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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2/30 03:25:34
Name   팟저
Subject   영화, 소설, 그리고 영화
이하는 http://redtea.kr/?b=3&n=4468 에 대한 첨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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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란 장르는 오래도록 제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도르노의 개념을 빌리자면 예술이 작동하는 운동 양상, 영화계내 인정과 용인과 불인의 법칙이 말이죠. 일부 평론이며 시네필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깝깝하긴 마찬가지였는데, 그네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위대하다 평가받는 거장들, 예컨대 존 포드니 히치콕이니 오스 야스지로니 하는 이들의 영화들을 저로선 도저히 즐길 수 없었으니까요. 차라리 제게 그 역량이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건 폴 토마스 앤더슨이나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같은 감독의 작품들로서, 이들은 문학적인 영화를 만드니 제가 이해하기 용이했던 거겠죠. 한편 위의 포드와 야스지로를 숭배하는 시네필들의 경우, 그러나 저 둘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이냐리투와 같은 경우) 거의 적대적인 반응까지 보이는 경우도 왕왕 보았던 만큼 제 의문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시각적 정보에 둔감해서 그런 게 아닐까하는 생각해도 해봤습니다. 영화의 경우 그 기반이 비디오 아트고, 비디오 아트는 다시 미술과 굉장히 밀접한 연관을 맺는데 전 미술을 아예 즐기지 못하거든요. 시각적 자극이 직관적인 쾌감으로 전혀 다가오지 않아요. 아마 영화에서 구도니 컷분할이니 하는 이론들을 뒤적뒤적거리면서도 "응, 근데 왜 이게 쾌감이라는 건데?"했던 걸 봐선 그냥 어쩔 수 없는 거 같습니다. 하기야 문학에서조차 철저히 시각적 이미지로 어필하는 시들은 딱히 읽는 맛이 없었거든요. 심지어 [무얼하는 곳일까? 세상의 숱한 유원지라는 곳은 행여 그런 땅에 우리가 찾는 희망의 새가 찔끔찔끔 파란 페인트를 마시며 홀로 비틀거리고 있는지. 아니면 순은의 뱀무리로 모여 지난 겨울에 잃었던 사랑이 잔뜩 고개 쳐들고 있을까?]와 같이 시각적 수사가 남발하는 장정일의 <강정 간다>를 보더라도, 늘 감탄하며 읽는 작품이지만, 정작 제가 감탄하는 이유란 어휘간의 뉘앙스와 그 긴밀한 음성적 울림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썩 그럴싸한 추론 같죠?

헌데 그렇다고, '내 베이스가 문학인데다 시각적 정보에 둔해서 그런 거겠고 시네필이란 것들은 아닌갑지. 어차피 난 그림도 못 즐기는데 그렇다고 미술계에 대해 딱히 궁금해하진 않잖아. 관심 끊자'라기엔 막상 영화계내에서도 여러 감독들에 대한 평이 그 입장에 따라 워낙 상이한 거 같아서 말이죠. 폴 토마스 앤더슨은 (아무래도 그림을 이쁘게 찍어서인 거 같긴 한데)여러 시네필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거장 중의 거장 아닙니까. 이냐리투 역시 속된 말로 영화계에서 가장 권위있다는 아카데미 작품상도 받지 않았고요. 저 자신조차 문학계에서 가장 권위있다는 노벨상이나 부커상의 시상 결과도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으니(하기야 부커상의 경우 매년 뒤바뀌는 심사위원들 사이에서도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워낙 있는 거 같긴 합니다만) 그 아카데미의 권위란 놈으로 모든 걸 퉁치고, 그러니까 시네필들의 갈라파고스일 뿐이라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거나 거짓이다. 이로서 이제 이것에 대해서는 다 마쳤다](네, 헤겔입니다)라고 넘어가기에도 찝찝한 기분이 남더라고요. 무엇보다 영화란 매체는 소설과 함께 내러톨로지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예술이며, 내러톨로지는 다시 현대 소설을 말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론인 만큼 언제나 저 스스로 이를 해명해야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이 있었거든요.

그럼 지금은 그 영화의 미감이란 걸 드디어 깨달아서 이렇게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 거냐...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고요. 지금도 영화가 깜깜하긴 마찬가지입니다. 하긴 애초부터 정말 궁금했던 건 영화가 아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랄까요. 다만 영화란 장르가 형성하는 자장에 대해서는 약간이나마 감을 잡았고, 그 감을 바탕으로 모종의 가설을 공굴리기 이르렀는데... 이 글을 쓰는 건 그런 이유입니다.


소설

소설은 굉장히 그 방향성이 뚜렷한 장르입니다. 텍스트란 매체의 성격상 그럴 수밖에 없겠죠. 소설을 참 재미없게 읽는 방법이지만, 많은 독자들이 여저히 그 주제의식만을 곱씹으며 소설을 읽고 평가하는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고요. 소설의 역사에 비추자면 백년 전에도 고리타분했던 관점입니다만. 한편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소설이 그렇게 생겨먹은, 그러니까 그 주제의식에 집중하기 용이한 매체라서, 그리하여 백여년 전 이미 해당 영역이 레드오션이 되어버려서, 지난 백여년간 소설의 역사는 그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거라고요.

백년 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마들렌이란 과자를 한 입 베어물고 빠져든 화자의 과거 회상과 회상 속 회상으로 무려 일곱권이나 때워먹은 골때리는 소설이죠. 그리고 지난 백년간 이 소설이 소설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오늘날 한국의 문학장 밖에 있는 이들에게도 널리 읽히든 도스토예프스키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무시합니다. 화자의 회상 속 상념들이 참으로 가치롭고 그럴싸하고 삶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어서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속류 심리학 대용으로라면 도스토예프스키가 낫죠.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담아내서? 한 종족의 언어까지 만들만치 자기세계에 파묻혔던 톨킨이, 정작 문학장에서 별 의미값을 갖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단지 저놈이 주절주절 늘어뜨리는 회상을 읽는 게 생각보다 재밌어서죠. 무려 회상을 일곱권씩이나 하는데 그게 썩 읽을만했다고요. 문학장이 주목한 건 바로 이거죠. 이렇게 소설을 쓸 수 있는 거구나. 그리하여 소설이란 매체에 대해 달리 생각하기 시작한 거죠. 제아무리 그럴싸한 개똥철학을 늘어놔봐야 그게 소설의 목적이 된다면 성경말씀, 이솝우화와 다를 게 뭐냐 이겁니다. 그게 아니죠. 읽는 거 자체가 즐겁고 재미있어야하는 게 최우선입니다.

보르헤스는 프루스트가 보여준 걸 더욱 더 발전시켜서, 그러나 프루스트와는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글을 씁니다. 오직 시와 단편만을 쓰죠. 프루스트가 일곱권의 두꺼운 책으로 쓸 걸 칠십페이도 안 되는 분량에 집약합니다. 그게 가능하냐고요? 그래서 보르헤스는 과거의 여러 책들을 적극적으로 인용합니다. 그 책을 안 읽은 사람들은 어쩌냐고요? 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보르헤스가 들먹인 책들 중에선 실재하지 않는 작가와 책들이 더 많거든요. 그게 말이 되냐고요? 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사람들이 프루스트를 재밌게 읽었던 것도 프루스트가 늘어놓은 당대 사교계와 예술에 대한 사변이 참으로 위대하고 통찰할만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거든요. 그 사변들이 형성하는 이미지와 그 이미지 간 유영을 형상화한 활자가 아름다워서였죠.(애초에, 소설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할텐데, 프루스트도 그 사변을 자연스럽게 펼쳐놓는 걸 중시했지 제3자로 하여금 이해하기 용이하게끔 작위적으로 재구성하는데 공을 들이진 않았거든요.) 보르헤스는 일정한 정서를 자극하고 특정된 인식 지평에 독자를 이르게 하기 위해서라면, 일련의 배치 속에서 이미지를 나열하는 식으로 부피를 줄이더라도 독자를 유인하기엔 충분하다는 걸 알았던 거죠. 아마 보르헤스는 프루스트의 방식이 굉장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자신의 글을 읽을 독자는 인간이고, 인간은 아주 똘똘한 동물이니까요.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할 게, 우리는 맥락을 모르는 시도 곧잘 읽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시의 활자 하나하나가 어떤 맥락에서 배치된 건지 손바닥 보듯 훤히 들여다보지 못한다고해도 시 속에서 활용된 이미지를 경유해서 작품(이라는 단일한 자아가)이 전하고자 하는 인식-정서를 충분히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보르헤스란 천재 덕에 소설은 아주 급속도로 발전합니다. 그만치 빨리 발전한 덕에 해당 영역의 적조화도 그만치 빨라지고 끝도 금방 맺습니다. 자기 시대 가장 탁월한 예술가가 그러했듯 보르헤스 역시 오직 그만이 가장 예리하게 간파했던 영역에서 이미 끝을 보았거든요. 물론 보르헤스의 끝이 소설의 끝은 아닙니다. 보르헤스로 인해 알려진 소설의 영역들이 있고, 이는 단지 보르헤스가 관심을 가졌던 부분에만 국한할만한 게 아니었거든요. 보르헤스가 주목하지 않았던 영역, 장편이 있습니다. 보르헤스의 글쓰기로 장편을 쓴다면 아무래도 부피가 널널하게 남을 수밖에 없지요. 보르헤스는 이를 잉여라 보고 무시했지만, 그 잉여에 주목한 작가들에 의해 소설은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는데요. 이른바 내러톨로지의 시작이죠.

사실 내러톨로지는 저렇게, 그러니까 무슨 장르의 일환인양 쓸법한 표현이 아닙니다. 서사 예술에 대한 비평 조류 중 하나며, 따라서 보르헤스와 구획된 내러톨로지... 이렇게 말하는 건 개념의 오용이죠. 내러톨로지는 보르헤스 이후에 등장한 일련의 작가군이 써내려간 소설을 사례로(대표적으로 존 파울즈가 있겠네요)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며 그 주창자였던 웨인 부스의 경우 보르헤스를 물고 빨던 형식주의/구조주의 비평에 날을 세우긴(시모어 채트먼처럼 양자의 균형을 꾀한 학자도 있긴 합니다만) 했다는 점에서 억지로 얽어본다면 통시적인 접점을 느슨하게나마 상정해볼 수 없는 건 아닌데... 설혹 백보 양보해서 저런 구도를 세운다고 해도 이는 그냥 너절한 비평사에 불과하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죠. 그걸 잘 아는 새끼가 왜 이러고 있느냐하면 저게 걍 편하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오해의 여지없이 사례로 들만한 작품들을 특정한다면 내러톨로지보단 탈식민론 계열의 작품이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워낙 유명한 마르케즈의 <백년의 고독>이나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근작으로는 모옌의 <홍까오량 가족>과 <열세 걸음>, 한국 작가 중 꼽는다면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나 황석영의 <손님> 하일지의 <누나> 정도가 있겠지요. 사실 굳이 내러톨로지라고 칭했던 건 탈식민론적 소재라고 말하기는 좀 애매하나 탈식민론과 유사한 내러톨로지적 양식과 호흡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 파울즈나 귄터 그라스, 마거릿 애트우드, 이언 매큐언 등을 포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이제 내러톨로지적으로 유의미한 양식과 호흡이 무언지 말해야겠지요. 간단히 말하자면 소설이 판소리처럼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판소리 명창의 흥부전을 듣는다고 생각해봅시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즐길 건 얼라때부터 지겹도록 읽어온 흥부놀부 이야기가 아니죠. 그럼 판소리 명창의 기형적인 목소리를 즐기느냐...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꼭 들어맞는 것도 아닌 것이, 서커스 보는 것도 아닌데 굳이 몇시간도 넘어가는 공연을 불편하게 앉아서 지켜볼 이유가 없겠죠. 좀 과격한 일반화가 될 것입니다만, 판소리를 향유할 때 우리가 즐기는 건 판소리 명창이 흥부전이란 익숙한 이야기를 떠드는 구술 방식입니다. 마치 재즈의 즉흥 연주와 같이 흥을 탈때마다, 세부 이야기가 어떻게 바뀌는지, 그 바뀐 부분들은 또 전체 이야기 속에서 어찌 정당화되는지를 느끼는 거죠. 으음... 어차피 저도 즐기지 않고 여러분도 관심없을 판소리 이야기보단 좀 더 친숙한 사례를 드는 게 맞겠네요. 나가수란 프로그램이 있었죠? 사람들이 나가수를 봤던 건 어차피 다 아는 곡이 궁금해서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 곡을 가수가 어떻게 부르는지가 듣고 싶어서겠죠. 그리고 이때 무대의 평가는 비단 가수가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 기교를 구사하는지만이 아니라, 그 기교와 연주시의 역량이 어떻게 기존 곡과 어우러지는지가 종합되어 결정될 것이고요. 소설이 그렇다고 기존에 있는 이야기를 재해석하는 건 아닙니다만(뭐 있는 이야기를 할 때도 물론 있습니다만) 현대로 접어들수록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가 중요해졌으며, 그에 따라 이 어떻게의 폭이 전에 비해 굉장히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지점에 주목하는 게 바로 말하기, 서사, 즉 내러톨로지지요. 당연히 내러톨로지는 소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유사 이전부터 인간이 향유했던 모든 구술/기술 방식 전체가 직/간접적인 내러톨로지의 대상입니다. 다만 그 주된 분야는 예술 비평이고, 현대에 있어 가장 활발히 연구가 진행되는 건 지금 이야기한 소설과 앞서 이야기한 영화가 되겠죠.(이 부분에 대해 좀 더 궁금한 분이라면 http://redtea.kr/?b=3&n=674 , http://redtea.kr/?b=3&n=674&c=10549 이 글과 댓글을 참고하시면 될 겁니다.)

바로 윗문단에서 제가 나가수를 떠들며 [무대의 평가는 비단 가수가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 기교를 구사하는지만이 아니라, 그 기교와 연주시의 역량이 어떻게 기존 곡과 어우러지는지가 종합되어 결정될 것이고요.] 이런 이야기를 했었죠? 우리는 어떤 곡을 들을때 그 곡에 어울리며 감흥을 더욱 더 끌어올리는 해석과 가창법이 어느 정도 정해져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자가 곡에 대한 이데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데아는 각자가 가진 것이지만 또한 일정 부분 모두가 공유할만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떤 무대에 대해서 모두가 광범위한 공감을 표시하는 걸테구요. 나가수의 비유를 끌고 왔으니 소설에서도 그런 걸 찾아볼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소설의 소재와, 그 소재에 걸맞는 형식과, 이때 자연히 도출되는 이야기, 그리고 주제의식이 어느 정도 정해져있다고 말입니다.

그럼 위에 거명한 이런저런 작품들 중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를 생각해볼까요. 작가 이문열이 다루고자하는 건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입니다. 이 비극에 마침 정감록이라는 소재가 떠오르는군요. 썩 좋은 소재죠. 조선이 멸망하고 펼쳐지는 난세에 천지신명께서 새로운 왕조의 씨를 내릴 거란 썰은 근대로 접어드는 시기에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사상입니다만 그렇게 시대착오적이기에 매력적입니다. 이 정감록의 유행은 한편 변혁의 시대에 소박한 세계의 복원을 바라는 유치하고 절박한, 아주 눈물겨운 민중의 바람이라 볼 수 있으니까요. 이야기는 난세에 정감록을 바탕으로 한 몫 챙겨보려는 어느 정씨로부터 시작합니다. 정씨는 자기 갓난쟁이 아들이 정감록이 예언한 황제라며 마을 사람들을 선동하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아들은 진짜 자신이 하늘이 내린 황제라는 걸 믿죠. 한국의 근현대사를 속에서 황제와 그 추종자들은 남에서 북으로, 다시 북에서 남으로 떠돌며 조선의 멸망, 일제의 강점, 해방과 좌우대립, 6.25 동란이라는 다양한 사건들을 겪습니다. 그 형식은? 소재가 정감록인 만큼 형식은 당연힌 연의류 군담물이 좋겠죠. 더불어 황제 개인은 처음에는 착각 속에 살지만 이런저런 인생역경 속에서 자신이 황제가 아님을 깨달으나 최후에 이르러선 진정 진인이란 말이 어울리는 인식에 다다릅니다. 사서 양식을 빙자한 연의류 군담 속 화자가 황제에게 갖는 애정을 문자 그대로만 읽는다면 삼공파일님께서 http://redtea.kr/?b=3&n=4454 에서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 한민족을 집약한 황제란 개인의 재미난 자아도피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실 그렇게 읽기만해도 충분히 좋은 소설이긴 합니다. 다만 그 이면, 그러니까 <황제를 위하여>란 소설의 세계관 속 '신'을 상정해볼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어쩌면 황제는 착각이 아니라 정말 천지신명이 내린 황제일지도 모른다고, 역경과 고난이 가득했던 한민족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모두에게 행복한 미래를 공수표마냥 뿌려대는 위정자가 아니라 권력에 치이고 밟히는 와중 그들과 같은 입장에서 그들이 예저녁에 부정했던 미신을 순박하게 믿으며 진심으로 다가가는 황제 같은 멍청이일지 모른다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문열이 <황제를 위하여>에서 그려내는 천지신명 - 추상한다면 소설 속 내포 저자일 거라 말입니다.

네, 내러톨로지의 도식 속에서 굉장히 일관성 있게 읽히죠? 민족사의 고난과 그 속에서 작가 이문열이 복원하고자 하는 휴머니즘이 <황제를 위하여>라는 작품과 이 작품을 주재하는 (화자와 구분되는)임의의 자아에 의해 아주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주제는 다시 연의류 군담이란 형식, 정감록이란 소재와 겹칠 때 이 장치들을 따라온 독자로 하여금 상당한 고양감에 취하게 만듭니다. 곱씹어 볼수록 아주 치밀하게 잘 계산된 소설이에요.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모든 소설 중 첫손에 꼽을만합니다. 그외에... 많이들 읽으시는 마르케즈의 <백년의 고독>과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도 예로 들만하겠죠. 사실 진입장벽이 낮다면 낮은 소설인데도 의외로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저런 작품이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중남미나 터키의 역사를 몰라서가 아니라 이를 작가가 왜 저렇게 썼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겠죠. 위에서 제가 <황제를 위하여>를 개괄하였듯 소설 속 이런저런 소재와 양식과 그 관계를 곱씹어보신다면 그 이유가 해명될 겁니다. 그럼 각각의 작품들이 얼마나 전율적인지 느끼게 될 거고요.

그러나 제가 말하려는 건 내러톨로지가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그니까 프루스트부터 이문열까지는 걍 배경지식을 떠든 거에 불과합니다. 정말 말하고자하는 건, 근래 들어 그러니까 대략 삼십여년 전부터,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소설들이 쓰여지고 있다는 겁니다.

하긴 정말 비슷해보이긴 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작가들 가운데 존 파울즈, 귄터 그라스, 이언 매큐언 등의 경우 마르케즈나 이문열, 파묵, 마거릿 애트우드 등과 함께 묶기는 했습니다만 그렇다기엔 '전혀 다른 소설'과 같은 성격도 없잖아 있거든요. 이때 '다른 소설'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살만 루슈디, 미셸 우옐벡, (암스트레담에서의)이언 매큐언이 있을 것이며, 국내 작가로는 천명관이 있습니다.(천명관의 경우 사실 고래 읽으면서도 아리까리했습니다. 나중에 작가 본인이 쓴 후기를 읽고서야 확신했죠.)

풀어보자면 앞서 이야기한 탈식민론 및 그와 유사한 양식을 공유하는 일련의 어법을 뒤집어놓은 소설인데요. 위에서 제가 [나가수의 비유를 끌고 왔으니 소설에서도 그런 걸 찾아볼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소설의 소재와, 그 소재에 걸맞는 형식과, 이때 자연히 도출되는 이야기, 그리고 주제의식이 어느 정도 정해져있다고 말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었죠? <황제를 위하여>를 통해서도 보였듯 이런 작품들은  사실 결말에서 이르는 일정한 인식, 즉 독자에게 주어지는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그외 문학의 다른 요소들을 가지런히 재배열할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는 이유가 그게 아닐지언정, 제아무리 방점이 말하기 양식이나 문장의 호흡에 맞춰져있다고 할지언정, 구조적으로 다른 장치들이 주제의식을 위해 봉사하는 꼴이 그려지기 마련이에요.

다시 나가수 비유를 끌고와 볼까요? 임재범이 너를 위해를 부를때 우리가 향유하는 건 임재범의 보컬 역량이지만 이를 구조적으로 재구성할시, 임재범이 전하고자하는 건 너를 위해의 사랑 타령이며 다시 우리가 임재범의 보컬 역량을 논할 때는 자연히 이 사랑타령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표현했는지가 중점에 설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 사랑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는 식으로 노래한다면 암만 노래를 잘하더라도 우리는 그 무대에 감동하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나가수가 인기를 끌때 "노래는 잘하는데 곡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좋지 않은 평을 듣는 무대가 종종 있었지요.

'전혀 다른 소설'을 이 비유에 끼워넣자면 노래를 부르며 애드립을 하다가 곡 자체가 사라지는 지점에 이르는 작품들을 말합니다. 이는 <백년의 고독>이나 <유리알 유희>처럼 '그리고 모두 망해버렸다'는 식의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허무주의도 주의는 주의고, 따라서 이를 정점으로 소설의 전체 구조를 뒤집어 배열 가능합니다. 헌데 지금 말하는 '전혀 다른 소설'들은 그렇지가 않아요. 다 읽은 다음에도 도저히 주제를 중심으로 그 구조를 일괄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애시당초 어떤 주제를 뽑는 게 무의미해요. 굳이 뽑자면 없진 않은데 소설의 장치들이 그 주제에 딱 부합하느냐하면 그렇지 않거든요. 도리어 부유를 하죠.

그래서 '전혀 다른 소설'은 때로 독자가 짐작 못할 어떤 이유로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줄때가 있습니다. 천명관의 <고래>를 두고 문학동네의 심사위원이었던 임철우가 지적했던 것처럼요. 물론 완성도가 떨어지는 인상이 남는 걸 단지 인상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 없는 건 그조차 작가의 역량이 개입하기 때문이며, 심사평에 천명관이 자신의 부족이 맞다며 선선히 시인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헌데 당장 저조차 그 '전혀 다른 소설'이라는 점에 대해 고개 한번 갸웃하지 않았던 작품은 살만 루슈디의 작품들이나 이언 매큐언의 <암스트레담> 정도 외에는 없었던 지라 단언조로 말하긴 난망하네요.

지금까지 지난 백여년간 소설의 발전 방향을 살펴봤습니다. 산문을 기반으로 하기에 다른 어떤 예술보다 명시적인 성격을 지닐 소설이란 장르는 그러나 세대를 거듭할수록 스스로를 감춰나갑니다. 백년 전 리얼리즘은 근대가 상정한 임의적 초자아에 의해 세계를 그대로 인식하려 했으니 텍스트가 갖는 배타적 고유성에 가장 충실했다고 할만합니다. 허나 그 객관적 자아를 골몰해 들어간 지점에서 세계를 포괄할만치 거대한 자아는 분열되고 세계는 다시 자아의 눈에 비친 양상으로 변화되기 이르니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과 의식의 흐름입니다. 이후 보르헤스가 등장해 세계를 없애고 텍스트를 그 자리에 내세웠으며 탈식민론 계열의 작가들은 자아의 세계를 텍스트의 세계로 재구축하지요. 작금에 이르러선 과거의 내러톨로지 전통을 모두 흡수한 살만 루슈디가 이를 역전, 텍스트의 세계에 의해 텍스트의 기의를 박살내고요. 음... 구도가 썩 그럴싸합니다? 사후분석일 뿐입니다만 이리 읊어놓고 보니 싫어도 역사주의자 시늉을 하게 되네요.


이제 그럼 짤막한 본론입니다.


영화

영화는 소설의 정반대편에 있습니다. 텍스트라는 강력한 중심이 있으며, 또한 텍스트라는 중심밖에 없기에 한없이 환원적인 소설과 달리 영화는 그 구성요소가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 점에서 종합예술이라는 표현은 보편적으로 널리 쓰이는 만큼 썩 적확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굳이 소설처럼 극단적인 대척점을 상정하지 않더라도, 그러니까 같은 종합예술 중에서도 영화가 갖는 종합성은 독보적입니다.

영화 이전에 가장 보편적으로 향유되던 종합예술이라면 오페라가 있을텐데요. 허나 오페라는 종합예술이면서도 굉장히 중심이 뚜렷한 예술입니다. 바로 음악이죠. 음악 없는 오페라는 고기 없는 탕수육이고 짜장 없는 짜장면입니다. 오페라 중에서 그나마 극을 중시했다는 바그너, (리하르트)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보더라도 스크립트만 보면 예술로서 향유할 게 아닙니다. 베르디나 푸치니는 클리셰 덩어리 신파극에 불과하고요. 물론 그 유구한 전통으로 인해 무대예술로서 성격도 발전하여 메트를 중심으로 한 화려무쌍한 연출이나 바이로이트를 중심으로 한 신개념 해석(너무 신개념이라 좀 심란할 때도 있지만) 등도 오페라에서 즐길 거리가 되긴 합니다. 하지만 엄연히 중심은 음악에 있고 새로운 연출이니 해석이니해봐야 어디까지나 그 음악과 얼마나 조응되느냐의 연장선에서 평가할 뿐이죠. 연극과 달리 장르 특성상 번안조차 께름칙한 오페라이니 원전일 음악을 훼손하는 건 터무니 없는 일입니다. 뭐 당장 연출가가 어떤 연출을 의도한다고 해도 그 연출에 걸맞게 지휘자에게 이러저러한 맥락의 해석을 해다오...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게 오페라거든요. 암만 힘을 준 연출이라봐야 통제할 수 있는 건 주연 가수까지죠. 같은 종합예술이지만 영화와 다르죠.

오페라에 비해 영화는 각 구성요소들, 그러니까 서사 매체로서, 영상/시각 매체로서, 청각 매체로서 비중이 비교적 대등합니다. 이중 무엇에 초점을 맞추느냐는 철저히 창작자의 선택으로 남지요.

처음 제가 가졌던 의문을 이 지점에서 다시 불러보자면, 과연 그중 창작자의 어떤 선택이 용인되며, 그러나 어떤 선택은 용인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종합예술 중의 종합예술이 아니랄까봐 영화의 자장이 갖는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고 영화를 향유하는 이들이 지지하는 입장도 굉장히 다양하더군요. 일예로 디씨인사이드 영화갤러리와 일간베스트 영화게시판에서 활동하던 어느 시네필의 경우 영화를 오페라처럼 접근했습니다. 오페라의 근본이 음악인 것처럼, 영화의 근본은 영상이며, 따라서 그림과 구도를 얼마나 그럴싸하게 찍으며 그 연결이 얼마나 긴밀하냐에 철저히 입각해서 영화를 평가했죠. 이런 맥락에서 그는 일부 고전 영화 감독의 작품을 제외한 수많은 작품들을 본질에 충실하지 못한 허섭쓰레기로 격하했습니다. 제가 시네필이었다면 고민했을법하고 시네필이 아님에도 꽤 재밌게 읽은 의견이었습니다만 아쉽게도 저는 시네필이 아니고 전 영화를 소설처럼 제 나름대로 규정하고픈 생각은 딱히 없으며 실제 영화라는 예술의 자장이 어찌 굴러가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에 그저 흥미로운 썰 정도로 넘겼습니다. 실제 영화장이 그렇게 굴러가는 거 같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그 유저의 관점을 아주 잊을 수는 없었던 게, 그가 찬양했던 일부 감독들, 그러니까 존 포드니 히치콕이니 하는 감독들은 영화장에서 보편적으로 거장으로 추앙받는 이들이었고 그네가 추앙받는 이유라는 걸 가만 읽어보면 제가 영화 갤러리에서 읽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음 말한대로 저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논리는 이해할 수 있었죠. 전 시각적 자극에는 영 둔하지만 오페라는 즐기는지라 오페라처럼 영화를 즐긴다면 받아들일 여지가 있었거든요. 단지 제게 그 아름다움이 쾌감으로 다가오지 않을 뿐이죠.

그래도 어렴풋 감을 잡을 순 있었습니다. 영화란 곧 여러 구성요소들이 서로 조응하는 관계망이며, 영화장 역시 그 관계망을 중심으로 작동한다...는 정도가 되겠지요. 저 역시 그 결합 양식이 문학적인 경우 영화를 보며 심미적인 쾌감을 느끼긴 하니까요.

이 글을 쓴 건 이 지점에서 여러가지 가설 사이를 부유케하는 질문 때문입니다. 저 '문학적인 방식'이라는 것에 대한 좀 더 면밀한 접근이요. 과연 이게 문학적인 방식일 것인지요. 사실 말이 문학적인 방식이지, 텍스트를 직접 스크린에 걸어대는 영화도 잘 없는데 문학적인 방식이라고 일컫는 건 그저 편의적인 지시고요. 제대로 말하자면 문학에서도 곧잘 써왔던 방식, 내러톨로지라고 하는 게 온당할 겁니다. 실제로 시모어 채트먼 이후로 내러톨로지는 영화까지 그 범위를 확장했고, 지금 시점에 이르러선 위에서 말한대로 서사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대상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물론 일부, 아니 일부라고 말하기에는 보다 많은 시네필들은 내러톨로지를 거부하거나, 내러톨로지의 개념 자체는 차용하더라도 제가 심미적인 쾌감을 느낀다는 어떤 문학적인 영화들을 거부하지요. 제 입장에서는 무어라 답하기 애매한 부분입니다. 누구 붙잡고 이야기해보고 싶은데 정작 저와 반대편에 설만한 입장의 사람이 주변에 없다보니 혼자, 혹은 주변의 지인들 붙들고 공굴려볼 따름이죠.

그 공굴려본 와중 튀어나온 가설이 '환원예술로서 영화'입니다. 위에서 아주 기일게 뺀 소설 이야기를 보셨다면 짐작하실텐데요. 그 중심 환원적인 성격이 아주 강한 소설에 있어 내러톨로지가 중심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면, 종합예술인 영화의 경우 소설과 반대로 중심 환원적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한편 그 성격상 이는 철저히 서사 매체로서 성격에 부합하는 방향이 아닐까... 이런 겁니다. 음, 너절한 인문학도가 할법한 퍼즐 맞추기처럼 보여서 찝찝하긴 한데 의외로 영미권을 중심으로 문학적인 영화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거 보고 있으면(아마 문학을 중심으로 내러톨로지의 전통이 워낙 영미권에서 강해서일텐데) 마냥 터무니없는 생각만은 아닐수도 있겠다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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