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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1/21 19:18:20
Name   necessary evil
Subject   거시적 시각이란 무엇인가
불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연기설이라고 하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모든 존재와 사건은 상호의존적이며 그것이 생겨날 원인(因)과 조건(緣)하에서 구성된다는 이 원리는 거시적 시각 바로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걸 깨우친 사람과 아닌 사람이 보는 세계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니체 가라사대, "예를 들어 창녀 제도는 왜 그렇게 해로우며 은밀하며 불안하게 유지되는가? 이는 그 자체에 깃들인 악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 때문이다."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거시적 시각을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 늘 감탄한답니다. 성매매가 근절해야만 하는 절대악이냐, 아니면 개인의 선택일 뿐이고 금지할 근거가 없는 역사적이고 자연적인 행위이냐 하는 지루한 양자택일적인 논쟁은 이 한 마디로 모두 해결이 되죠.
성매도자가 제공 서비스에 대한 주도권을 갖고, 독립적으로 운영하거나 이해 관계에 과도히 얽혀 있지 않으며, 빈도와 상관없이 성매매 행위로 인한 사회문화적 여파가 크지 않을 경우 그것이 개인의 도덕적인 문제일지언정 젠더혐오적인 사회악이라는 주장은 힘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 성매매의 양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죠. 매도자 측이 설정한 선이 없지는 않으나 그보다는 매수자 측의 요구에 따라 소위 '수위'와 '애인모드'를 강요받고, 옛날같진 않더라도 치안 기관과의 유착이나 조직폭력배의 개입이 없다 말할 수 없으며, 집단화된 매수자들이 성매매나 그 파생문화를 주변에 퍼뜨린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성매매에 대한 단순 찬반은 미시적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시적 시각의 문제점은 사안의 총체적인 면을 살피지 못하기 때문에 아전인수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죠.
회사 유부 부장들이 여직원들을 1차에서 보내고 밤새 룸빵에서 놀았던 문화가 분명 있었습니다. 지금도 공공연하게는 아니겠지만 절대 완전히 없어졌다고는 말 못하죠. 성매매가 근원적으로 규제할 수 없는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입장만을 고수한다면 이러한 배제의 문화를 사실상 옹호하는 것에 가깝죠. 반대로 외모적 매력도 재력도 화술도 이성과의 접촉 경험도 없는 모태솔로가 유흥의 길을 남몰래 선택하는 것이, 비록 개인적으로 이 사람을 불호할 수 있을지언정, 앞서의 조직문화와 동일 선상에서 젠더 혐오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고요. 이 문제를 좀 더 밀고 나가면 자위조차 불가능한 장애인들에 대한 섹스 볼런티어 딜레마에도 닿게 됩니다.
이상의 논의로 인해 내리게 되는 거시적 결론은 성매매라는 일련의 현상에는 특정인들이 말하듯 악한 부분이 분명 존재하나, 그것은 성매매 자체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니체가 말한) 부정적인 견해, 그리고 그것이 왜 발생했는지를 직시하는 데서 출발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간결하게 말해 한국의 여성층이 성매매에 대해 대개 도덕적 관점을 법적 영역에 강력하게 결부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여성 대중 스스로가, 여성 일반과 성매매를 분리해서 보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죠. 자의ㅡ오늘날 성매매 여성의 다수는 자발적이므로ㅡ에 의해서든, 타의ㅡ무시할 수 없는 수의 남성이 조직 내외의 여성을 잠재적 창녀로 대우하는 모습ㅡ에 의해서든요.

성매매 이야기는 한 예시였을 뿐, 중요한 건 이 견해의 옳고 그름을 떠나 미시론자들은 이렇게 심층을 파고들지 못하고, 그렇기에 항상 평행선을 달리는 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의 문제가 아니죠.

언젠가부터 진보주의자들의 트렌드는 노동과 경제를 논하는 쪽에서 여성, 사회적 소수자, 환경 문제 등으로 이동했죠. 이것 자체를 별로 문제 삼고 싶진 않습니다. 그들이 넷 상에서 유통되는 것처럼 상식 단위에서 반박이 가능한 찌질이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라벨링하는 사람들보다는 최소한 이런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지식의 평균량은 더 많을 거예요. 흥미로운 지점은 따로 있습니다. 항상 그들은 대한민국 사회는 이런 저런 부분에서 인식이 많이 뒤떨어져 있으며 그러니 이런 불만을 제기하는 것을 널리 퍼뜨려서 다같이 싸워야 하고... 등으로 요약되는 언더독적인 자세로 일관한다는 것이죠. 물론 세상의 기준을 그들 진보주의자들로 상정한다면 꼭 틀린 말도 아니지만, 현재 출판계를 위시한 각종 문화 분야는 사실상 비슷비슷한 입장만을 생산하는 거푸집이 되지 않았나요? 반페미니즘이나 반인권, 반환경주의적인 사상에게도 동등한 지위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진보주의적 입맛에 맞추지 않은 문화 매체는 자연스레 도태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거시적 시각을 지닌 입장에서는 (노동좌파주의와 대치되는 의미에서의) 진보좌파주의의 흥성은 진보좌파적인 세상을 만드는 원인이 아니라 이미 세상이 상당부분 진보좌파화 했기에 나타나는 결과로 보일 뿐입니다. 개고기 반대론자들이 논쟁에서 승리해서가 아니라 개고기 문화가 이런 저런 이유로 자연스레 사장되어갔기 때문에 개 식용 반대론자들이 우세한 세상이 왔다는 사실을 그들 반대론자만 모를테지요. 심지어 더 삐딱하게 보면 진보좌파주의의 지속을 위해ㅡ그들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지만ㅡ세상은 지나치게 진보좌파화되어선 안됩니다.

정치도 재미있는 주제죠. 박근혜-문재인-안철수 이 셋은 각자가 상극이지만 그러면서도 같은 궤적 하에 있는 인물들입니다. 그건 실질적인 경륜은 미진한 대신 뭔가 그럴 법한 이미지가 주된 가치라는 것 아닐까요? 물론 꼭 넓고 깊은 경륜이 정치인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고 막연한 기대감이 뒤따르지 않는 대중정치인도 없지만, 이들이 계속해서 보이는 행보 또한 그 이미지에 절대적으로 기대고 있다는 것이 그 특색이죠. 2011년 시점부터 안철수가 별볼일 없다는 걸 간파한 사람의 눈에 2016년 연말의 그 현상은 마냥 희망찬 것이 아니라 폐기처분난 일 두체를(라기엔 처음부터 반쪽이긴 했지만) 새로운 일 두체로 대체하자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갖게 했고, 특히 대선 토론회에서의 동성애 관련 논란이후론 더 볼 것도 없어졌죠.

자, 여기서 문재인도 결국 똑같다, 하고 끝내버리면 그건 흔한 미시적 시각입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질문은 이런 거죠. 민주당이냐 한국당이냐 하는 동어반복적인 양자택일이 아니라 왜 우리는 문국현 MK.2에 불과한 안철수라는 현상을 마주한 이후에도 조국과 황교안을 낳게 되었는가? 유구한 죽창과 화염병의 전통이 있던 이 나라는 어떻게 정치혐오가 만연하면서도 선거만능주의에 빠지게 되었는가? 정치는 주 관심사가 아니기에 이렇다 저렇다 해답을 아예 내릴 생각이 없지만 어떤가요, 질문이 바뀐것만으로 논의의 격 자체가 달라지지 않은가요? 물론 실제론 누가 이런식으로 이야기하는 걸 별로 본적도 없고 있더라도 회색이니 양비론이니 하며 공격받기 일쑤죠.

이쯤에서 아감벤 가라사대, "오늘날 서로 번갈아가며 권력을 경영하고 있는 우파와 좌파는 이 '우파'와 '좌파'라는 용어의 기원이 된 정치적 맥락과는 거의 상관없게 됐으며, 단순히 동일한 통치기계의 양극단을 가리키는 이름이 됐다(한쪽은 주저 없이 탈주체화로 향하며, 다른 한쪽은 훌륭한 민주주의적 시민이라는 위선적 가면으로 이 탈주체화를 뒤덮고 감추려든다)."

이데올로기의 전통이 깊은 서양의 철학자마저도 이런 진단을 내릴진대, 역사적 함의 외에는 정체성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두 거대 양당의 지지자들 간의 격론은 어떤 면에서 선도적 현상이기도 하겠네요. 실은 그보단 대학교 학생회가 점점 수준 낮아지는 현상을 따라가고 있다고 하고 싶지만요.

이러한 거시적 시각을 갖기 위해 지식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반시대적 고찰이죠. 역시 이에 대한 훌륭한 요약을 들어봅시다.

다시 아감벤 가라사대, "참으로 자신의 시대에 속하는 자, 참으로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와 완벽히 어울리지 않는 자, 자기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 자, 그래서 이런 뜻에서 비시대적인/비현실적인 자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까닭에, 바로 이 간극과 시대 착오 때문에 동시대인은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시대를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다. 이 불일치, 이 시간의 어긋남은 동시대인이 다른 시간에 사는 자, 즉 자신에게 살라고 주어진 도시나 시간보다 페리클레스의 아테네나 로베스피에르와 사드 후작의 파리를 더 편안하게 느끼는 향수에 젖은 자임을 자연스레 뜻하지 않는다. 똑똑한 인간은 자신의 시대를 증오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래도 자신이 자신의 시대에 돌이킬 수 없이 속하며, 자신의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미시론자들ㅡ즉 페미니스트/반신자유주의자/자한당 혐오자(혹은 이들의 쌍극) 등ㅡ이 높은 확률로 우물안 개구리가 되는 이유는 자신의 시대를 자신의 사상과 지나치게 밀접하게 결부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지닌 문제의식이 우리 시대가 마주한 최악의 병폐이며 이것이 내가 눈을 뜨는 동안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는 식의 준엄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개인이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정답이 정해진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대개 우연의 흐름에 따른 것이죠. 라울 바네겜이 말하기를, '세상에 적응하는 것은 동전 던지기의 결과일 뿐이다' 아주 개인적인 실례를 들자면, 지난날 저는 이 게시판에 지극히 개인적인 울분을 담은 글을 게시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여러 회원분들에게 불쾌감을 안겼고 그 몰이해가 곧 삭게행으로 이어졌었죠. 그건 그렇다 치지만 왜 어떤 분은 대체 어떤 부분을 참지 못해 밑도 끝도 없이 '당신은 부정적이고 편협한 사람이다'라는 댓글을 달았던 걸까요? 정말 악의없이 말하는 바지만, 정말...싸가지 없는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발생했을까 하는 거죠. 단지 동전 던지기에 이겼다는 것이 그 정도로 대담한 프라이드를 갖게 해주는 걸까요? 정말 재미있어서, 꽤 기억에 남았답니다.
흠흠, 아무튼 반시대적 고찰이 가능한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진정한 병폐는 시대에 속한 무엇이 아니라, 이 시대 그 자체입니다. 현 시대의 모든 것을 혐오하는 반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오늘날 문제라 일컬어지는 모든 것을 꿰뚫는 원리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미시적 사고, 즉 한 가지 테마에 꽃혀서 개선점을 찾는 것도 물론 누군가는 해야할 일입니다. 결국 세상이 어떻게든 바뀌는 것은 그런 사람들 때문이니까요. 그러나 변하지 않는 우주적 원리는 우리 모두는 원인을 일으키는 주체적인 존재라기보다 무언가로 인해 발생한 결과적 존재로서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해야 한다'는 외침이 공허할 수 밖에 없는 이유죠. 혁명이 됐든 반동이 됐든 인간은 때가 되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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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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