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11/01 17:09:58
Name   F.Nietzsche
Subject   어린 시절의 책상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2평 남짓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피아노가 놓여져 있었고, 피아노 위에는 동물 인형이 줄줄이 놓여져 있었다.
가장 오른쪽에는 못난이 삼자매 인형이 놓여 있었다.
피아노의 왼쪽으로는 좁은 책장이 하나 서있었는데, 누구도 꺼내보지 않을 법한 오래된 책들과 함께
커피에 사용할 갈색 고체 설탕병이 하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를 들어간지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무서움을 극복하고 작은 방에서 혼자 자기 시작했다.
그 시절은 내가 인형들과 대화를 할 수 있던 시기였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 나오는 것처럼 밤은 물건들의 시간이었다.
너무 때가 타버려 나의 허락도 없이 버려진 나의 가장 친한 친구 흰 곰은 사라지고,
그보다 훨씬 작아 안을 수도 없는 호랑이 인형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로 낙점되었다.
그 작은 방에 책상을 놓던 날이 기억난다.
보르네오 가구에서 책상을 주문했다.
보르네오섬은 지구본을 빙글빙글 돌리다 보면 곰이 침대 위에 누워있는 듯한 모양에 눈길이 자주 가던 곳이었다.
어른이 되고 싶어하던 수많은 느린 시간 속에서도, 책상을 받기 하루 전의 밤은 유난히 더 느리게 흘러갔다.
잠이 들었다가도 설레는 마음에 다시 뒤척였다.
드르륵 소리가 나며 열리는 미닫이 문의 창호지 너머로 어스름한 빛이 있고, 그림자도 있었다.
무슨 그림자인지 알 수 없는 그 형체가 마치 책상처럼 보였다.
새벽에 이미 책상이 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책상이 왔다.
교실 환경 미화에 종종 사용하는 녹색 융을 책상 위에 깔고, 그 위에는 두툼한 유리를 깔았다.
칼로 뭔가를 자를 때를 생각한 것이니,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책상에 앉아 보았더니 기분이 썩 좋았다.
버스 기사의 운전석을 부러워 하던 어린 나에게, 자신만의 공간은 버스 운전석,
그것을 넘어선 비행기 조종사의 공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책상에 앉으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숙제도 열심히 하고, 항상 뒤늦게 적다가 일주일 전의 날씨를 기억하지 못했던 일기도 매일매일 적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상 서랍에는 열쇠가 있었다.
흔히 보던 납작한 열쇠가 아닌, 동그란 열쇠의 12시 방향에 하나 튀어나온 것이 있는 열쇠였다.
딱히 숨길 것도 없지만, 괜히 한 번 열쇠를 이리저리 돌려 잠궜다 열었다 해본다.
요즘은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냥 사고,
필요에 의해 산 것이니 그냥 사용한다.
사기 전의 설레임이나 사고 난 후의 애착이 없다.
괜히 사소한 것에 설레던 어린 시절 느낌이 떠올랐다.
설레지 않는 지금에 내가 설렜었다는 사실만 추억한다.
작은 것에 대한 수많은 간절함과 설레임은 어린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117 IT/컴퓨터Zen 2 아키텍쳐를 기다리며 21 Erzenico 18/08/26 5741 0
    7404 오프모임[완료]4/19(목) 점심~오후 고정 주제없는 수다모임 가지실 분? 55 Erzenico 18/04/18 4260 7
    7517 일상/생각사무환경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무엇일까? 47 Erzenico 18/05/13 4666 1
    7676 요리/음식[Cafe Carioca - 1] 나는 어쩌다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가? 22 Erzenico 18/06/13 4925 7
    7705 요리/음식[Cafe Carioca - 2] Begining of pour over days 11 Erzenico 18/06/17 4966 1
    7908 오프모임 (펑) 잠시 후 2시에 냉면 드실 분 없으실까요? 12 Erzenico 18/07/22 5426 6
    8353 일상/생각행복을 생각하다 - 동아리에서 행복 포럼 개최했던 이야기 2 Erzenico 18/10/11 5082 0
    10718 요리/음식[Cafe Carioca - 3] Tea For Two 12 Erzenico 20/06/27 4671 1
    12459 일상/생각그 식탁은 널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2 Erzenico 22/01/22 3684 25
    11841 오프모임모객) 7/11 일 점심 평양냉면 54 even&odds 21/07/02 3707 1
    3484 기타원어민도 못푸는 수능34번 문제? 34 Event Horizon 16/08/09 6734 11
    3714 과학/기술양자역학 의식의 흐름: 더 퍼스트 어벤져 36 Event Horizon 16/09/16 5984 12
    3750 과학/기술양자역학 의식의 흐름: 월급 D 루팡 29 Event Horizon 16/09/22 5639 10
    3825 문화/예술영어의 두 얼굴: 게르만-로망스 41 Event Horizon 16/10/04 7278 6
    3972 문화/예술[스압][혐주의] 병든 캘리포니아의 나무들 10 Event Horizon 16/10/21 4368 3
    4252 과학/기술양자역학 의식의 흐름: 금수저와 집사 13 Event Horizon 16/11/29 6214 8
    4246 음악조성진 쇼팽 피아노협주곡, 발라드 앨범 감상후기. 10 F minor 16/11/28 5532 3
    4208 음악좋아하는 곡을 연주한다는것 22 F minor 16/11/21 4005 6
    1413 일상/생각어린 시절의 책상 6 F.Nietzsche 15/11/01 8107 0
    1498 꿀팁/강좌남규한의 사진 레시피 - 비오는 밤 31 F.Nietzsche 15/11/08 9598 6
    1499 꿀팁/강좌남규한의 사진 레시피 - 비오는 날의 단풍 4 F.Nietzsche 15/11/08 8555 3
    1509 꿀팁/강좌남규한의 사진 레시피 - 액자 속의 나무 8 F.Nietzsche 15/11/09 6215 2
    1525 꿀팁/강좌남규한의 사진 레시피 - 코카콜라 매니아 3 F.Nietzsche 15/11/10 6007 7
    1531 꿀팁/강좌남규한의 사진 레시피 - 까를교의 노인 4 F.Nietzsche 15/11/11 6212 0
    1543 일상/생각사진 공모전 치느님 인증!!! 13 F.Nietzsche 15/11/12 5801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