고 또 누가 있겠소? 나의 아버지는 코린토스의 폴뤼보스였고 나의 어머니는 도리스 사람 메로페였소. 그리고 나는 그곳 시민들 중에서 제일인자로 통했소. 그런데 하루는 내게 우연히 이런 일이 일어났소. 그것은 정말 이상스런 일이긴 했으나 내가 열성을 보일 만한 그런 일은 못 되었소. 연회석상에서 잔뜩 취한 어떤 사내가 술잔을 들며 내가 나의 아버지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이오. 그래서 나는 화가 났지만 그날은 될 수 있는대로 꾹 참았소. 그러나 다음날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로 다가가서 물어보았소. 그러자 그분들은 그런 조롱의 말을 내뱉은 자에게 크게 노하셨소. 그리하여 나는 그 두 분에 관한 한 마음이 놓였으나 그것은 줄곧 내 마음을 괴롭혔소. 그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기 때문이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 몰래 퓌토로 갔었소. 그랬더니 포이보스께서는 내가 찾아간 용건에 관해서는 대답조차 않고 나를 내보내시며 그 대신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다른 일들을 알려주셨소. 즉, 나는 나의 어머니와 몸을 섞을 운명이고 사람들에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자식들을 보여주게 될 것이며 나를 낳아준 아버지의 살해자가 되리라는 것이었소. 이 말을 듣고 나는 그때부터 코린토스 땅을 피하여 오직 별들에 의해 멀리서 그곳의 위치를 재면서 나의 사악한 신탁이 예언한 수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않게 될 곳으로 줄곧 떠돌아다녔소. 그리고 이렇게 다니다가 나는 이 왕이 살해되었다고 그대가 말한 바로 그곳에 이르렀던 것이오. 그러니 내 이제 그대에게 사실대로 말하겠소, 부인이여! 내가 길을 가다가 그 삼거리로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한 사람의 전령과 그대가 말한 대로 망아지가 끄는 마차 위에 탄 한 사내가 나에게 다가ㅏ왔소. 그리고 그 길잡이와 노인 자신이 나를 억지로 길에서 몰아내려고 했소. 그래서 나는 나를 옆으로 밀어낸 마부를 화가 나서 때렸소. 그러자 노인이 이것을 보고 내가 지나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마차에서 소몰이용 막대기로 내 머리를 정통으로 내리쳤소. 그러나 그는 똑같은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 손 안에 들린 지팡이에 잽싸게 얻어 맞고는 즉시 마차 한 가운데로부터 벌렁 나동그라졌소. 그러고 나서 나는 그들을 모두 죽여 버렸소. 하나 만일 이 낯선 사람이 라이오스와 어떤 관계가 있다면 이제 나보다 더 불행한 자가 어디 있을 것이며 나보다 더 신의 미움을 받는 자가 또 어디 있겠소?......"

  ...(중략)...

[오이디푸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이며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게요?
[이오카스테]
"코린토스에서 왔어요, 그대의 아버지 폴뤼보스께서 더 이상 살아 계시지 않고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
[오이디푸스]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이방인이여? 그대의 입으로 직접 들려주오."
[사자]
"먼저 이 소식부터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면 잘 알아두십시오, 그분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중략)
[오이디푸스]
"아아, 이래서야 어찌 퓌토의 예언자의 화로나 머리 위에서 지저귀는 새들을 거들떠볼 사람이 있겠소, 부인이여? 새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는 나의 아버지를 죽일 운명이라고 하더니 그분께서는 고인이 되시어 이미 땅속에 누워 계시고 나는 여기 있어서 창에 손을 댄 적도 없으니 말이오. 혹시 그분께서 나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돌아가셨다면 또 몰라도, 그렇다면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도 할 수 있겠지. 하나 그 신탁은 지금 그대로 폴뤼보스께서 자신과 함께 갖고 가 하데스에 누워 계시니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오."
[이오카스테]
"내 오래 전부터 그렇다고 그대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이디푸스]
"그랬지요. 하나 나는 두려움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오."
[이오카스테]
"이제 이런 일에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마셔요.
[오이디푸스]
"하나 내 어찌 어머니의 침대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소?"
[이오카스테]
"인간은 우연의 지배를 받으며 아무것도 분명하게 내다 볼 수 없거늘 그러한 인간이 두려워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되는 대로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어머니와의 결혼을 두려워하지 마셔요. 꿈속에서라면 이미 여러 사람들이 어머니와 동침했으니까요. 하나 이런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자라야 인생을 가장 편안하게 살아가는 법이여요."
[오이디푸스]
"나의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지 않다면 그대가 한 말은 모두 옳은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하나 그분께서 살아계시니 비록 그대의 말이 옳기는 해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소!"
[이오카스테]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역시 큰 위안이여요."
[오이디푸스]
"큰 위안이지요, 나도 알고 있소. 하나 살아 있는 그 여인이 두렵구려."
[사자]
"그대가 두려워하는 그 여인이 대체 누구입니까?"
[오이디푸스]
"폴뤼보스의 아내 메로페 말이오, 노인이여!"
[사자]
"그 여인의 무엇이 그대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준단 말입니까?"
[오이디푸스]
"신이 보내주신 무서운 예언 때문이오, 이방인이여!"
[사자]
"말씀하셔도 괜찮은 것입니까, 아니면 남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입니까?"
[오이디푸스]
"괜찮다마다. 록시아스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고 내 자신의 손으로 내 아버지의 피를 흘릴 운명이라고 했소. 그래서 나는 코린토스에 있는 나의 집을 오랫동안 멀리했던 것이오. 그동안 나는 행복하게 지냈지만 그래도 역시 부모님들의 얼굴을 보는 건 가장 즐거운 일이오."
[사자]
"그렇다면 그것이 두려워서 그 도시를 멀리 떠나 계신다는 말씀입니까?"
[오이디푸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살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오, 노인이여!" (중략)
[사자]
"오 내 아들이여, 그대는 분명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구려."
[오이디푸스]
"어째서 그렇다는 게요, 노인이여? 제발 부탁이니 가르쳐주구려"
[사자]
"만일 그대가 이 일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꺼리신다면...... 부모님들로 인해 죄악으로 더럽혀질까봐 두려우시단 말씀입니까?"
[오이디푸스]
"바로 그것이오, 노인이여. 그것을 나는 늘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오."
[사자]
"그렇다면 그대의 두려움이 전혀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오이디푸스]
"어째서 부당하다는 게요, 내 그분들을 부모님들로 하고 태어났는데도?"
[사자]
"폴뤼보스는 결코 그대의 핏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략)
[오이디푸스]
"그렇다면 어째서 그분께서 나를 아들이라고 불렀소?
[사자]
"알아두십시오, 그분께서는 일찍이 그대를 내 손에서 선물로 받으셨습니다." (중략)
[오이디푸스]
"그렇다면 나를 남에게서 받았고 그대 자신이 주운 것이 아니란 말이오?
[사자]
"그렇습니다. 다른 목자가 그대를 나에게 주었습니다."
[오이디푸스]
"그자가 누구란 말이오? 내게 분명히 말해줄 수 있겠소?"
[사자]
"라이오스의 가신들 중 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중략)
[오이디푸스]        
"부인이여, 그대는 방금 우리가 부르러 보낸 그 자를 알고 있소? 이 사람이 말하는 자가 바로 그 자요?
[이오카스테]
"이 사람이 말하는 자가 누구면 어때요? 조금 더 심려하실 것 없어요. 그 따위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다 부질없는 짓이여요."
[오이디푸스]        
"이러한 실마리를 잡고서도 내 자신의 출생을 밝히지 못하다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오!"
[이오카스테]
"제발 부탁이니 그대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신다면 이 일을 추궁하지 마셔요. 괴로워 못 견디겠어요."
[오이디푸스]
"염려 말아요. 내가 노예 어머니의 아들, 아니 삼대째 노예로 드러나더라도 그대는 결코 나쁜 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밝혀지지는 않을 테니까"
[이오카스테]
"하지만 내 말을 들어요, 부탁이여요. 그렇게 하지 마셔요."
[오이디푸스]
"이 일을 분명하게 밝혀내지 말라는 부탁은 들어줄 수가 없어요."
[이오카스테]
"나는 호의에서 그대에게 가장 좋은 것을 말씀드리는 거여요"
[오이디푸스]
"그런데 그 가장 좋다는 것이 아까부터 나를 괴롭히고 있소."
[이오카스테]
"오오 불행하신 분이여, 그대가 누구신지 결코 알게 되지 않기를!"


...............................................


브레히트가 바라는 대로, 오이디푸스가 [‘미리 귀띔을 받았다면’] - 라이오스를 죽이고 이오카스테를 취수하는 그 행위에서, 최소한의 이물감을 느꼈더라면? 이라고 생각해보자. 위 장면들은 아주 색다르게 읽힐 것이다.

그리고, 이게 정말로 재미난데, 그렇게 해석할 때만이 오이디푸스의 행동이 ‘오늘날의 상식’에 비추어 더 자연스럽게 읽히다는 것이다.(그리고 오늘날의 시선으로 재구성된 임의의 저자는 소포클레스와 무관하다.).

이오카스테의 몇 마디에서 자신이 선왕을 죽였으리라 확신하는 오이디푸스의 예리한 직감은, 그러나 사자와 이오카스테의 마디마디에서 드러나는, 선왕이 자신의 아버지일 거란 추측까지 다다르진 못한다. 단순히 극의 전개를 위한 설정이라기엔 이오카스테가 먼저 눈치를 챘다는 사실이 미심쩍다. 오이디푸스의 무지에 대비되는 이오카스테의 통찰은 어떤 맥락일까?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깨닫는 그 순간에 이오카스테가 없어야하기 때문에? 이오카스테가 있고 없고가 그리 중요한지는 차치하더라도, 만약 그토록 중요하다면 저리 일찍 물러서는 게 아니라 목자로부터 진실을 듣기 직전에 떠났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아니면 오이디푸스의 진실 한자락을 쥐고 있었다는 극적 개연성 때문에? 하지만 사실에 대해 무지하기로는 이오카스테 역시 마찬가지로, 그녀는 분명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받은 신탁을 알지 못했다.

자그마한 회의를 하나하나 짚어가다보면 그 이면에 도사린 기계-장치의-신(으로 번역될 수도 있는 내포 저자)의 존재가 잡힐듯 꿈틀댄다.

신탁에 대한 이오카스테의 통찰은, 자신이 선왕을 죽였으리란 오이디푸스의 직관과 같은 성질의 것이며, 양자는 오이디푸스의 무지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가장 두려운 진실과 마주하게 하는 외길로 그를 이끌, 오이디푸스의 무지를 말이다. 나아가 극 내의 오이디푸스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그 명철함과 대비되는 무지의 이유를 적극적으로 해명할 때, 어느새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브레히트의 바람이 우릴 마주한다. 너무도 비인간적이고, 너무도 부조리하여 일어날 리 없는 일이고 겁낼 필요가 없기에 자신의 행동을 믿지 않았던 오이디푸스. [‘그가 그걸 알고 있었다면, 그 비극은 더욱 더 비극적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결코 믿지 않았던 일이 갑자기 닥칠 경우에 정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것이 아니라, 미리 예측했던 일이 닥칠 경우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하나 나는 이제 그분이 전에 갖고 있던 권력을 차지하고 그분의 침대와 그분을 위해 씨를 잉태하던 아내를 이어받게 되었으니, 그리고 그분에게 후손의 소망이 꺾이지 않았더라면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이 그분과 나 사이에 인연을 매어주었을 것이니. 이러한 까닭으로 해서 나는 마치 내 친아버지의 일인 양 이 일을 위해 싸울 것이며 살인범을 찾아내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시도할 작정이다”] 이 지점에서,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향한 오이디푸스의 저주에서 엿보이는 불안은 극적 결말을 위한 복선을 뛰어넘는다.

브레히트의 바람을 뒤집어 본다면. 즉, 오이디푸스란 ‘관객’에게 비극적 미래에 관한 귀띔이 분명 있었다고 상정해 본다면? 이때 자신을 말리는 이오카스테를 가문이나 따져대는 여자로 만들어버리는 오이디푸스의 무지어린 패악은 차라리 눈물겨운 분투가 된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 도리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는 그 앎이 도저히 너무도 비인간적이기에 진실을 명백히 드러내 확인하는 게 아닌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납득할 수가 없던 것이다. 자신이 바라지 않았기에 직시할 수밖에 없는 진실과, 바라지 않았기에 받을 수밖에 없는 형벌. 오로지 진실을 마주함으로써 완성되는 고리 - 오이디푸스가 바란 완성된 진실은 그와 같은 원형이 아니었다. 여기서 ‘그(오이디푸스)의 절망이 그럴듯한 근거’를 갖는다. 그럼에도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손을 뿌리치고 부인이 없을 시인을 향해 달려간다.

종국에 놓일 진실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뿐인 줄 알았다면 오이디푸스는 걸음을 멈췄을까? 그건 비극적 영웅이 보일 모습이 아니다. 누락되었던 브레히트의 마지막 문장을 펼치는 건 지금이다. [‘하기야 우리는 빚진 사람이나 게으른 계약 상대가 피치 못할 운명 운운하며 입에 담는 절망의 허구성을 너무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속속들이 알려진 그들과 달리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방점을 원치 않는 원형이 아니라 완성된 진실에 찍는다. 그리고 무수히 널린 복선과 전조에도 불구하고 비극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이야말로 비극적 영웅이 갖춰야할 미덕이며, 카뮈에게 비치는 시지프와 완벽히 일치하는 태도인 것이다. [“바로 저 정상에서 되돌아 내려오는 걸음, 잠시 동안의 휴식 때문에 특히 시지프는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콜로누스의 숲 속 오이디푸스가 테세우스의 앞에서 그토록 당당할 수 있었던 건 자신에게 걸린 축복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브레히트의 바람이 바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때, [“그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의 노령과 나의 영혼의 위대함에 의하여 판단하노니 만사가 다 잘되었도다”]라고 뱉어낸 오이디푸스의 말을, 비로소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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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역사 AI를 따라가다 보면 해리 포터를 만나게 된다. 4 코리몬테아스 24/02/18 1203 11
1366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빌드업 축구'는 없다. 우루과이전으로 돌아보는 벤투호의 빌드업. 13 joel 24/02/12 146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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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3 정치/사회10년차 외신 구독자로서 느끼는 한국 언론 32 카르스 24/02/05 2710 12
1362 기타자폐아이의 부모로 살아간다는건... 11 쉬군 24/02/01 2288 69
1361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4, 完) 6 양라곱 24/01/31 2968 37
1360 기타텃밭을 가꿉시다 20 바이엘 24/01/31 1108 10
1359 일상/생각한국사회에서의 예의바름이란 18 커피를줄이자 24/01/27 666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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