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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0/20 20:27:58
Name   마르코폴로
Subject   세계화, 무역 그리고 전염병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계화와 강간(?)대국을 부르짖은 이래 한국에서도 세계화는 낯설지 않은 개념이 되었습니다.(실제로 전 국민이 국제통화기금도 알게 되었..) 지금과 같은 전 지구적인 규모는 아니지만 고대와 중세에도 세계화가 이뤄졌다고 볼 만한 시대들이 몇 군데 존재합니다. 경제사에 국한해서 살펴보자면 세계화의 수준을 측량하기 위한 척도로는 경제 활동의 규모와 무역의 지리적 범위, 시장 통합의 수준, 시장 통합의 속도, 경제 제도의 상호 의존성 정도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척도들은 대체로 높은 수준의 상관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한가지만을 지표로 삼아도 세계화의 시기적 추이를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한 척도에 비춰 살펴보더라도 세계적 규모의 시장 형성이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관해서는 학자 별로 이견이 존재합니다. 
애덤 스미스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착과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이 의견에 동의해 왔습니다. 1970년대에 월러스틴은 1450년 - 1640년 시기에 서유럽이 자본주의의 기초를 처음 확립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짧은 기간 내에 전 세계의 많은 지역들을 예속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계가 하나의 경제 틀로 묶인 것을 세계체제라고 지칭합니다. 그는 세계사를 중심부와 주변부 간의 비대칭적 관계가 진화해온 과정으로 이해했습니다. 중심부(서유럽) 주위에 반주변부, 또 그 바깥으로는 주변부가 둘러싸고 있으며 중심부와 반주변부, 주변부 사이에는 착취와 예속관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그의 역사 인식을 발전시킨 이른바 ‘세계 체제론’ 진영의 학자들은 16세기 이래 세계적 분업과 다각무역이 작동하는 단일한 세계 경제가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진영에 속하지 않은 역사가들도 이 시기가 세계 경제의 중심이 중국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는 전환의 시발점이라는 것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중국에서 유럽으로 경제적 우위가 넘어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조공 관계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단일 제국 체제가 서유럽의 다수의 국가들의 팽창 정책에 의해 주도권을 빼앗겼음을 의미합니다.
한편, 세계 경제의 형성시기를 더 앞당겨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아부-루고드는 이미 12세기 말이면 몽골의 주도하에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무역망이 활발히 작동하였음을 주장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13-14세기에 걸친 ‘팍스 몽골리카’의 시기입니다. ‘팍스 몽골리카’란 몽골 지배하의 평화라는 의미로 몽골이 대제국을 건설함으로써 국지적 불안 요소가 해소되고 장기간에 걸쳐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안정이 유지된 시기를 말합니다. 이 시기에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여덟 개의 무역 회로가 작동하는 세계 체제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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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개의 무역 회로


이보다 더 빠른 시기, 예를 들면 로마와 한 제국이 공존하던 시대를 지적하는 역사가도 있습니다. 




Ⅰ. 팍스 몽골리카와 흑사병


1. 팍스 몽골리카(원조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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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정복은 해서 무얼하나?


1206년 칭기즈칸은 몽골의 부족들을 통합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대대적인 정복을 통해 영토를 확장합니다. 1211년 금나라와의 전쟁을 시작으로 한 영토 확장이 1279년 송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끝날 때쯤 그들이 정복한 영토는 동으로는 한반도, 서쪽으로는 중부 유럽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거대한 제국은 5대 칸인 쿠빌라이 대에 이르면 칭기즈칸의 자손들에 의해 분할됩니다. 쿠빌라이는 중국을 비롯해 인접한 만주 일부와 몽골을 차지했고, 훌라구는 일한국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이라크와 이란을 통치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킵차크한국을 세운 바투가, 이란과 중국 사이의 중앙아시아는 차가타이가 차지했습니다.
쿠빌라이와 그의 후계자들이 세운 원 제국은 중국 역사에서 당과 함께 가장 개방적인 정책을 실시한 왕조입니다. 한족은 물론이고 서역의 다양한 종족 출신들에게 관료직을 맡겼으며,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문화에 대해서도 관대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런 정책과 더불어 원 제국은 국제적 교역과 교류도 활발히 전개하였습니다. 개방적인 국가 정책 덕분에 마르코 폴로와 같은 이방인들이 오래 머물면서 활동을 할 수 있었고, 그 여파로 다른 문화권으로 중국에 관한 지식이 펴져 나가게 됩니다. 일한국에서도 원이 취한 것과 유사한 방식을 활용해 기독교도와 유대인을 비롯한 다른 외부인들을 관료로 기용하였습니다. 킵차크한국의 경우 러시아 및 기타 슬라브족 종속민과 물리적으로 떨어져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합니다. 다양한 명목으로 몽골인이 부과한 무거운 세금은 동방정교회의 협력과 몽골 조사관의 감독 아래 러시아 왕자들이 대신 거두어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인들이 수백 년간 겪어야 했던 ‘타타르의 멍에’라는 오명입니다. 차카타이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스텝과 오아시스 지역을 지배하다 보니 오아시스 주변의 정착 농경과 스텝 목축을 혼합한 전통적인 방식을 유지했습니다. 자연히 중앙의 통제가 느슨했습니다.
전체 제국을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에서 경쟁과 갈등이 존재했지만 ‘팍스 몽골리카’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었습니다. 실제로 원을 포함한 3한국에서는 단일화폐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몽골인들은 항상 무역을 장려했으며,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는 무역로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고 번화했습니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넓은 영토를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교통망 확충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로를 정비하고 10리 간격으로 잠치(Jamchi)라고 하는 역참이 설치했습니다. 역참제는 원래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마련된 것이지만, 제국이 안정세로 접어들면서 육상교통로를 이용하는 상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3세기 중반 이래 약 1세기 동안 몽골의 지배하에 유라시아 지역은 단일한 질서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 질서 아래 교역과 교류의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모로코 출신의 여행자 이븐 바투타는 그의 여행기에
 "이 나라(원 제국)에서는 보물을 잔뜩 지니고도 혼자서 도보로 아홉달 동안 아무런 걱정 없이 다닐 수가 있었다. 각 숙박지 마다 기병대가 감시하는 여행객 숙소가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을 남겼습니다.(하지만 이븐바투타는 돼지고기를 먹는 것과 같은 이교도의 풍습에 불편함을 느낀 나머지 중국을 그리 맘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1340년대 초반 피렌체의 상인 프란체스코 발두치 페골로티가 쓴 '마케팅의 실제'에 따르면, 크림에서 베이징에 이르는 육상 무역로는 “밤이든 낮이든 완전히 안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전한 무역로는 상인들에게 많은 이득을 줬는데 특히 유럽에서 아랍을 배제하고 직접무역에 나선 이탈리아인들이 수혜를 입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은 흑해 지역에 거주하면서 몽골의 정복이 실현한 기회를 제대로 이용했습니다. 여행은 상대적으로 안전했고 직접 교역의 이익은 컸습니다. 페골로티에 의하면, 상인들은 여행경비와 관세로 약 3500플로린의 경배를 들이면 교역을 통해 2만 5000플로린을 벌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 온 유럽인들은 비단 같은 전통적 수출품뿐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또한 사들여 이슬람 상인들이 구매하기 전에 북쪽의 본토로 보냈습니다. 육상 수송에 비해 해상 수송의 비용 절감 효과가 한층 컸음에도 불구하고, 유라시아 경제의 통합으로 인해 전체적인 비용이 오히려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국제적 통합으로 인한 비용 감소의 증거는 유럽과 중국에서 판매되는 비단의 가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 팔린 중국산 비단 가격은 중국에서 구매한 가격의 3배에 불과했습니다. 육상 교통로의 안정으로 인한 ‘팍스 몽골리카’ 기간 동안의 직접 교역이 증가함에 따라 이슬람은 중계무역으로 보던 이득을 상실하게 됩니다. 유럽-인도간의 교역에서도 이같은 추세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몽골인이 유라시아를 점령하기 전 향신료와 기타 인도의 상품들은 바스라를 통해서 들어와 바그다드, 안티오크를 거쳐 지중해 연안으로 운반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몽골 지배 후에는 타브리즈가 일칸국의 수도가 되면서 국제교역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됩니다. 13세기 후반을 지나면 바그다드와 바스라는 지중해로 가는 주요 관문으로서의 중요성을 잃게 됩니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으로 향했던 1291년의 상황을 보면 유럽 인들이 이용하는 주된 경로는 육상으로 일칸국의 수도 타브리즈에 가서 페르시아 해안을 따라서 제국의 앞바다에 위치한 호르무즈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처럼 ‘팍스 몽골리카’는 유럽인들에게 이슬람을 거치지 않고서도 동쪽 지역과 교류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심어주었습니다. 육로에서 경쟁자인 베네치아인들에게 막힌 제노바인들이 13세기 말 아프리카를 우회하는 항로를 고려했는데, 이는 1291년 비발디 형제의 실패한 항해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200년 후 또 다른 제노바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비슷한 시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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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를 거치지 않고 호르무즈, 타브리즈를 통해 지중해로 들어가거나 초원길에 위치한 사라이를 거쳐 유럽으로 상품이 운반됩니다.


몽골이 이뤄낸 유라시아 중앙부의 통일은 구대륙에 존재하던 모든 문명이 통일된 체계 안에서 상호 작용하는 요소로서 서로를 인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전에도 문명들은 다른 문명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각기 고립된 주체가 소유한 인식이었습니다. 세계화가 언제 시작되었을까? 에 대한 답은 어떤 개념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지만 문명들을 통일된 체계 안으로 묶었다는 점에서 ‘팍스 몽골리카’는 질문에 대한 한 가지 유력한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흑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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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사병을 나타낸 그림(베르세르크)


한편, 활성화된 교역과 교류는 새로운 질병의 창궐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흑사병이 전해진 것이 이 시기입니다. 흑사병은 1347년 흑해의 무역항 파카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1347년 킵차크 한국의 자니베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카파를 수비하고 있는 제노바의 군대와 맞붙게 됩니다. 이때 몽골군 진영에서 역병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역병이 바로 흑사병이었습니다. 몽골군은 흑사병으로 인해 철군하게 되는데 이때, 자니메크 칸은 군을 물리기 전에 시신을 투석기에 얹어 성내로 던져 넣습니다. 그리고 이 시신으로부터 제노바 진영으로 전염이 이루어집니다. 성내에 역병이 돌기 시작하자 이탈리아 상인들은 배를 타고 서쪽으로 달아납니다. 1348년 1월에 카파에서 탈출한 배들이 이탈리아 서쪽의 다른 항구들로 들어옵니다. 이 배 안의 사람들이 상륙하면서 이탈리아 및 지중해 연안에 흑사병의 본격적인 전파가 시작됩니다. 이 역병은 불과 4-5년 만에 유럽을 지나 러시아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흑사병으로 유럽 전체 인구의 30%가량이 사망했습니다. 흑사병은 검은쥐와 같은 설치류에 서식하는 벼룩으로부터 인간에게로 감염됩니다.(19세기 말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라는 박테리아에 의해 감염되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현대의 의사학 연구자들은 원래 흑사병이 버마와 중국 윈난 국경 지역의 토착질병이었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원래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적 장벽에 의해 다른 지역으로부터 어느 정도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몽골제국의 확장 과정에서 몽골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오게 되고, 몽골인들과 그들이 타고 온 말들에 의해 페스트 균에 전염된 벼룩들이 중국 내지로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유라시아 동서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사람, 가축,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짐에 따라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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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으로 퍼져나가는 흑사병


흑사병은 유럽 이 외의 지역에도 큰 피해를 입힙니다. 마이클 돌스는 1347년에서 1350년 사이에 카이로 인구, 약 50만 명 중에서 약 20만 명이 흑사병으로 인해 죽었다고 추정합니다. 윌리엄 맥닐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에서도 1330년대 초에 허베이 지역에서 대규모로 흑사병이 퍼져 허베이 성 인구의 10분의 9가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었으며, 다시 1353-1354년에 허베이는 물론 푸젠, 산둥 지역에서도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2,00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중국에서 확산되는 흑사병으로 인해 유라시아 육상 교역로가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1330년대 말과 1340년대 초에 이미 이탈리아의 금융업계에서 큰 파산 사건들과 같은 경제 수축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유럽에 흑사병이 처음 나타난 시기는 1347년입니다.) 몽골 제국 내의 유럽 상인들과 선교사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기록들도 1330년대 말이면 줄어들기 시작하고, 14세기 중엽에는 거의 없어집니다. 기록상 중국에 간 마지막 이탈리아인 마리뇰리는 내륙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1345년 귀국길에 올랐을 때 더 먼 해양 노선을 택해야 했습니다.(조류독감을 막아낸(?) 마늘과 김치의 힘이었는지, 이 시기 고려에서는 페스트라고 추정할만한 역병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원 제국 말기에 창궐한 전염병은 제국의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켰고, 결국 중앙 정부의 권력 투쟁과 맞물리면서 제국의 쇠퇴로 이어지게 됩니다. 1351년에 대규모 치수 사업을 위해 동원된 농민 세력이 일으킨 홍건적의 난은 제국에 최후의 일격을 가합니다. 1335년 일한국의 붕괴, 중앙아시아에서 몽골 국가들 사이의 내부갈등과 1368년 원 제국의 멸망이 맞물린 결과로 ‘팍스 몽골리카’는 결국 종언을 맞게 됩니다.




3. 흑사병 이후의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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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 이후 총생산은 감소하지만 1인당 실질 소득과 부는 증가합니다.


흑사병 이후 인구가 부족해진 유럽에서는 임금이 크게 상승합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영주들은 임금 상승을 제한하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통제를 강화합니다. 1351년에 공표된 영국의 노동자 조례의 주된 내용은 임금을 통제하고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뿐만이 아니라 서유럽의 다른 국가에서도 이런 일들이 나타납니다. 그에 따른 반발로 농민층의 봉기도 빈번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희소한 노동력의 확보가 절실한 영주들 간에 맺어진 노동 답합 정책이 장기적으로 지속되지 못하면서 결국 농민들은 자유민의 지위와 보유지에 대한 자유처분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한편 이 시기에 길드의 폐쇄적 구조와 독점적 운영으로 도시 경제는 활력을 상실해 갑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농촌의 경우 영주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오히려 경제 활동이 자유롭게 이뤄질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농촌에서는 독립 자영농이 성장하고, 일부 농민은 보조적인 소득원으로 공업 생산 활동에도 뛰어들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흐름들은 공업이 도시라는 범위를 벗어나 농촌 지역으로 확산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줍니다. 이에 따라 도시의 직인과 소장인들이 대규모로 도시를 떠나는 농촌 대이주가 발생합니다. 스테판 엡스타인은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 “교섭력이 토지와 노동 사이에서 너무도 급격히 이동함에 따라 14세기 전염병은 상대적으로 매끄러운 진화 과정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물결로 전환했다. 야망 있는 통치자들은 부농 엘리트의 지지를 받아 영토 내 시장을 더욱 경쟁적으로 만들고, 상업화를 촉진함으로써 장기적인 16세기 호황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흑사병 이후 임금의 상승은 유럽의 생활수준 향상으로 이어지고 이는 인구회복, 나아가 산출 수준 향상으로 이어집니다. 1363년 피렌체의 마테오 빌라니는 “간호사와 보조 수공업자는 일반적인 임금의 거의 3배를 원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풍요와 사치에 물들어 더 이상 늘 하던 상거래에 종사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장 귀하고 맛 좋은 음식을 원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이미 고인이 된 유명한 이가 만든 가장 예쁘고 값비싼 옷을 차려 입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 신항로의 개척

흑사병 이후 인구가 회복세를 보이고 15세기에는 사망률의 감소 추세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실질 소득이 높아진 가운데 출생률도 상승합니다. 이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였고, 경제 활동의 대외적 확장에 대한 욕구도 증대됩니다. 특히, 이전시기 경험해봤던 장거리 무역망을 확보하고 교역량을 증가시키고자 하는 요구가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흑사병 이후 15세기를 거치는 동안 후추와 같은 아시아 향신료의 상대가격(농산물 가격에 대한)의 지속적인 상승도 교역로의 확보를 위한 요구에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무역망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게 됩니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인해 아시아로부터 들어오는 향신료와 직물 등 수입품의 가격이 폭등할 것이라는 우려가 유럽 전역에 퍼졌기 때문입니다. 이와 맞물려 장거리 항해에 필요한 기술들도 진보합니다. 먼저 노와 보조 돛대를 이용하는 갤리선이 점차 돛대를 장착하고 선미에 방향키를 단 캐럭으로 대체됩니다. 그리고 이슬람에서 들어온 나침반이 개량되었고, 지도 제작 기술도 발달하게 됩니다. 무기의 발전으로 선박에 대포를 장착하게 됨으로써 전투 능력도 향상되었습니다. (이쯤되면 이미 아재들의 머릿속에서는 게임 '대항해 시대2' 에 실린 칸노 요코의 음악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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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만 봐도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이런 기술의 발전 속에서 특히 포르투갈인은 항해술의 모든 면에서 주도권을 장악합니다. 해양왕으로 불리는 엔리케 왕자는 15세기 유럽인이 지리적 지식과 발견에서 커다란 진전을 이룩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포르투갈 남단에 있는 사그레스 곶에 위치한 그의 성에 선진적인 연구소를 설립하여 천문학자, 지리학자, 지도제작자를 그곳에 데리고 왔으며 1418년부터 그가 사망할 때까지 거의 매년 탐험대를 파견하였습니다. 이런 과학적 탐험활동은 그 이후의 지리적 발견을 위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엔리케 사망 후 위축되었던 탐험 활동은 1481년에 왕위에 오른 주앙 2세에 의해 재개됩니다. 그는 다시 탐험 활동을 후원했고 그의 항해사들은 불과 몇 년 만에 아프리카의 남단까지 진출하였습니다. 1487년에 디아스는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여 1488년에는 희망봉을 돌았습니다. 이 항로는 그 다음의 위대한 항해, 아프리카에서 인도의 캘커타에 이르는 1497년부터 1499년까지의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로부터 10여 년 후에 포르투갈인은 인도양에서 아랍인을 축출했고, 모잠비크와 페르시아 만에서 향료 제도라고 불리는 몰루카 제도에 이르기까지 견고한 무역기지를 건설하였습니다. 16세기 중엽에는 일본까지 진출하여 무역 및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한편, 1492년에는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으로 스페인에서 출항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게 됩니다. 1519년에는 포르투갈의 마젤란이 스페인 왕을 설득하여 태평양을 경유하여 향료 제도를 탐험합니다. 이 과정에서 수개월에 걸친 기아와 질병으로 그와 그의 선원들 대부분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마젤란의 경우 1521년 필리핀에서 사망합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의 원주민들이 순순히 노예가 된 반면 마젤란에게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에 도착한 마젤란은 원주민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려했고 그에 반발한 원주민들에 의해서 사망하게 됩니다.  결국 탐험대의 생존자들은 인도양을 거쳐 3년 만에 스페인으로 귀향했는데, 이들은 세계를 완전히 일주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마젤란은 지구를 일주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는 파나마를 거쳐 며칠 동안만 항해를 하면 아시아를 발견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평양을 경유하여 몰루카 제도로 가기 위해서는 남아메리카를 우회하여야 했고, 수개월의 항해 끝에 그를 포함한 대부분의 선원들이 사망하게 된 것이지요. 목숨 값이라고 해야 할지 남아메리카를 우회하기 위해 발견한 좁은 해협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딴 ‘마젤란 해협’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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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



5. 바다를 포기한 중국

1405년에서 1433년에 이르기까지 영락제의 명에 의해 정화는 총 일곱차례에 걸쳐 대규모 대양 원정을 실시합니다. 명나라 초기에 중국의 조공 체제를 확고히 하고 외부 국가들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함대는 60여 척의 대형 함선을 포함해 총 300여 척의 선박과 2만여 명의 승무원으로 구성되어있었습니다. 이는 1588년 당시 유럽 최대 규모였던 스페인의 무적함대의 구성을 크게 웃도는 수치입니다. 또한 선박 건조에 사용된 기술로 보아도 당대의 유럽을 압도합니다. 그러나 1433년을 끝으로 대양 항해는 막을 내립니다. 중국이 이렇듯 해금 정책으로 전환하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베이징에 권력 기반을 둔 관료집단이 해안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상인 및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환관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유교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며 해금 정책을 펼친 것으로 보입니다. 두번째로 재정적 어려움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명은 몽골의 잔당과의 무력 충돌이 지속되면서 군비 지출 부담이 가중되었으며, 농민들의 반란도 잦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항 항해를 지속하는 것이 힘들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셋째로는 당시 중국의 해안에 출몰했던 왜구가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빈번한 왜구의 침입으로 단기적으로 교역로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비용보다 해안을 봉쇄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었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중국은 내향적 사회 체제와 농업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경제 구조로 전환하게 됩니다. 이 선택에 따라 향후 신대륙 개척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에서 중국과 유럽의 운명이 엇갈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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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의 스케일







Ⅱ. 무역과 질병의 세계화


신 항로의 개척과 유럽 인의 진출을 통해 세계는 단일 경제권으로 재편됩니다. 이 시기 인구 및 작물의 국제적 이동이 지닌 역사적 의의는 단순히 이주와 교역의 지리적 범위가 확산되었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전 세계가 생산의 특화를 본격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하면서 한 지역의 생산 활동이 다른 지역의 수요 조건 변화나 기술 변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현상이 전 세계적 차원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지리적 범위가 전 지구적으로 넓어졌다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적 분업 체제를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생산의 특화는 무역의 발달과 동시에 진행됩니다. 특히, 이시기에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잇는 삼각 무역 체제가 성립된 것은 세계 무역 역사의 중대한 변화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의 상인들은 총기류나 술, 금속 제품 등을 서아프리카로 가지고 가서, 인근 부족을 공격해서 노예로 삼는 아프리카 부족들로부터 이런 노예들을 사들였고, 이렇게 구매한 노예들을 서인도제도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송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노예를 판매하여 얻은 대금으로 면화, 설탕, 담배 등을 구매하여 최종적으로 유럽 시장에서 판매했던 것이지요. 교역이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 그에 따라 전염병이라는 달갑지 않은 부산물을 낳게 됩니다. 인간의 이동은 곧 병원균의 이동을 의미했고 이것은 새로운 전염병의 확산을 초래했습니다. 이런 전염병들은 이전에 고립되어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면서, 무역과는 다른 형태로 세계사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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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각무역


1. 신대륙에 퍼진 전염병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래 많은 사람들이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옵니다. 이 것은 신대륙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에게는 치명적인 병균들을 보유한 숙주들이 대규모로 몰려오는 것과 같았습니다. 유럽 선박들의 빈번한 출입으로 각종 구대륙의 전염병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휩쓸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많은 병은 동물에게서 전해진 것들, 즉 인수공통전염병이었습니다. 천연두, 결핵은 소, 홍역은 개, 독감은 돼지와 닭에게서 옮아온 것입니다. 유라시아에서는 가축과의 공통 생활에서 개와는 65종, 소와는 55종, 양과는 46종, 돼지와는 42종의 질병을 공유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이런 가축들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역사적으로 이런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을 기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여러 전염병 가운데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것은 천연두입니다. 천연두가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1518년부터 입니다. 이 병은 콜럼버스가 최초의 거주지를 만들었던 이스파뇰라 섬의 아라와크 인디언의 절반 내지 3분의 1을 죽였고 푸에르토리코와 쿠바로도 번졌습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본토는 이보다 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1521년 코르테스가 300명의 에스파냐 병사들과 아스텍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석 달 뒤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되었고 몬테수마와 그 후계자를 비롯한 주민의 절반이 죽었습니다. 코르테스는 “인디언들의 시체를 밟지 않고는 발도 디딜 수 없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유럽 인들이 아스텍 제국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도시 내에 병원균이 들이닥친 상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코르테스의 공격이 아니라 천연두로 인해 사망하게 됩니다. 천연두가 지나가고 난 뒤 1529년에는 홍역이 유행하게 됩니다. 쿠바의 경우 천연두로 살아남은 원주민의 3분의 2가 홍역으로 사망합니다. 그 뒤를 이어 볼거리,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인플루엔자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1568년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도착한 지 50여 년쯤이 지나자 멕시코의 인구는 약 300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줄어듭니다. 1553년에서 1791년 사이에 잉카의 인구는 800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만일 콜럼버스 이전 신대륙의 인구가 1억 명이라고 추산한다면 질병으로 인해서 90% 이상의 인구가 사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럽 인들의 도착 이후 선주민의 인구가 크게 감소하는 현상은 북아메리카 쪽에서 더욱 극적으로 일어납니다. 1500년에 500만 명으로 추산되던 인구가 1800년에 이르면 6만 명으로 감소합니다. 이런 전염병은 유럽 인들의 지배권 확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우선 인디언 지도층 인사들의 상당수가 질병으로 사망함으로써 유럽 인들의 군사적 침략에 저항하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또 질병은 유럽인을 제외한 인디언들에게만 피해를 입혔기에 심리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당시 메사추세츠 만 정착지의 초대 지사 존 윈스럽이 남긴 기록을 보면 “신이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땅을 청소해 주셨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질병은 유럽인에게 우월감을 심어주고 반대로 인디언들은 이로 인해 열패감에 빠지게 됩니다.  


2. 노예무역과 전염병

1) 노예무역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에도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무역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이 번성했던 이유는 기타의 지역에서는 대개 지배층이 토지 소유권을 가지는 것과 다르게 아프리카의 지배층에게는 사람의 소유가 우선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토지의 사적 소유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사회에서 지도층은 한 지역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문명권의 지배층이 지주였던 것과 다르게 아프리카의 지배층은 노예주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타 문명권이 영토 정복을 위한 전쟁을 활발히 벌인 반면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를 획득하기 위한 전쟁이 빈번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존재하는 노예의 처우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노예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유럽인들이 “이름만 노예”라는 기록을 남겼듯이 대우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의 지배층에게 노예는 투자 대상인 동시에 세력을 증대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처럼 소모적인 방식으로 노예를 혹사시키지 않은 것이지요. 인도나 페르시아로 팔려나간 노예들 역시 주로 가내에서 하인과 같은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플랜테이션 농장의 흑인 노예들보다는 더 나은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편, 근대 대서양 노예무역은 1441년 포르투갈이 모리타니아 해안에서 10여 명의 주민을 잡아가면서 시작됩니다. 노예무역의 가능성이 확인되자 3년 뒤에 300명의 아프리카 인들이 리스본을 끌려가게 됩니다. 1482년이 되면 포르투갈은 상호르헤델미나에 상업기지를 건설하고 본격적으로 노예무역을 실시합니다. 19세기에 노예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아프리카 해안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 사람은 1,10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반면에 아메리카 대륙과 기타지역에 도착한 사람의 수는 약 900만 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약 200만 명이 이동 중에 사망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내륙 지역의 노예를 끌고 해안 지역으로 오는 과정이었습니다. 영양실조, 질병 등의 고통과 매일 40여 km를 걸어서 이동하는 강행군 속에 해안까지 살아온 노예는 전체의 60%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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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를 수송하는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전염병 등으로 인한 사망률이 높았습니다. 특정 항로의 경우 사망률이 30%를 넘는 곳도 있었습니다.  


유럽 인들은 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 사회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아메리카 지역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은 질병과 가혹한 처우때문에 급격히 숫자가 줄어든 상태였고 흑인 노예들에 비해 포획하고 길들이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실제로 유럽인 거주지역에서 인디오 노예들의 반란이나 도주가 잦았습니다. 그렇다고 백인 노예(단기간 계약제 노예)를 쓰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그 대안으로 아프리카의 흑인노예들이 신대륙으로 보내지게 됩니다. 이 시기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아메리카 대륙에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앙프리카 인들이 들어왔습니다. 이런 흑인노예들은 남미의 플랜테이션 농장, 광산 뿐만 아니라 영국령 북아메리카에서도 19세기까지 광범위하게 존재하였습니다. 



2) 전염병

대륙을 넘나드는 노예무역이 성행하면서 그에 따라 아프리카의 풍토병이 타 지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질병으로 황열병과 말라리아가 있습니다. 두 병은 모두 모기에 의해 옮겨진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황열병 바이러스는 열대숲모기라 불리는 종에 의해 옮겨지는데 병 자체가 급성 감염증인지라 사람을 숙주로 해서 타 지역으로 퍼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추측건데 모기가 배를 타고 타 지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황열병이 풍토병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병에 면역력을 가졌지만, 백인들은 상대적으로 이 병에 취약했습니다. 대양을 항해하던 배에서 이병이 유행하는 바람에 배에 탔던 사람들 전원이 병사하는 일도 종종 있을 만큼 당시에는 대책이 없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이 신대륙으로 건너가면서 한때 뉴욕과 보스턴을 마비시킬 정도였습니다. 황열병은 유럽에도 피해를 입히는데, 당시 스페인의 항구도시 말라가의 경우 전 도시인구의 3분의 1이 이 병에 감염되었습니다. 또 다른 질병인 말라리아도 학질모기라는 모기에 의해서 감염되는 질병입니다. 이 모기는 깨끗한 물에서만 부화하기 때문에 모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병에 걸린 환자에 의해서 질병이 퍼져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대항을 건너는 배들의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학질모기가 번식할 정도의 깨끗한 환경이 갖춰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어쨌든 말라리아 역시 신대륙으로 건너와 라틴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갑니다.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들은 어릴 때부터 원충에 노출되어 생긴 겸상적혈구 형질 덕분에 말라리아에 강했지만 백인들은 그렇지 못했기에 피해가 상대적으로 더 컸습니다. 이런 질병들의 위험성은 사람들이 새로운 병에 대한 면역체계를 발전시키고 인구 밀집성 질병을 풍토병으로 유지시킬 수 있을 만큼 도시 인구가 성장한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감소하게 됩니다. 홍역, 결핵과 같은 전염병이 발발하는 상황은 뒤늦게 발견된 폴리네시아, 하와이 등의 오지에서 재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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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해 중인 배에 황열병 환자가 있으면 그 표시를 하기 위해 노란색 깃발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이 병은 '노란 깃발(yellow jack)'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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