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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6/01 02:11:48
Name   삼공파일
Subject   [과학철학] 칼 포퍼에 대하여
들어가기 전에

원래 이어서 포퍼에 대한 이야기를 써볼까 했는데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아서 쓰지 말까 하다가 이왕 쓰기로 한 거 포퍼까지만 쓰겠습니다. 아무래도 쿤까지 썼다가는 제 멘탈이 무너질 것 같군요. 먼저 댓글을 통해 받은 의견들을 종합해서 답변 드리겠습니다. 일단 과학과 유사과학을 구별하는 문제가 과학철학의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어젠다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과학과 유사과학을 구별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포퍼 이전에도 과학자들은 유사과학이 정말 유사과학일까 고민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꿈을 해석하겠다는 사람이나 사회주의 앞에 과학적이라는 말을 붙이는 사람이나 대홍수의 증거를 화석에서 찾는 사람이나, 과학자들은 그들의 작업을 과학이라고 단 1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미 답은 정해진 상황이죠. (포퍼나 쿤이나 라카토슈나, 과학이 아니라고 여기던 것을 과학이라고 새롭게 인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포퍼는 오히려 기존의 과학자들도 사실 제대로 과학을 하는 게 아니라는 식으로 공격했고 쿤과 라카토슈는 그런 엄밀성이 현실의 과학을 모르는 허구라고 비판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과학과 유사과학을 구별하는 작업 자체를 위한 이론은 아니었던 셈이죠.)

게다가 과학자들은 철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이 자신들의 작업에 간섭하는 걸 매우 싫어했습니다. 또한, 지금과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대중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오늘날의 (미국 중심의, 또 생물학, 사실상 의학 중심의) 과학이 되었고 대중과 과학과의 간극은 스티븐 호킹이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뛰어난 과학자들이 쓴 명문들이 소개되거나, 황우석 박사 같은 사람들 덕분에 전국민이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논문을 실리는 게 대단한 일임을 알게 되는 식으로 좁혀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과학에 대한 메타적 연구는 활발하게 계속되겠지만 과학이냐 유사과학이냐의 논의에 철학이나 역사학이 끼어들 여지는 사라지게 된 것…… 같습니다.

과학철학의 배경

그런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달랐습니다. 세상이 무너지고 동시에 사상도 무너지고 게다가 과학도 무너지던 시대였거든요. 그 속에서 새로운 세상이 다시 건립되고 새로운 사상이 다시 생겨나고 또 새로운 과학이 다시 탄생했습니다. 이러한 낭만과 혼란의 시대에 가장 낭만적이고 혼란하던 도시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빈에서 태어난 천재들 중의 천재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영국으로 떠나 러셀을 만나고 다시 노르웨이의 사람 없는 움막에서 잠적해서 <논리-철학 논고>라는 짧은 책을 씁니다. 그 뒤 이 책을 너무 감명 깊게 읽은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서로 토론을 하면서 학파를 만드는데, 그 학파의 이름은 “빈 학파” 혹은 “비엔나 서클”이었습니다. 세상에 논리학 빼면 아무 의미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은 논할 가치가 없다는 다소 극단적이기도 한 생각들을 유려하게 정리하여 “논리 실증주의”라는 중요한 사상을 정립시키죠.

과학철학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포퍼와 쿤, 둘 다 논리 실증주의와 비트겐슈타인을 탐독하고 매우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역시 빈에서 태어난 포퍼는 논리 실증주의의 토대 위에서 출발한 한편, 논리 실증주의의 한계를 지적해나가면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해나갑니다. 논리 실증주의를 매우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명제의 본질적 속성은 참 혹은 거짓으로 언제나 판명될 수 있고 그것을 판명하는 작업이 과학의 본질이며, 그 본질적 속성에 대해 논하는 작업이 논리학과 철학의 임무다. 참 혹은 거짓을 판명할 수 없는 윤리학이나 형이상학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약간 무리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사실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팩트 중심주의라는 말에서 이런 논리학과 과학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쉽게 찾아보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세상을 바꾸고 떠들썩하던 때, 포퍼 역시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지성에 탄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딩턴이라는 사람이 어디 멀리 다른 대륙으로 가더니 실험을 합니다. 태양빛을 측정하는데 뉴턴 물리학에서 예측하던 것과 각도로 1.25초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한 것이죠. 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예측한 것과 정확히 일치하면서 상대성 이론이 실험적으로 검증된 첫 사례가 됩니다. 포퍼는 이 실험을 지켜보면서 너무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어떤 영감이 떠오르게 된 것이죠. “만약 이 실험 결과, 아인슈타인이 틀렸다고 나왔다면 상대성 이론은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아인슈타인의 위대함은 그가 옳았던 것이 아니라 “틀릴 수도 있었던 것”에 있다고 깨닫게 되면서 반증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게 된 것입니다.

포퍼의 사상

이렇게 제시된 반증가능성의 개념으로 포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눈엣가시 같던 몇 가지를 과학의 영역에서 영영 쫓아내버리는 작업이었습니다. 빈에서 탄생하거나 빈을 강타한 세 가지 이론이 그것이었는데,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아들러의 개별 심리학이었습니다. 사실 포퍼가 빈에서 성장하면서 이 세 가지 이론들에 대해 매우 안 좋은 추억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후 포퍼는 자신의 반증가능성 개념을 민주주의 사회에서 열린 토론의 필요성과 접목시키면서 오늘날 자유주의나 보수주의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노년까지 정치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면서 연설과 기고를 왕성하게 했는데 그런 점에서는 포퍼와 상당히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사회주의와 좌파 사상을 맹렬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그 유명세에 비해서 인기는 별로 없었습니다. 또, 쿤에 비해서 천재성이 두드러지는 사상을 전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묻힌 느낌이 있는 철학자인데 오늘날 한국에서 다시금 인기(?)를 얻네요.

여하튼 다시 그의 사상으로 들어가보면, 먼저 그는 과학에 대한 오해 몇 가지를 해소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작업은 과학과 유사과학을 구분하는 것인데, 이는 어떤 이론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냐, 혹은 어떤 이론이 제대로 된 이론이냐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과학 역시 자주 실수를 저지르며, 과학이 아닌 것 역시 때로는 진리를 발견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죠. 어떤 이론이 참인지 아닌지는 포퍼에게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뉴턴의 고전 물리학의 오류를 지적했다고 해서 뉴턴의 작업이 과학이 아니게 된 것은 아니죠. 오히려 그러한 오류를 지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과학인 것입니다. 또, 그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엄밀한 실험적 방법과 수학적 증명을 사용했다고 해서 과학이 사회학이나 심리학보다 더 정확하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더 엄밀하고 더 정확해서 과학인 것도 아니죠. 오히려 이러한 과학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 때문에 유사과학을 과학이라고 여기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를 읽고 감명받지 않기는 사실 어려울 것입니다. 유려한 문체 속에 열정과 통찰력이 담겨 있죠. 그들의 사상이 빈을 휩쓰는 모습을 보면서 포퍼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그들의 이론은 많은 현상들을 매우 합리적으로 잘 설명해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되고 이 이론들이 제시하는 많은 것들이 실제 우리 세상에서 참인 것이 증명됨을 목격합니다. 정교하고 잘 설계된 이론이며 실제와 부합합니다. 그 이론의 힘을 느낀 사람들은 “과학적”이라는 말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죠. 가령 정신분석학의 경우, 그 당시에 인간의 정신을 구조적으로 분석한다는 접근은 프로이트 자신이 물리학과 화학을 신봉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 임상적으로(clinically) 효과를 보고 많은 환자를 치료합니다. 꿈을 해석한다고 처음에는 사이비 취급 당하다가 환자를 실제로 치료하면서 프로이트가 점차 인정 받게 된 것이죠.

포퍼의 반증가능성이 이런 기라성 같은 유사과학들을 어떻게 꺾어나갔는지 확인해봅시다. 먼저, 쉬운 것부터 시작해보죠. 자연 현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이를 통해 연역적 추론을 해내며, 꼼꼼히 기록하고 때로는 통계적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는 전형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과학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해서 과학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이런 조건에 점성술이 완벽하게 부합한다는 것이죠. 우리 식으로 따지면 주역이나 토정비결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황도 12궁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기록하고 그 때 태어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할 지로 점성술을 당연하게도 과학이 아닙니다. 점쟁이들은 자신의 예언이 틀린 사례에는 전혀 주목하지 않고 맞은 사례만 추려내어 자신의 예언을 더욱 공고하게 만듭니다. 또, 구체적이지 않고 애매모호한 말을 써서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실하지 않게 만듭니다. 이렇듯 대놓고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피하는, 즉 반증가능성이 없는 점성술은 과학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왜 과학이 아닐까요? 정신분석학은 앞서 말씀 드렸듯이 이론적 체계가 있고 임상적 효과도 얻었지만 포퍼는 과학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남자가 앞에 있던 사람을 밀어서 물에 빠뜨렸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남자는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은 어린 시절의 문제로 인한 강박증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어떤 남자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다면, 정신분석학은 이 역시 강박증 때문에 일어난 일로서 윤리적 행동을 하도록 초자아가 강박증을 승화시켰다고 봅니다. 즉, 서로 완전히 상반된 행동을 하더라도 정신분석학은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러한 이론은 점성술과 마찬가지로, 어떤 가능한 사실에 의해 틀렸다고 입증될 수가 없습니다. 과학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포퍼가 가장 미워했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마르크스주의는 반증가능성이 있는 이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누적되면 노동자 계급에 의한 혁명이 발발하여 공산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했죠. 이는 정말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해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 이론에는 예외가 많죠.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사회가 잘 정착됐지만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고, 중국은 중세적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가 자본주의 사회가 제대로 정착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우리나라와 같은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계속 믿거나 아니면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으면 혁명이 일어나지 못한다고 이론을 수정하고 또, 중국에 맞춰서 이론을 수정했죠. 편한 방법대로 이론을 계속 수정해나가면서 정합성을 유지하는 대신에 반증가능성을 희생했고, 때문에 과학으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포퍼의 이론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이론을 확인하거나 검증하는 것은 대부분 매우 쉽다.
2.        검증은 틀릴 위험이 있는 경우에만 의미 있다.
3.        모든 좋은 과학 이론은 어떤 가능성을 금지한다. 금지하는 것이 많을수록 좋은 과학이다.
4.        어떤 이론이 반드시 반증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증되지 못한다면 과학이 아니다.
5.        진짜 실험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다. 실험할 수 있는 이론은 반증가능성이 있는 이론이다.
6.        증거는 예외 상황에도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즉, 보강 증거는 없다.
7.        어떤 이론이 반증되었다는 사실을 거부하기 위해서 보조적인 가정을 계속 더해나간다면 과학적 지위를 상실한다.

포퍼에 대한 비판

과학과 유사과학을 구별하는 문제는 유사과학을 과학으로부터 구별하는 작업이 어렵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역사적 질문을 새롭게 던지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계속 강조했습니다. 포퍼가 이러한 문제를 가장 먼저 정립한 사람이고요. 그런데 이러한 포퍼의 이론에 대해 “네가 진짜 과학이 어떻게 연구되는지 아냐? 혼자 방구석에서 상상하는 게 과학이 아니야!”라고 (실제 그들의 논쟁은 이 이상으로 공격적이고 예의 없었다고 합니다) 태클을 거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쿤은 역사적 접근을, 라카토슈는 인류학적 접근을 시도했죠. 포퍼는 이러한 공격에 대해 “과학자라는 놈들이 과학이 뭔지도 모르고 그동안 과학한답시고 나댔네” 정도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즉, 반증가능성의 엄밀함을 지키지 않은 것을 과학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 것이죠. 그런데 이는 포퍼 스스로 과학은 언제나 옳다, 과학은 실험적 방법과 연역적 추론으로 이뤄져 있다 등의 편견을 깼다는 점에서 다소 아이러니한 점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접근 방법까지 사용하지 않더라도 포퍼 이론 자체에 내재적인 오류 몇 가지가 존재합니다.

첫 번째로 반증가능성이 지칭하는 것이 무엇인가 불명확하다는 점입니다. 반증가능성이 어떤 명제의 논리적인 참과 거짓에 대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과학자가 어떤 이론에 대해서 가져야 할 태도인지 포퍼조차도 확실하게 선을 긋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마르크스주의자가 나는 마르크스 원형의 이론만 가치가 있다고 보고 이후의 모든 수정주의는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한 마르크스주의는 추종자들에 의한 훼손이 없기 때문에 과학일까요? (물론 너무나 당연하게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 아니라는 대전제가 있어야겠지만요)

두 번째로는 반증가능성이 있는 이론이 모두 과학이 될 수 없다는 점이죠. 이는 포퍼 스스로도 인정한 부분인데 반증가능성이 구획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한 셈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여기에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진화한다”라는 문장을 더해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또 진화한다”라는 문장을 새롭게 만들고 이를 새로운 이론이라고 해봅시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진화한다”라는 문장이 거짓임을 판명할 수 있는 과학적인 이론이기 때문에, 그 문장과 다른 문장을 합쳐서 만든 문장 역시 반증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A가 거짓일 때, A&B도 무조건 거짓)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또 진화한다”라는 이론은 반증가능성을 갖고 있고 과학인 셈이죠.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인데, 포퍼는 오랫동안 다윈의 진화론을 과학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말년에 한 연설에서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까 과학이다”라고 번복하긴 했지만, 포퍼의 논지는 창조과학자(?)들의 좋은 레퍼토리가 되었습니다. (포퍼 스스로 다윈의 진화론을 과학으로 인정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창조과학자들이 자신을 오용하는데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일단 먼저 지적할 점은 다윈의 진화론은 사실 틀렸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죠. 이를 대전제로 했던 다윈의 진화론은 유전자의 실체를 규명하지 못했던 멘델의 유전학과 함께 한동안 묻혀버렸다가 몇몇 실험과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의해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과 상관 없이, 포퍼는 반증가능성 이론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다윈의 진화론을 과학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일종의 동어반복이라고 봤는데 적자, 즉 가장 적응했다는 말과, 생존, 살아남았다는 말이 똑같다고 생각한 것이죠. 동어반복(tautology)는 논리학적으로 거짓으로 판명날 수가 없으므로 과학이 아니라는 말이죠. 재밌는 점은 역시 당대 이론가들의 입장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을 마음대로 가져다 쓴 것은 너무 사례가 많긴 합니다만) 마르크스는 처음 다윈의 진화론을 접하고 좋아했습니다. 인류의 탄생이라는 신화적이기까지 한 영역에서 신을 몰아낸 이론을 좋아할 수 밖에 없었겠죠. 그런데 적자생존이 자본주의 사회를 정당화하는데 쓰이는 것을 보면서 나중에는 다윈의 진화론을 엄청 비난하죠. 아마, 제 개인적인 감상입니다만, 한 천재의 엄청난 통찰력으로 태어난 이론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지만 실험 따위는 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포퍼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마르크스주의의 향기를 맡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도 과학이 아니라 어떤 인문학적 이론이라는 입장을 내놓았고요.

그러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 이론 중 하나인 다윈의 진화론을 과학이 아니라고 했다는 지점에서 이미 뭔가 문제가 있겠죠? 가장 간단한 지적은,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의 역사를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반복될 수가 없죠. 지구를 다시 똑같은 환경에서 탄생시킨 다음에 정말 생물이 진화하는지 볼 수 있다면 논쟁의 여지가 없겠지만 애초에 그럴 수 없는 일이죠. 사실 일반인들이 진화론에 대해 갖는 오해 아닌 오해가 여기 있는데 “진화론이 실험적으로 입증된 적이 있느냐”라는 질문은 답은 “없다”가 답인 셈입니다. 유전자의 존재, 유전자의 변형, 유전자가 개체에 미치는 영향, 유전자가 집단에 미치는 영향, 세대가 지남에 따라 유전자가 변하는 과정 모두 실험적으로 수만 번 확인되었지만, 사람들이 물어보는 건 그게 아니죠. 부글부글 끓는 용암이 식으면서 단세포가 태어나고 그게 벌레가 되었다가 공룡이 되었다가 다시 원숭이가 되었다가 사람이 되는 과정을 실험으로 입증할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물어보는 질문일겁니다. 물론 화석상의 증거, DNA상의 증거가 있지만 이는 이론의 정합성을 더해주는 (포퍼가 과학의 단서로 거부했던) 보강 증거인 셈이죠. 다만, 그 점에 있어서도 너무 많이 보강이 되었다는 게 함정이랄까요?

결말

사실 포퍼보다 쿤이 훨씬 더 많이 인용되고 흥미롭고 천재적이지만 쿤은 너무 어려워서 못 쓰는 걸로...... 아마 몇 년 전 게시판 글을 검색하면 좋은 글 몇 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포퍼나 쿤이나 라카토슈나 철학적이든 역사학적이든 인류학적이든 현대 과학에서 그다지 쓸모 없다는 이야기로 끝나면 여태까지 쓴 이야기가 허망해지고 비약이 있는 듯한데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시장경제가 수요와 공급이 서로 만나 잘 조절되는 거라는 이론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세상에 그런 시장은 없잖아요? 적어도 시장경제 이론은 시장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고 분석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만, 과학자라는 어떤 전문자 집단에 대한 메타적 접근이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죠.

일단 확실한 점 하나는 그 당시 때도 과학철학이나 과학사는 유사과학을 가려내는데 딱히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유사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점은 그냥 답은 정해져 있었을 뿐이었고 과학자들이 열 받아 하면 유사과학이었죠. 그 전에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그렇고 어떤 과학에 대한 이론도 기존에 유사과학이라고 여겨졌던 것을 과학의 지위로 올려놓거나 과학이라고 여겨졌던 것을 유사과학의 지위로 추락시킨 적은 없습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당시에 정신질환자 이마에 대못이나 박던 수준에서 상담치료를 하는 방법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임상적 효과를 봤다는 점에서 상당히 인정받았지만, 뇌과학과 신경과학이 발달하면서 곧바로 “원래 위치”로 돌아갔습니다.

창조과학을 교실에서 몰아낸 것으로 유명한 아칸소 재판이라는 것이 있죠. 재판장이 포퍼의 이론을 비롯해서 몇 가지를 인용해 창조과학이 과학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리는데요, 과학자와 종교학자를 불러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전문가 증인이라고 하죠. 과학자들에게 진화론은 과학이냐고 물어보니까 다 맞다고 하고 창조과학이 과학이냐고 물어보니까 다 아니라고 했고, 종교학자들에게 진화론이 종교냐고 물어보니까 다 아니라고 하고 창조과학이 종교냐고 물어보니까 다 맞다고 했다는군요. 전문가 증인의 증언이 판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과학적 판단이 아니라 사법적 판단이었겠죠. 아마 오늘날 우리가 과학철학을 읽었을 때 의미가 있다면, 과학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씻고 과학주의로부터 탈피하는데 있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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