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0/18 23:32:43
Name   nothing
Subject   시래기 순대국을 먹고 왔습니다.
각 지방별로 특이한, 그 지역 외에서는 맛보기 힘든 음식들이 있지요.
왠만큼 유명한 건 수도권으로 다 전파되서 서울에서는 팔도의 음식을 다 맛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각 지방 네이티브들 외에는 잘 모르는 음식들도 아직 있습니다.

충주같은 경우는 순대국이 그런 음식들 중 하나입니다.
그냥 순대국은 아니고 시래기 순대국입니다.
사실 충주에서 나고자란 분들에게 순대국이라고 하면 대부분 기본이 시래기 순대국을 떠올립니다.
다들 알고 계시는 뽀안 사골육수를 베이스로 한 순대국과는 많이 다릅니다.

스무살때 충주에서 벗어나 타지 생활을 하면서 가끔 한번씩 이 시래기 순대국이 생각이 납니다. 근데 서울에선 먹을 수가 없습니다.
제주도 고기국수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는 서울에서, 이 시래기 순대국만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뒤져봐도 아직 충주 외에는 이 시래기 순대국을 파는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양평에 시래기 순대국이라는 메뉴를 파는 곳이 있다고는 봤는데, 아직 먹어보진 못했지만 사진으로 봐서는 다른 맛의 음식 같더군요.

그치만 순대국 한그릇 먹자고 충주까지 운전을 하기는 어려우니 참아봅니다.
참고 참고 참다가 충주에 갈 일이 생기면 겸사겸사 한그릇씩 하거나, 포장을 해오는 편입니다.

어제 아버지 생일을 맞아 충주를 갈 일이 생겨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도 당연히 순대국집을 찾습니다.

이 순대국집은 사실 초행길이라면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미줄처럼 복잡한 재래시장의 꼬불꼬불한 길을 찾아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재래시장 안으로 들어서 잠깐 헤메다보면 사방 방위를 잃고 여기가 거기같고 거기가 여기같고 길을 잃기 쉽습니다. 사실 저도 오랜만에 가면 조금 헤메는 편입니다.
어찌어찌 순대국집을 찾아들어가 2개를 포장해달라고 주문합니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주변을 돌아봅니다.
낯익은 풍경을 계속 바라보고 있노라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 때가 그랬습니다.
아, 이 골목의 천장이 이렇게 낮았었구나, 의자가 이렇게 좁았었구나, 하는 잡생각들이 스칩니다.

주문한 음식 포장이 다 나와서 값을 지불하고 길을 나옵니다.
차에 올라타고 집으로 가려다 핸들을 돌려서 평소와 다른 길로 가봅니다.
차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 대신, 학창시절 도보로, 자전거로 자주 다니던 길을 택해 가봅니다.
천변의 이차선도로를 따라 빠져나와선 로터리에서 좌회전을 해 예성공원 방면의 길에 들어섭니다. 거기서 한참을 직진합니다.
운전을 하면서 참 신기했던 것이, 매 블럭블럭마다 기억과 추억이 서려있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아, 여기선 중학생 때 컵떡볶이를 먹다가 쏟았었지, 여기선 학원간다고 뻥치고 피씨방에서 저녁까지 틀어박혀있었지,
이 도서관에서는 군 전역하고 자격증 공부 한다고 들락날락했었지, 여기에 옛날에 있던 컴퓨터 학원을 다녔었지.
집으로 가는 15분 여의 짧은 길동안, 어린 날의 기억들과 수도 없이 악수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로새길 고향이 있다는 건 이럴때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기억이 다른 기억으로 덮어쓰여지지 않은 채로 오롯이 떠올릴 수 있는 공간들이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시래기 순대국이 유명해져서 수도권으로 진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아마 저는 충주에 오면 다시 순대국을 먹으러 오지 않을까 합니다.



11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1073 일상/생각시래기 순대국을 먹고 왔습니다. 15 nothing 20/10/18 5207 11
    12244 IT/컴퓨터변화무쌍한 웹 기술 역시 톺아보기 - 1 13 nothing 21/11/05 5472 7
    12524 일상/생각길 잃은 노인 분을 만났습니다. 3 nothing 22/02/18 4727 35
    12683 도서/문학영화와 소설 "뜨거운 피" 감상평 (노스포) 1 nothing 22/03/30 5320 2
    12701 일상/생각이직 여행기 5 nothing 22/04/07 5293 6
    12763 일상/생각나는 재택 근무에 반대합니다. 24 nothing 22/04/30 6103 23
    12770 일상/생각개인적인 이직 면접 꿀팁 6 nothing 22/05/03 5538 6
    12879 일상/생각손절의 시대 24 nothing 22/06/01 6543 49
    14032 일상/생각생애 첫 책의 원고 작성을 끝마쳤습니다. 12 nothing 23/07/11 3916 20
    13492 일상/생각다세대 주인집 할아머지의 손자에 대한 기억 3 nothing 23/01/19 3772 4
    14009 일상/생각비둘기야 미안하다 13 nothing 23/06/29 3749 7
    14346 일상/생각잊혀진 편의점 알바의 스킬 1 nothing 23/12/20 2818 4
    14455 일상/생각인사고과와 사회적 가면에 대한 생각 6 nothing 24/02/13 3372 8
    14705 일상/생각기계 번역의 성능 향상이 번역서 품질의 저하를 불러오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 4 nothing 24/05/27 2782 3
    14955 일상/생각군 인트라넷 내 "책마을"의 글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7 nothing 24/10/03 2198 1
    14957 일상/생각"책마을" 글들을 공유합니다. 5 nothing 24/10/04 2131 6
    15044 일상/생각부여성 사람들은 만나면 인사를 합니다. 6 nothing 24/11/14 2587 20
    15560 창작평행 세계에서의 인터넷 역사 5 nothing 25/06/29 1417 0
    9712 여행몽골 여행기 - 1부 : 여행 개요와 풍경, 별, 노을 (다소스압 + 데이터) 8 Noup 19/09/26 5809 10
    9729 여행몽골 여행기 2부 : 숙박(게르) / 음식 / 사막 6 Noup 19/09/28 5832 7
    9806 여행몽골여행기 3부 - 관광지, 울란바토르, 그외 (끝) 5 Noup 19/10/09 7432 6
    9980 요리/음식일본위스키 를 마셔보자! 7 Noup 19/11/12 7346 6
    10115 여행아이유 방콕콘서트 (12/24) 남덕식 후기 2 Noup 19/12/25 6437 6
    8230 사회생계형 범죄자를 위한 출퇴근 교도소를 맹근다고 합니다. 3 NoviPo 18/09/14 5958 0
    3291 IT/컴퓨터어느 게임 회사 이야기 (1) 23 NULLPointer 16/07/19 29313 2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