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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12/27 23:58:05
Name   골든햄스
Subject   공부가 그리워서 적는 대학 첫 강의의 기억

잘 모르고 어리버리하게 신청한 학부의 이름은 자유전공학부였고, 그곳에서는 법을 필수로 배우게 되어있었다.

큰 대강의실은 교수님을 바라보며 첩첩이 의자들이 쌓이게 되어있었고, 교수님은 그곳에서 싱긋이 웃고 계셨다.

첫 강의 시간에 나는 지각을 했고, 머뭇거리다 앞으로 나갔다. 교수님께서 날 쳐다보았다. “이 수업이, 법학통론이 맞나요?” 교수님은 그렇다고 하셨고 “법학통론 같지 않았나봐요.” 모두의 웃음이 터졌다.

라틴어, 한자, 예전의 범선 무역 거래까지 넘나들며 이야기하는 교수님의 수업은 항상 이해하기 어려웠고 신입생 때는 더욱 그랬다.

나는 민망해하며 자리로 털레털레 돌아갔다.

그뒤에도 수업은 계속됐다. 교수님은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별안간 한국 공인인증서 시스템에 맞서 1인소송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셨다.

교수님은 완전히 자유로운 수업을 지향해 출결이 자유였기에 곧 아이들은 속속들이 지각하거나 결석하기 시작했다. 반 이상이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학점 경쟁이 지금처럼 치열하지 않은 때라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대강 씻고 내 게으름이 허락하는 정도의 시간에 나가 책상에 걸쳐 앉아서 강의를 그냥 라디오처럼 들었다. (교재도 더럽게 어려웠다) 그런데 교수님은 아이들이 그렇게 줄어드는 걸 보면 서운해하실 법도 할 텐데 하나도 티를 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늘 허리춤에 마이크를 차고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손을 든 아이가 있으면 너무도, 기쁜 얼굴로 해맑은 아이 같이 통로를 뛰어오는 것이었다.

그 표정, 항상 잘 다리지 않아 구겨져있는 교수님의 셔츠.
나는 왠지 모르게 교수님이 매우 좋아져 아이들에게 ‘교수님이 잘생겼다’고 말하고 다녔다. 실은 잘생기진 않으셨고 평범하셨는데 왠지 모르게 나는 대단히 흥분했다.

“법만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어… 강제성 아닐까요?” 수줍은 일학년 새내기인 나의 대답에 교수님은 세상에 그런 똑똑한 대답이 있냐는 듯 감탄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그 모든 이야기를 매해 듣고 또 들었을 텐데도.
“하지만 강제성이 없는 법들도 있어요. 그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나는 입이 말랐다. 하여간 그런 식으로 수업은 진행됐고, 법치주의에 대해 웬 영국 판사가 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어느 날. 햇빛에 비치는 먼지들이 춤추듯 유영하는 그날 눈부신 오전에서 정오로 넘어가는 그 시각 즈음.
아. 이게 마그나 카르타로부터 시작된 권리를 확대해나가는 큰 흐름의 이야기구나. 나는 감동해 눈을 뜨며 책을 바라보았다. 역사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저기 선 존 왕의 굴욕부터, 서명되는 마그나카르타, 보스턴 항구의 티파티 사건, 미국 원주민들의 굴욕과 미국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항의하는 자산이 없는 사람과 여자들, 흑인들도 투표권을 보장받고, 법은 계속해서 향해 달려간다.

그 화살표의 존재에 너무도 눈부신 환희가 느껴져 나는 어느 순간인가 그 수업에 진심이 되었다. 기말고사 때, 교수님께서는 시험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숭실대 법학 교수를 불러 당시 화제던 정치에 대한 사법의 참여 자제에 대한 세미나를 하였다. SNS로 당대 논객들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연사였기에, 신이 나서 강연을 들었다. 애들은 거의 몰래 시험공부를 하거나 자고 있었다.

“오늘 내용으로 시험을 낼 겁니다.” 설마 그 말이 농담 아니라 진담이셨을 줄이야. 기말은 오픈북이었지만 그 강연에 나온 이야기를 주제로 했고, 그다지 어렵지 않게 글을 써내려가는 나를 동기 하나가 유심히 관찰하였다. 나는 답안을 쓰는 게 재밌었다. 결과는 A. 족보를 못 받아 과제를 망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즐거웠다.

그 첫 학기, 나는 뭐가 뭔지 모르고 과 사무실에 불려가 하필 과에서 4등을 하게 돼서 성적 장학금을 못받게 된 것이 아쉬우니 외부 장학금을 연결해주겠단 말을 들었다. “아주 잘했는데 아쉽단 말이지..” 학생을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과 사무실의 아저씨의 안경 너머의 시선이 낯설었다. 곧이어 자기 재산을 학교에 기부하고 돌아가신 웬 할머니의 이름으로 된 장학금을 받았다.

인정 받았다.
나는 이 학교에서 배제당하거나 따돌림 당하지 않는다.
환대 받는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대학을 생각하면 그 큰 1층 신법학관 대강의실이 생각나, 추억에 젖곤 하는 것이다. ‘이야. 1학년들을 데려다 놓고 그런 강의를 하시다니.’ 하고 생각도 좀 하고.

그때부터 배운 법학들은 정말 재밌었다. 아버지와 지낸 것의 상처와 지난 불우한 환경 속에서 억지로 공부를 이어온 것의 후유증이 도져 위장장애와 디스크 등으로 낙마하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공부는 섹스다!’ 라고 속으로 진심으로 주장했다. (큰소리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학대적인 아버지로부터 의절하는 과정과 로스쿨 입시, 연대채무 상환, 아이들의 외면 등의 상처가 쌓인데다 덤으로 뒤늦게 긴장이 풀렸는지 나는 로스쿨에서부터 희귀병 섬유근육통 의심진단을 받고 앓기 시작해 그로부터 한참을 공부하는 감각을 잃게 된다.

실은 지금까지도 그 감각을 잃고 있다. 이제는 이미지밖에 눈앞에 그려지지 않는다. 언제나 구겨진 엉망의 옛날식 체크 셔츠를 입고 나오던 교수님과, 그 교수님과 결혼하겠다며 동기들에게 선언하던 나, 햇빛에 춤추는 먼지들, 채 다 읽지도 못하지만 나중에 그 뜻을 이해하게 된 교재 (<법의 지배>), 그리고 언제나 내가 사랑한, 마그나 카르타.

-

다시는 공부를 못하게 되더라도, 나는 행운아다. 아버지 밑에서 가난과 학대 속 계속 살았더라면 죽거나 미쳤을 거다. 나는 내가 미친 여자가 되어 길거리를 떠도는 게 잘 상상이 갔다. 아주 잘. 그에 비해 지금은 어떤가. 꽤 편안한 잠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잠에 들고 전업주부를 해도 좋다는 제안을 받는다. 세간의 시선으로 보아 성공이 틀림 없다.

그런데, 언제 그 책을 또 읽지.
.
.
.
아니, 애초에 그 책이 의미가 있었나.

이동학대에 관한 법률이 왜이리 현실에서 안 쓰이냐고 가져간 내 앞에서, 로스쿨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법은 종이 위에 글자에 불과해요.”

그러면 나는 법을 떠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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