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3/03/19 22:19:32
Name   골든햄스
File #1   11zec4.jpg (39.5 KB), Download : 2
Subject   '합리적인' 신앙



안녕하세요. 신앙 이야기야말로 참 논란이 될 이야기인데,
우선 저는 그 어떤 반대도 찬성도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이 이야기는 논증보다는 신앙의 취사선택에 대한 일기에 가깝습니다.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

어릴 때, 전도를 하는 언니의 손을 잡고 교회로 끌려갔는데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시계를 보십시오. 이렇게 정교한 것이 그냥 만들어졌을 리가 있습니까? 우연히 만들어졌겠습니까, 아니면 시계공이 있겠습니까?"

그 순간 '눈 먼 시계공'이라는 책 제목이 머릿속에 아른아른 지나가며, 저는 속으로 '언제 나가지' 하고 출구를 흘끔거렸습니다. 저는 리처드 도킨스를 좋아하는 무신론자였고, 과학을 무척 좋아했으며 (지금도 그렇습니다), 합리성의 신봉자 (이건 지금 그렇지 않습니다) 였습니다.

그 후에도 몇 번 전도를 당했습니다. 기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정말 힘들 때, 진심 어린 도움을 주고 밥을 사주면서 한 번 교회 정도는 데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도 만나고 싶을 정도로 외로웠던 것도 있습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종교를 믿어야겠다고 느낀 것은, 앎에 대한 착각에 대한 글을 읽을 때였습니다.

뇌과학에 대한 책을 읽는데, 앎이란 사실 신체적 감각이란 글이 나왔습니다.
어떤 고명한 과학자가 너무도 뛰어난 과학자임에도 한편으로는 조현증적 망상을 확신을 갖고 믿고 있으며, 자신도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아님을 알아도 (지능이 높으므로) '이 안다는 감각'을 어찌할 수 없다고 서술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글을 보는데 왠지 모르게 앎이란 참으로 허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그 순간 종교에 대해서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종교란 이 현실과는 다른, 분리된, 자신들만의 '앎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서 기존의 감각을 대체하는 것일 것이라고요.
그렇지만 그것이 틀리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다 다른데.

그 뒤 또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엄청난 병을 앓게 됐습니다. 오진에 오진이 거듭됐고, (나중에는 바로잡았지만) 일부 병은 진단되지 않은 채 남았습니다. 섬유근육통일 수도 있다는 의견 정도였습니다. 마취과에서 주사를 맞으며, 정체 모를 20만 원 짜리 영양제라도 주문해보며, 끊임없이 유튜브나 인터넷에서 '나은 사람들'을 찾아봤습니다.

하나 같이 이야기하는 건 '신앙'이었습니다.
'신앙 덕에 나았다'

제가 제 병에 대해 추측하는 많은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부모의 학대, 그로부터 이어진 '낙오자'로 찍혀 당한 학교폭력, 그로부터 이어진 초기 애착 형성 실패와 사회성 학습 실패로 인한 고통스러운 사회생활, 가난, 문화적 탈락 현상 등등..

하지만 이에 대해서 분석하는 건 제 병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큰 절망만 주었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이야기하는' 데는 도움이 됐습니다. 가령 제 현상에 대하여 '배움의 발견' 같은 책을 인용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당장 제가 느끼는 무시무시하고 초현실적인 공포 앞에서, 저는 또다른 판타지적인 유니콘을 소환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그 유니콘을 함께 상상하고 다 함께 모여 매번 기도를 나누는 공동체가 있었죠. 그렇게 같이 유니콘을 보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유니콘이 있음과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루루피 루루팡 루루얍! 저는 유니콘 공동체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거의 안 갑니다.) 절, 성당, 교회, 이슬람사원, 그리스정교회, 심지어는 조로아스터 교(장례식 방식이 조장이라니 왠지 멋있어서)까지 다 염두에 둬봤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실은 아무 데나 갑니다.

그냥, 신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냥, 정의가 이뤄진다고 믿습니다.
그냥, 제 삶이 정의로웠다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현대사회, 과학과 이성의 시대를 사는 머리 한편으로는 '그런 건 말도 안 되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건 말도 안 된다 생각하고, ESG나 다른 노력을 통해 세상을 바꿔나가려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게 맞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제 지친 몸과 마음을 위해 기도할 때는 초현실적인 존재를 한번 불러내봅니다.
누군가 착한 사람들을 돌봐주고 악한 사람들을 벌한다 (카르마로든, 사후세계로든) 는 생각 자체가 그리 나쁘진 않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렇게 '합리적으로' 신앙을 취사선택해봅니다.

가끔 그래서 덕분에 사람들에게 더 관대해져서 좋은 기회가 생길 때도 있고,
헛된 기부를 할 때도 있고, 헛된 사람들에게 친절해질 때도 있고,
조금 비현실적이고 붕뜬 느낌을 사람들에게 주는 거 같을 때도 있습니다. ('너 교회다녀?!?!' '아니 그냥 아무 신이나..' 후략...)

그래도 놀라운 건 이겁니다.
몸이 낫는 데는 도움이 됐어요.
추천합니다.





16
  • 좋은글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648 일상/생각'합리적인' 신앙 8 골든햄스 23/03/19 2139 16
13915 일상/생각마지막 락스타. 19 Iowa 23/05/26 2139 1
14265 스포츠JTBC서울국제마라톤 후기 10 영원한초보 23/11/09 2142 20
14105 경제민간 기업의 평생 금융 서비스는 가능할까 11 구밀복검 23/08/15 2144 6
13980 정치스탈린 방식의 '힘의 논리'는 어디까지 통할까요? 10 컴퓨터청년 23/06/13 2146 0
13018 스포츠[MLB] 댈러스 카이클 DFA 4 김치찌개 22/07/24 2147 0
14075 게임화성남자 금성여자 in 스타교육 - 2 - 5 알료사 23/07/30 2147 12
14154 일상/생각아내는 아직 아이의 이가 몇 개인 지 모른다 2 하마소 23/09/25 2148 21
13972 일상/생각집앞에서 마약 본 썰 7 당근매니아 23/06/09 2149 1
13395 오프모임[마감] 오늘 저녁 7시 서울 공릉역 "비어-도슨트와 맥주잡담" 14 비어-도슨트 22/12/14 2150 3
13703 도서/문학4월의 책 독서모임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6 풀잎 23/04/02 2151 1
13810 오프모임[오프 모임 재공지] 5월 6일 토요일 15시 신촌 노래방 19 트린 23/05/02 2151 1
14245 스포츠달리기를 해보자 #1 - 기초 20 영원한초보 23/11/02 2152 21
13840 일상/생각순수하게 응원해 본 대상 24 Klopp 23/05/12 2152 8
14165 일상/생각살아남기 위해 살아남는 자들과 솎아내기의 딜레마 12 골든햄스 23/10/01 2154 19
12839 게임[LOL] 5월 22일 일요일 오늘의 일정 1 발그레 아이네꼬 22/05/19 2155 0
14001 일상/생각저는 사이시옷 '법칙'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14 별길 23/06/25 2155 10
13097 IT/컴퓨터예전에 일기첫마디를 쓰던걸 마저 쓰라고 돌렸는데 ㅎㅎㅎ 3 큐리스 22/08/19 2158 0
13200 영화(약스포) 공조2 : 전작보단 훨씬 나아진 영화 2 A7658 22/10/03 2158 0
13974 일상/생각앞으로 100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이 세상은 천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8 컴퓨터청년 23/06/09 2161 0
14009 일상/생각비둘기야 미안하다 13 nothing 23/06/29 2163 7
14018 일상/생각쏘렌토 하이브리드 출고의 여정 18 danielbard 23/07/04 2163 4
13568 IT/컴퓨터ChatGPT 에게 만년필을 묻다 10 SCV 23/02/15 2164 4
14137 게임[PC](이미지 다수) 60시간 뉴비의 아머드코어6 3회차 후기 및 사용한 어셈블리와 팁 2 kaestro 23/09/10 2165 2
13492 일상/생각다세대 주인집 할아머지의 손자에 대한 기억 3 nothing 23/01/19 2167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