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5/10/08 09:32:30
Name   눈시
Subject   사도 - 사랑치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니 무서워서...
세자는 잡학을 좋아했습니다. 그림 그리기 좋아하고, 수호지 같은 소설이나 옥추경 같은 도교쪽 책들 말이죠. 귀신을 쫓는 내용이 있다는데, 거기에 빠지더니 뇌성보화천존이 보인다느니 하면서 울부짖었다 합니다. 그 이후에는 옥추라는 단어를 멀리 하고 천둥 자체는 물론 그게 담긴 글자도 무서워했다 하죠. 이 때가 영조가 선위 쇼를 한 1752년 겨울입니다. 추운 겨울에 엎드려 있던 몸의 고통과 영조에 의해 당한 마음의 고통이 결국 제대로 병이 된 것이죠. 이후 가슴이 두근거리는 병이 고질병이 되었다 합니다. 혜경궁은 옥추경 탓으로 돌리지만, 그런 미신에 빠진 진짜 원인이 뭐겠습니까.

영조 1755년, 영조 31년 전후로 실록에서도 이런 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침 영조도 극도로 까칠할 때였습니다.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났거든요. 자신을 부정했던 무신란의 잔당이 육십을 넘은 나이에 다시 나타났고, 영조를 부정하며 기꺼이 죽어 갔습니다.

이 때 영조는 매일마다 밤늦게까지 국문에 참가합니다. 끝나고는 늘 세자를 불러서 '밥 먹었냐'고 묻고는 바로 가 버렸죠. 세자가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고 의관에게 털어놓은 게 이 직후입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선희궁 영빈 이씨가 병이 있어서 찾아갔는데, 마침 화완옹주가 있어서 같이 있었더니 영조가 화를 내며 가라고 했다 합니다. 화완옹주 역시 영빈 이씨의 딸, 세자와도 친했던 사이입니다. 영조는 사랑하는 딸과 미워하는 아들이 같이 있는 걸 참지 못한 것이죠. 이 때 급히 높은 창문을 넘어 달아났다 합니다.

+) 여기서 화완옹주와 근친관계가 아니었냐는 말도 나옵니다. 무려 한중록을 연구한 50년대 첫 논문에서 말이죠 (...); 정병설 교수는 '영조가 이를 알았다면 비극의 원인 중 하나가 된 게 아니겠는가?'라고 가능성을 남깁니다. 진지하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다음 해에는 갑자기 영조가 세자를 찾아왔는데 세자가 세수도 안 하고 있어서 술 먹었다고 확신, 욕 합니다. 금주법을 엄하게 시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자는 먹지 않았지만 아버지 앞이라 두려워서 먹었다 했고, 옆에 있던 상궁이 안 먹었으니 직접 냄새를 맡아 보라고 했죠. 세자는 자기가 먹었다고 아뢰었으니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말라 하는데, 영조가 이 때 폭발합니다.

"어른 앞에서는 개나 말도 꾸짖지 못하는데 어찌 그리하는가!

세자는 변명하길래 그랬다고 둘러댔죠. 영조는 그렇게 욕에 욕을 하고 간 후, 대신들에게도 세자에게 훈계하라 합니다. 먼저 세자를 모시는 관원들이 들어왔죠. 세자는 결국 폭발합니다.

"너희 놈들이 부자 사이를 화목하게는 못하고, 내가 이리 억울한 말을 들어도 한마디도 아뢰지 않으니, 그리하고도 감히 여기 들어올까보냐, 다 나가라!"

그렇게 화를 내다가 촛대를 쓰러뜨려 버렸고, 불이 나 버렸죠. 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세자 내외는 피하다가 왕명을 듣고 오던 대신들과 마주칩니다.

"너희들이 부자 사이는 좋게 못하고, 녹봉만 먹고 간언은 하지 않으며, 그러고도 입시를 하러 가니, 너희 같은 놈들을 무엇에 쓰리."

하면서 대신들을 내쫓았다 하죠. 그리고 사건이 끝난 후 영조에게 욕 먹습니다. 신하들 앞에서 말이죠. 영조는 이번에도 세자가 일부러 질렀다고 생각하고 불같이 화를 냅니다.

"네가 불한당이냐, 불은 어이 지르니!"

결국 세자는 못살겠다면서 우물에 투신하려 합니다. 겨우 말렸지만 이 때의 일은 더욱 한으로 남았죠. 그나마 이 해에 그렇게 가고 싶던 능행에 따라가면서 기분이 좀 풀렸다고 합니다. 일국의 세자가, 22세가 되도록 숙종릉 등에 따라가지 못 했는데 화완옹주에게 부탁해서 겨우 따라가게 됐죠. 영조가 화완옹주 말은 정말 잘 들어준 모양입니다.

이 즈음하여 실록에서 세자가 서연(유학 공부)를 게을리 한다는 질책들이 보입니다. 영조도 꾸짖고, 신하들도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 하죠. 세자는 알았다 알았다 말은 잘합니다만, 갈수록 더 심해집니다. 영조를 최대한 보지 않으려 하고, 공부와 정사에도 갈수록 멀어져 갔죠. 그래도 일 하는 모습이 보이긴 합니다만, 날이 갈수록 병으로 약방에 가는 일이 너무 잦아집니다. 그럴만도 합니다. 앞으로 더욱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


인원왕후. 숙종의 왕비로 세제 때부터 영조의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영조는 그녀를 정말 어머니처럼 모셨죠. 세자에게도 정말 좋은 할머니였습니다. 궁중 법도를 까다롭게 지키게 했지만, 이건 대비로서 당연한 모습이었죠.

정성왕후는 영조의 왕비이건만 사랑받지 못한 여인입니다. 그의 조카인 서덕수가 삼수의 옥에 연관됐고, 그 때문에 영조에게 큰 짐이 됐기에 그랬을수도 있겠습니다. 이 때 화완옹주의 남편 정치달이 같은 날에 죽었는데 영조는 아내의 죽음을 뒤로 하고 신하들이 말리는데도 사위의 상에 먼저 갑니다. 사도세자에게도 잘 해 주었고 세자도 그녀의 죽음에 크게 슬퍼했죠. 그녀가 죽은 후 새로 왕비로 들어온 이가 바로 정순왕후입니다.

1757년 초 정성왕후의 병이 갈수록 깊어졌지만 영조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신하들도 직접 말하지 못하고 돌려서 말해야 했죠. 반면 세자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했고, 결국 의식을 잃자 자기가 왔다면서 울었습니다. 영조는 나중에야 왔는데 세자는 이 때 또 놀랍니다. 그리 울던 와중에도 무서워서 방 한구석에 움츠러들어 엎드러 있었죠. 그런 세자를 영조는 옷을 제대로 안 입었다며 꾸짖습니다.

그 직후 인원왕후도 죽습니다. 이 때는 영조도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죠. 그렇게 한 해에 두 명의 대비가 세상을 뜹니다. 그나마 세자를 보듬어줄 수 있던 여인들이 떠난 것이죠. 영조는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 하게 합니다. 곡 하러 올 때마다 옷 입은 것등 꼭 무언가를 트집잡아 꾸짖었죠. 신하들이 보는 가운데서 말입니다.

이런 울분들이 의대증, 옷을 제대로 못 입는 병으로 이어졌고 또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내관을 죽이고 그 목을 들고 다닌 것이죠. 그 이후로 세자의 미친 짓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선희궁 영빈 이씨도 이 소식을 듣고 걱정했지만, 아들을 제대로 꾸짖을 생각은 못 한 모양입니다. 어쩔 수 없겠다 싶어서 혜경궁에게 영조에게 말하자 했지만 혜경궁은 나중에 어찌 되겠냐면서 말립니다. 이 때 혜경궁은 자기가 말한 걸 알게 되면 날 보실 마음이 없어지시고 내 몸에 큰 화가 이를 듯 해서 말렸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후 일들을 보면 그녀 역시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게 된 것 같습니다.

사건이 하나 더 일어납니다. 1757년 11월, 영조는 신하들에게 "세자가 7월 이후로 진현한 적이 없다"고 말 합니다. 세자가 왕에게 인사하러 오지도 않았다는 것이죠. 대신들이 급히 이를 세자에게 알렸고, 세자는 진현하겠다며 말 잘 해 달라고 했죠. 영조는 '잘못한 걸 아니 조선이 흥하겠다'면서 기다렸고, 세자가 옵니다. 그런데... 영조는 세자를 본 후 상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 땅바닥에 엎드려 곡으르 하죠. 신하들이 급히 나와서 이유를 무닺 이렇게 말 합니다.

"세자가 뉘우쳐 깨달았다는 말들 들어 기뻐서 자랑하고 칭찬하려고 했는데, 세자는 잘못했다고만 하고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신하들은 평소 세자에게 너무 엄하게 대해 무서워서 제대로 말씀 못 드리는 거라면서 들어가서 조용히 명을 내리라고 설득하죠. 그러자 영조는 승지에게 선위하라는 교지를 쓰라고 강요합니다. 승지는 붓을 던지면서 죽어도 못 쓰겠다고 했죠. 그러면서 또 신하들 보는 앞에서 울고 있는 세자를 이렇게 꾸짖습니다.

"네가 이미 후회막급하다고 했는데, 그 뉘우치는 내용을 말하지 않으니, 남의 이목(耳目)만 가린 것에 불과하다.”

이에 유척기가 '자식을 가르치는 데는 귀천의 차이가 없다"면서 말이 너무 지나쳐서 세자가 무서워서 그런 것이니 사랑과 온화함으로 조용히 훈계하면 잘 될 것이다고 합니다. 홍봉한도 평소에 입시하라는 말만 들어도 무섭다면서 너무 엄하게 대한다고 하죠.

+) 보시다시피 신하들도 영조가 너무 엄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겨우 이 일이 마무리되고 세자도 돌아가는데, 뜰에 내려가자마자 기절합니다. 맥이 풀린 거겠죠.

한중록에는 이 일의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인원왕후의 나인 빙애를 세자가 데려온 거였습니다. 죽었다 하나 윗사람의 궁녀였으니 궁중 법도로 안 되는 거였죠. 세자는 어거지로 데려왔고, 영조가 이 때 알게 된 거였습니다. 이후 세자는 꾀를 내서 다른 사람을 빙애인 척 돌려보냈고, 이게 들켜서 영조에게 욕 먹고 우물에 몸을 던집니다. 위의 선위 쇼가 있은 다음 날의 일이었죠. 영조는 이런 자살 소동에 또 분노했고, 홍봉한(세자의 장인)을 비롯해 세자를 실드 치고 우물에 떨어지는 걸 제대로 보호하지 못 한 이들을 파직시키고 귀양보냅니다.

+) 이렇게 어거지로 데려온 빙애라는 여인의 운명은... 다음편에 나오겠군요.


세자가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홍봉한은 혜경궁의 아버지, 세자의 장인입니다. 당연히 사위를 최대한 보호하려 했고 세자도 장인을 믿었죠. 자기의 정신병을 장인에게 편지로 보내며 약을 지어달라 부탁합니다. 이 때도 홍봉한은 세자를 비호하려 했다가 영조에게 말을 꼬투리 잡혀서 쫓겨났죠. 그래봐야 한 달도 안 돼서 다시 부릅니다만. 대표적인 탕평당으로 영조가 척신정치를 펴면서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상태가 나날이 악화되는 가운데 의외의 일이 벌어지긴 했습니다. 다음해인 1758년 2월 말의 일이었죠. 영조가 세자가 있는 곳에 찾아왔고, 세자도 두려움 속에 맞습니다. 헌데 이제까지와는 달랐죠. 역시 꾸지람이 있었고 그 중에는 세자가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서도 있었습니다. 세자는 아니다 못하고 숨김없이 말했죠. 그러면서 이리 말 합니다.

"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낫나이다."
"어찌 그러하니?"
"마음이 상하여 그러나이다."
"어찌하여 상하였니?"
"사랑치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하오이다."

"내 이제는 그리 않으리라."

2월 26일, 실록에는 세자가 영조에게 갔고 여러 대화를 나눈 후 영조가 이렇게 말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네가 지금 이와 같이 하니, 우리 나라가 그대로 되겠다. 이제 동궁(세자)을 보니, 내 마음이 후련하다."

무엇이 잘 돼 가는 걸까요. 혜경궁도 영조를 만나서 펑펑 울면서 세자에 대한 사랑을 얘기했고, 영조가 알겠다 하면서 '잠은 어찌 자는지 밥은 어찌 먹는지 묻는다'고 세자에게 전해라 했답니다. 세자는 이를 듣고 울고 웃으며 감격했다 하죠.

하지만... 이걸로 부자관계가 나아지겠냐는 아내의 말에 이렇게 답 합니다.

"일부러 그리 하시는 말씀이니 믿을 것이 없으니, 분명 내가 죽고 말 것이다."

...

영조의 갑작스러운 변화, 굳이 이유를 찾자면 이 때 영조가 아팠다는 것이 있을 겁니다. 세자를 부른 이유도 전에 혈변(피똥-_-;)을 봐서 건강이 안 좋아서 그런 거였죠. 이 해에 영조는 많이 아팠습니다. 영조 나이 예순다섯, 세자 나이 스물넷이었습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요. 아프니까 세자에 대한 사랑이 다시 생긴 것이든, 언제 죽을지 모르니 후계자를 더 이상 흔들면 안 되겠다 생각한 것이든간에요.

그리고 세자의 말처럼, 행동은 원래로 돌아갑니다. 둘의 사이는 갈수록 멀어졌죠. 세자는 진짜일지 꾀병일지 알 수 없는 병으로 덕성합 등 자신이 머무는 곳에서 일합니다. 승지들이 공문서를 가지고 왔고, 신하들도 세자를 직접 찾아왔죠. 약방에서 신하들을 만날 때도 많았구요. 영조는 세자가 제대로 정사를 보지 않는 것을 질책하지만, 세자는 병을 계속 이유로 댑니다.

+) 정신병에다 우물에 떨어진 것 등 아프긴 아팠겠지만, 영조 몰래 논 걸 보면 심한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네요.

신하들은 나름대로 둘 사이를 중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둘은 그걸 원하지 않았죠. 영조는 세자가 병이 있으니 굳이 문안하러 올 필요 없다 했고, 세자는 자신의 병 및 영조의 거절을 핑계로 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둘 사이는 멀어져 갔죠. 영조는 아예 세자에게 관심이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맞을 겁니다. 영조의 마음은 다른 이에게 기울고 있었거든요.

--------------------------------------------------------

"나이 어린데도 성숙하여 부복(어른에게 엎드림)하는 것이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으니 신기하다고 이를 만하다" - 세손 나이 8살, 소학을 읽어보게 한 후

"임금이 세손에게 묻기를, '쇄소(灑掃)란 무슨 뜻인가?' 하니, 세손이 대답하기를,
"어른에게 먼지를 날리면 불경(不敬)하게 되기 때문에 물을 뿌리고 나서 바닥을 쓰는 것입니다.” 하였다. 엄인이 말하기를,
‘경(敬)’ 자로써 대답을 하시니, 이미 '소학'의 큰 뜻을 터득하셨습니다.”
- 세손 나이 아홉 살

1752년, 혜경궁은 정조를 낳습니다. 역시 세자처럼 빠르게 원손이 되고 돌에 세손이 되죠. 세손에 대한 공부 요구 역시 세자 때와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세손은 참 많이 달랐죠. 나이가 들수록 세손은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3701005_002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3709016_001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3803029_001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3804002_005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3804025_001

영조와 세손의 문답들입니다. 다 아홉살에서 열살에 한 것들이죠. 영조는 자신의 경연(유학 공부) 자리에 세손을 불러서 글을 읽게 하고 문답을 했고, 세손의 공부 시간에 자기가 가기도 했습니다. 세자가 겪었듯, 너무 심한 기대고 간섭이었죠. 물음 역시 만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세손은 정말 막힘이 없었죠. 같은 나이 세자는 동몽선습, 소학 등도 어버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손은 소학을 떼고 대학까지 시작했죠.

+) 영조는 자신도 죽기 직전까지 경연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웬만한 왕들도 나이 좀 들면 안 하는 거였는데 말이죠.

세자의 예가 있으니 죽어라 공부시킨 것도 있을 겁니다. 세손까지 영조의 눈밖에 나면 안 될 테니까요. 하지만 세자 때라고 안 그랬겠습니까. 세손이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저 정도로 머리가 좋지 않았다면 영조의 기대를 채울 수 없었을 겁니다.

그만큼 영조는 세손을 이뻐했습니다. 세자는 병이 있으니 오지 말라고 했으면서 세손은 보고 싶다면서 데리고 오라, 재워주고 싶지만 여의치 않으니 아쉽다는 등 정말 아꼈죠. 자기가 그리도 원하던, 자신의 후계자를 드디어 찾은 겁니다.

지금 세손을 보니, 진실로 성취(成就)한 효과가 있다. 한없이 많은 일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3백 년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

첫 링크에서부터 이미 이 말을 하고 있죠. 의미심장한 말이고, 영조의 진심이었을 겁니다. 세손은 잘 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조는 늙었는데도 아직 죽음이 멀리 있는 것 같았죠. 몇 년만 더 살 수 있다면, 이 아이가 조금 더 키운 다음에라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문제는 세자였습니다. 자신의 아들이자 세손의 아버지, 합법적인 계승자가 살아있었죠. 공부는 하지도 않고 맨날 병 핑계만 대는, 미친 모습만 보여주는 세자 말입니다.

"세손을 귀하게 대하시니, 세손이 있는 이상, 날 없애도 상관없지 않은가?"

세자의 병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죠. 어느새 세자는 존재 자체가 문제가 돼 가고 있었습니다.

* 난커피가더좋아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5-10-16 08:12)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7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76 기타삶의 의미를 찾는 단계를 어떻게 벗어났냐면 8 골든햄스 24/03/14 953 19
    1375 기타소수 사막은 얼마나 넓을까? 4 Jargon 24/03/06 876 4
    1374 기타민자사업의 진행에 관해 6 서포트벡터 24/03/06 834 8
    1373 기타노무사 잡론 13 당근매니아 24/03/04 1536 16
    1372 기타2024 걸그룹 1/6 2 헬리제의우울 24/03/03 623 13
    1371 기타소회와 계획 9 김비버 24/03/03 856 20
    1370 기타터널을 나올 땐 터널을 잊어야 한다 20 골든햄스 24/02/27 1565 56
    1369 정치/사회업무개시명령의 효력 및 수사대응전략 8 김비버 24/02/21 1401 16
    1368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자율 축구'는 없다. 요르단 전으로 돌아보는 문제점들. 11 joel 24/02/19 955 8
    1367 역사 AI를 따라가다 보면 해리 포터를 만나게 된다. 4 코리몬테아스 24/02/18 1055 11
    1366 체육/스포츠(데이터 주의)'빌드업 축구'는 없다. 우루과이전으로 돌아보는 벤투호의 빌드업. 13 joel 24/02/12 1328 30
    1365 기타자율주행차와 트롤리 딜레마 9 서포트벡터 24/02/06 1186 7
    1364 영화영화 A.I.(2001) 18 기아트윈스 24/02/06 1117 23
    1363 정치/사회10년차 외신 구독자로서 느끼는 한국 언론 32 카르스 24/02/05 2555 12
    1362 기타자폐아이의 부모로 살아간다는건... 11 쉬군 24/02/01 2152 69
    1361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4, 完) 6 양라곱 24/01/31 2816 37
    1360 기타텃밭을 가꿉시다 20 바이엘(바이엘) 24/01/31 1002 10
    1359 일상/생각한국사회에서의 예의바름이란 18 커피를줄이자 24/01/27 6534 3
    1358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3) 17 양라곱 24/01/22 6161 22
    1357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2) 17 양라곱 24/01/17 5693 14
    1356 요리/음식수상한 가게들. 7 심해냉장고 24/01/17 1254 20
    1355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1) 9 양라곱 24/01/15 2674 21
    1354 기타저의 향수 방랑기 31 Mandarin 24/01/08 3296 2
    1353 의료/건강환자의 자기결정권(autonomy)은 어디까지 일까? 7 경계인 24/01/06 1278 21
    1352 역사정말 소동파가 만들었나? 동파육 이야기. 13 joel 24/01/01 1308 2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