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7/21 00:24:57
Name   아침커피
File #1   사진110102_003.jpg (265.4 KB), Download : 20
Link #1   https://crmn.tistory.com/78
Subject   천하장사 고양이


대학교 기숙사 주위에는 고양이가 많았다. 그 고양이들을 학교 학생들은 학교 이름을 따서 xx캣이라고 불렀다. 고양이들의 주식은 학생들이 먹고 남긴 배달 음식이었다.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은 종종 치킨, 피자, 족발, 두루치기 등의 다양한 음식을 시켜 먹곤 했다. 학생들이 하도 배달 음식을 많이 시켜먹으니 학교에서 아예 기숙사 건물 입구에 그릇 반납용 선반을 설치해 주었는데, 학생들이 그 곳에 배달 음식 그릇을 가져다 놓고 가면 고양이들이 슬금슬금 다가와서 잔반을 먹곤 했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겨울학기 수업은 듣는 학생이 적어서 학교가 휑했다. 학교가 있던 곳은 평소에 눈이 거의 안 오는 지역이었는데 그 날 따라 눈이 엄청나게 왔었다. 쌓인 눈을 밟으며 밤에 기숙사로 돌아가는데 기숙사 입구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학교 고양이들은 학생들을 보면 멀찌감치서부터 도망가곤 했는데 얘네들은 희한하게도 나를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 기숙사 입구에 다 가서 보니 고양이들이 비어있는 배달음식 퇴식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방학이라 학생들이 다 집에 가고 나니 잔반이 주식인 고양이들이 먹을 게 없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눈이 와서 추워서 그랬는지 그 고양이들은 눈이 쌓이지 않은 기숙사 처마 밑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못 먹어서 그랬는지 학기중과 비교하면 매우 홀쭉해진 모습이었다.

카드키를 찍고 기숙사로 들어가려는데 자꾸 고양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하며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발이 안 떨어졌다. 고민을 하다가 학교 매점에 가서 천하장사 소시지를 샀다. 매점까지 갔다 오는 데 시간이 꽤 걸렸는데도 고양이들은 기숙사 입구에 그대로 있었다. 천하장사를 까서 조금 잘라서 던져줬더니 허겁지겁 먹었다. 한 조각 또 던져줬더니 여전히 잘 먹었다. 이번에는 천하장사를 길게 까서 손에 잡고 내밀어 봤더니 가까이 와서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다. 원래는 고양이에게 천하장사를 하나만 주고 나머지는 내가 먹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더 줘야 했다. 두 개째가 지나고 세 개째가 되자 배가 불렀는지 잘 안 받아먹길래 나중에 먹으라고 남은 천하장사를 다 던져주고 방으로 올라갔다.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야생 고양이에게 음식을 줘 본 경험이다.

주인 없는 야생 고양이를 일컫는 표준어는 도둑고양이다. 애묘인들 중에는 도둑고양이 대신 길고양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도둑고양이라는 말이 싫지 않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고양이들은 귀여워서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가기 때문에 도둑고양이라고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 녀석들은 내가 먹으려던 천하장사까지 자기들이 다 먹어버렸으니 도둑이 맞다.

옛날 사진을 뒤져보니 그 때 찍은 사진이 아직 남아 있다. 흰 색 바탕에 검은 색 얼룩 무늬가 있던 고양이. 고양이들 평균 수명을 생각해보면 아마 지금은 이 세상에 없을 거다. 인터넷에 보면 고양이한테 잘 해 줬더니 고양이가 쥐나 벌레를 선물로 잡아왔다는 이야기도 많던데 저 고양이들은 내 천하장사를 다 먹어 놓고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입을 싹 닦아 버렸다. 그래도 이렇게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웃으며 옛날을 추억하게 해 줬으니 이 녀석들은 이미 나한테 천하장사보다 훨씬 큰 보답을 해 준 셈이다.



9
  • 감성...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906 일상/생각회전근개파열 수술까지 가게된 이야기.. 11 하드코어 20/08/31 4499 3
10897 일상/생각감사함이 가득한 식탁 72 오쇼 라즈니쉬 20/08/29 7121 17
10896 일상/생각역대 가장 불행한 세대 될수도 있는 88에서 93학번 63 집에가고파요 20/08/28 9906 1
10891 일상/생각술 먹고 쓰는 군대 문화에 대한 생각 40 hijk 20/08/27 5380 14
10888 일상/생각당뇨발 테스트한 뒤 친분있는 사람들은 현실 부정중 9 집에가고파요 20/08/27 5317 0
10883 일상/생각불효해도 만족합니다. 12 지옥길은친절만땅 20/08/26 4398 8
10880 일상/생각타임라인에서 공부한 의료파업에 대한 생각정리 40 거소 20/08/25 8767 77
10879 일상/생각집돌이 즐겜러의 요즘 6 겨울삼각형 20/08/24 3703 4
10872 일상/생각아 다음학기 비대면이라니 8 집에가고파요 20/08/21 4913 3
10870 일상/생각뉴스 안보고 1달 살아보기 결과 7 2020禁유튜브 20/08/18 5555 28
10857 일상/생각당근마켓 거래 후기 14 헌혈빌런 20/08/13 5781 1
10855 일상/생각풀 리모트가 내 주변에 끼친 영향 16 ikuk 20/08/12 5138 25
10850 일상/생각엄마와 나 1 머랭 20/08/10 5238 11
10844 일상/생각'문화적 전유' 개념을 반대하는 이유 3 치리아 20/08/08 5831 9
10841 일상/생각설거지 하면서 세탁기 돌려놓지 말자 22 아침커피 20/08/06 4906 39
10836 일상/생각FOMO, 비교에서 오는 문제 9 존보글 20/08/04 4616 28
10835 일상/생각꿈만으로도 행복한 게임 리뷰어의 길 8 Xayide 20/08/02 4631 22
10832 일상/생각올해는 완벽하게 망한 해외출장 3 집에가고파요 20/08/01 4837 1
10821 일상/생각2차를 앞두고 서둘러 남기는 생각;;;; 4 켈로그김 20/07/27 4221 9
10809 일상/생각의도치 않게 입은 혜택에 대해서도 갚아야할 도덕적 의무가 존재할까? 21 ar15Lover 20/07/23 5034 4
10798 일상/생각천하장사 고양이 아침커피 20/07/21 3338 9
10795 일상/생각Kimchi Warrior의 탄생 6 이그나티우스 20/07/19 3573 8
10793 일상/생각자기 객관화라는 덫 8 necessary evil 20/07/17 4181 18
10777 일상/생각한 가족의 고집, 그리고 나의 고집에 대한 고백 자몽에이드 20/07/14 4093 9
10768 일상/생각인국공을 보며. 시간을 변수로 삼지 못하는 인간. 5 sisyphus 20/07/11 4584 9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