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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7/27 00:19:15
Name   nickyo
Subject   착한 사람을 잡아먹는 착한 사람들
한 여자아이를 소개받았다. 내가 본 여자중에 매우 고운 외모를 지닌 그룹에 들어갈 법한 아이였다. 첫 눈에 긴장을 하고 마른 침을 삼켜야 할 정도로. 설렘 가득한 기분으로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차가운 아이스 커피를 앞에 둔 채 오늘 날씨가 참 덥죠? 영화 좋아하세요?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그런 자리였다면 더 할 나위 없었겠지만.






그 자리는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다.





한 친구는 내가 모 노동조합의 노동관련법 교육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작 8주간의 교육이 전문가를 만들어 줄 리 없고, 나는 들었던 강의보다 강의가 메모된 교재 없이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할 그럴 수준의 사람이었다. 법이라는게 그렇게 평범한 소시민에게 쉽게 다가와서 무기가 되어주지 않는 것이다. 물론 내가 너무 머리가 나빠서 그럴수도 있다. 어쨌거나 나는 누군가에겐 노동법을 공부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졌고, 나는 그래서 전문가가 아닌 노동법을 들어본 사람임에도 누군가의 상담을 하게 되었다.


곱디고운 여자아이는, 말하자면 피해자였다. 그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는 나와 가깝게 지내는-그러나 남자친구가 생긴뒤론 단 한번의 연락도 하지 않던-후배였다. 그 아이는 다짜고짜 자기의 친구를 데려와서는 이 선배가-어느새 호칭이 오빠에서 선배로 바뀌었다만 넘어가도록 하자-그런건 잘 안다며 다 해결해 줄 거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나는 그 후배에게 지난학기에 배운 전공과목을 전범위로 다시 시험칠테니 몇 개나 '쳐' 맞는지 좀 구경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너 전공수업 전문가냐? 어? 8주 강의들은 내가 뭘 알겠냐 어? 그런데 따지기도 전에, 한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고, 한 여자아이는 여전히 불안하고, 슬프고, 고독해 보였다. 다행히도


아무 일도 없었다. 그 어색한 커피숍의 자리에는, 이따금 왜 말을 하지 않냐고 다그치는 활달한 후배의 오지랖과 나 잘 모른다고 둘러대는 한 평범한 남성과 그리고 친구의 선의를 중간중간 필사적으로 막는 고운 여자아이의 손만이 몇 번 지나갔다. 후배는 기어코 내 연락처를 알려줘도 되냐고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톡방에 초대를 했다. 둘은 가봐야겠다고 했고, 나는 약간은 벙 찐 상태로 혼자 집에 들어왔다. 책장에는 먼지가 약간 쌓인, 아주 연하게 쌓인 노동법 교재가 있었다.


두꺼운 책을 펼쳐 앞 부분을 읽다 잠이 들었다. 이틀정도는 그렇게 수십페이지를 읽다가 이내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며 카톡에 새 메세지가 하나도 없을 무렵, 그 아이에게서 따로 연락이 왔다. 그 아이는, 만나서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카톡으로 물어볼 게 있다고 했다. 나는 잠시 답장을 미루다가, 전화로 하는게 낫지 않겠냐고 물었다. 1이 사라진지 한참 뒤에, 그녀는 지금 통화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이야기는


참으로 딱했고
참혹했다.

흔히 있는 어느 스탠딩 바의
예쁘장하게 입고 서서 말동무만 하면 된다는
시급이 쎈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어리숙한 여대생이
사장의 요구와 손님의 접근을 요렁껏 처리하지 못하고
점점 과한 노동을 요구받다가
퇴직할 때에는 제대로 된 임금정산조차 못받고
성적인 모욕까지 당해야했던
그런
이야기였다.
담담하게도, 그러나 마지막에는 약간의 떨림으로
얼굴을 마주보고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이내

모르는 분이니까 이렇게 말씀 드리지만
크게 한숨을 들이쉬고
잠시의 침묵이 흐른뒤에
몸을 판 것은 아니었다고
그런 일은 아니었다며 한번 더 목소리는 크게


떨렸다.


나는 며칠전에 폈던 교재를 다시 꺼내면서
무슨 말을 찾아야 할 지 몰라
힘들었겠어요.
그래서 월급은 아직도..
라고 물었고
그녀는

제가 그런일을 했지만 돈은 받아야 하는게 맞는거 아니냐고
아까보다는 좀 더 격양된 목소리로
그러나 한없이 처량한 억양으로
물었다.

나는 아주 쉽게도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며 당연히 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후배가 어떻게 말해줬는지는 몰라도 난 법률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에게 상담을 하는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래도 돈이 걸린 문제고.. 잘못된 지식으로 싸우게되면
나중에 진짜 질 수도 있는 문제니까요.. 라고 말을 줄이는 내게 그녀는 다시 돈은 받을 수 있는 거겠죠 라고 물었고
나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답했다.

전화는 이내 예의바른 스무살 어른들의

실례했습니다. 도움이 못 되어주어 미안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저는 그냥.. 아뇨, 괜찮습니다. 이런걸 주변에 말할 수가 없어서..OO이도 이 일을 깊게는 몰라요. 아..예.. 그러니까 그 애한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아.. 물론이죠. 문득, 전화통화가 나았음을 깨닫고, 전화는 끊어졌다.


그리고 이 일을 전부 까먹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
나는 모르는 번호로 또 한번의 전화를 받았고
목소리를 듣고도 한참을 생각해야 했고
이내 OO의 친구라는 말을 듣고서야 아 그때.. 라고 알아차렸다. 그녀는 다짜고짜 시간이 되냐고 물었고 나는 좀 후줄근하긴 했지만 별 일 없다고 답했다. 예쁜 친구의 앞이라 그나마 깔끔한 옷이라도 입고가고 싶었으나 깔끔해봐야 빨래를 했느냐 마느냐 따위가 기준이었기 때문에 다급히 근처의 커피숍에서 만남을 가졌다. 그녀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한 여름에 긴팔 가디건을 걸치고 나와서는 커피숍에 혼자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었다. 만약 그 커피숍에 다른 손님이 한 팀이라도 있었다면 못 찾았을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너무나, 너무나 분위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는데, 맞은편 자리에 앉아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 순간 이 분위기가 그때와 다를 바 없음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어쩌면 불길하게도 무언가가 더 나빠졌을

것임을. 어렴풋이.


그리고 그것은 정말 태연자약하게 예상 그대로였다.


그녀는 착한 사람이었다. 원래부터 착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힘들고 고통스러워 하며 착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그 자리에서 그녀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앞 뒤 사정을 최대한 가리고 인터넷이나 주변 지인을 통해 해결법을 찾아보았으나, 뚜렷한 행동방침을 정하지 못했고 무료법률상담에서는 구체적인 부분을 알려주지 않으면 대응이 어렵다는 반응을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언젠가는 싸워야 할 일이었다는 생각에 큰 용기를 내어-나는 대체 그 바에서 일한 일이 왜 용기있게 말을 꺼내야만 하는 나쁜일이 되었는지 정말로 화가 많이 났지만- '아는' 사람들에게 다시 물었다. 아마도 그녀의 '아는'오빠나 '아는'친구나 '아는'사람들은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했기에 물었을 것이다. 그 경솔함은, 아니. 그녀가 아닌 그녀 주변 사람들의 경솔함은

어쩌면 그깟 엉덩이 한번 만져진게 대수라고 폭언을 한 그 바의 사장보다도
손님이 여기와서 편하게 돈 버는 년이라 그런지 비싸게도 구네 하며 팔을 잡는 중년의 말보다도

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를 찌른 듯 했다. 그들은 먼저 왜 '착한' 니가 그런데에 가서 일을 해서 그러냐고 했고, 개중에는 '실망'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또 개중에는 '이거 다른 사람은 아냐?'고 묻기도 했고, 결국에는 '니가 잘못한거지 그런 업소에서 일해놓고' 라거나 '그래도 그동안 많이 벌었겠네'라거나 '명품이 땡기디?'라거나, 혹은 남 몰래 그녀를 좋아했던 어떤 순수한 대학생의 순정이 술에 취해 '나랑도 한번 자면 안되냐!'하는 주정에


그 처절한 배신과 모욕속에서
한 마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괜찮냐고 물어본 사람이 단 한번 인사를 했을 뿐인 나 뿐이었다고. 그래서 이제는 물어볼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무료법률상담이나 인터넷까지 다시 이 이야기를 떠들기엔 어떻게 될지 너무 무섭다고. 다 착한 사람들이었거든요. 다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녀는 더 이상 SNS도 카톡도 아무것도 안 보고 집에만 있다가 그렇게 내게 전화를 건 것이다.


나는 그 때에 노동법 책을 더 잘 읽었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와
왜 착한 사람들은
왜 착한 사람들을 잡아먹어야만
이 사람은 왜 괜찮다는 말을 듣지 못해서
더 나쁜 사람이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아마도 외제차라도 끌고 다닐 법한 그 사장이 다른 알바생의 엉덩이를
한층 싸게 내놓으라고 소리지를 그 시간들 사이에도
이렇게 고통스러워만 하는가에 대해
화가 났고, 슬펐다.


저는 잘 모르지만요, 우리 같이 노동법 책을 읽으면서.. 해결책을 찾아봐요.
OO씨가 잘못한건 없다고 생각해요. 조금 진정이 되면..
그러나 나는 빈말로라도
당신의 친구들도 진심은 아니었을꺼라고
말해주지는 못했다. 요령이 없어서일까.
다만,
한번 더 괜찮지 않은 사람에게 괜찮..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노동법 교재를 제본해 주었고
몇 주 동안 전화로, 때때로는 손님이 없는 한적한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서
법률의 내용보다는
그때의 기억을을 하나씩, 천천히 꺼내어
그것도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 새끼 참 나쁜 새끼네. 하고.
그리고,
만오천원이 넘는 비싼 시급을 받아 낸 것이
엄마 없이 아버지가 홀로 일해 번 돈으로
서울에서 방세를 내고 대학을 다닐수는 없었다는 사정임을
그동안 터뜨리지 못했던 울음과 함께 듣고서야
우리의 만남은 끝이 났다.


한 동안 연락이 없던 그녀는 내 걱정이 최고조에 달해 그 'OO'후배를 찾으려 할 때 즈음에
그녀는 그동안 고마웠다며 자신은 휴학계를 내고 내려가겠노라고 했다.
싸우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언젠가 꼭 다시 오면
그때 진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고. 이렇게까지 자신을 위해줘서 고맙다며.
이런 인사가 참 뻔뻔하고, 어쩌면. 자기가 착각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떠나서 X년소리를 듣더라도 그건 자기 잘못이라고
또 나쁜 버릇처럼 스스로를 탓하는 말로
마지막 통화를 끊으려 했다.

나는


괜찮아지면
그때 서울에 올라왔을땐
나랑 데이트 해줘야 한다고
그쪽이 너무 예뻐서
내 생각에 그쪽이 잘못한건 그거 하나 정도 같다고
그러니까 부디
잘 내려가서(평화롭게) 지내다 오라고.
다시, 이 곳으로(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보자고)
몇몇 군데의 말을 뺀 채 인사를 했다.
처음으로 듣는 웃음과, 울음이 뒤섞여 떨리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나의 첫 노동법과 관련된 이야기는 끝이났다.



아직 돌아온다는 연락은 오지 않지만
그 곳에는 착한 사람을 잡아먹는 착한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며
저장되지 않은 휴대폰 번호를 기억해본다.



* Toby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08-0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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