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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1/22 16:36:30
Name   化神
Subject   일상의 사소한 즐거움 : 어느 향료 연구원의 이야기 (5편)
향료 연구를 하다보면 아이러니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 아이러니란 바로, "나의 유능함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순간이다. 내 능력을 발휘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는 많지만, 내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향 업무를 하다보면 종종 생기는 상황이다.


향료 연구를 하다보면 때때로 기존의 향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향은 매우 민감해서 천연 원료들의 작황에 따라 향이 달라지며 같은 원료를 사용하더라도 제조원이 어디인지, 어느 설비를 이용했는지에 따라서도 향이 달라진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강화되는 법적 요건이나 자율 규제 때문에 원료를 대체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이러한 사정에 대해 이해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관심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클라이언트들은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내가 맡는 냄새가 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조금의 변화 때문에 소비자들이 떠나갈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향을 구성물질에는 변화가 생기지만 사람들이 인지하는 향은 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눈으로 보여지지 않는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은 향료 연구원에게는 매우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여러가지 이유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향 A를 A'로 바꾸는 작업을 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지지부진하다. A'면 충분하다는 확신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럴 때 마다 동료 연구원들에게 물어본다. "이거 3개 중에 다른 하나만 골라보세요."


질문을 받은 동료의 눈빛이 흔들린다.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 보는 나) 이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많이 진행하는 3점 테스트이다. 샘플을 3개 준비하는데 이 중 하나만 다른 것으로 준비한다. 그 하나가 A든 A'든 크게 중요하진 않다. 여기에서 핵심은 다른 하나를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야 성공이라는 점이다. 다른 둘과 다른 하나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면, 이 때 A'는 A를 훌륭히 대체하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들이 잘 구분한다면 더 비슷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문제를 낸 사람은 못 맞추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문제를 맞이한 사람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물론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냄새를 잘 못맡았다'는 의미도 (일부지만)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근히 '나는 구별하지만 다른 사람이 잘 구분해내지 못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동료의 과제는 성공하고 나는 냄새를 잘 맡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3점 테스트를 대할 땐 긴장할 수 밖에 없다. 향료 연구원으로서 자존심이 걸린 순간이랄까. 최악의 상황은 다른 사람들은 다른걸 잘 골라내지만 나만 못 골라내는 상황이다. 그래서 3점 테스트를 할 때 원칙은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정답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냄새를 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전에 쓴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후각 능력 평가 결과는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 알면 충격받는다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종종 "향은 마음으로 맡는다."는 말을 한다. 사전에 별다른 정보가 없이 비슷한 향을 맡으면 구별하기 어려워서 그렇다. 심지어 잘못된 힌트를 주면 실제로는 전혀 나지 않는 향인데도 그 향이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만든 결과물 중에서 라벤더가 중심이 된 향을 선보인 적이 있는데 평가 중에 인삼 향이 난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삼 향이 난다는 사람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라 믿고 싶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하지만 "3개 중에 다른 하나가 있다"는 정보가 입력되는 순간부터는 달라진다. 아무리 비슷하게 만들어도 집중해서 찾아내려고 하면 찾아낸다. 사람의 후각은 참 신비하다. 어쩔 땐 뻔히 보이는 것도 구분하지 못하는데 또 어쩔 땐 못 찾아낼 것 같은데 잡아내고야 만다. 향료 연구원이 느끼는 머피의 법칙이랄까, 내가 문제를 내는 사람일 땐 사람들이 다 맞추고 내가 문제를 푸는 사람일 땐 못맞춘다.    


며칠 전에 3점 테스트를 하나 받았다. 더 이상 기존 생산처에서 생산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새로운 생산처를 알아봐야 하는 제품이었다. A, B, C 3개 중에 다른 하나를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순서대로 향을 맡았다. A는 전에 맡아본 적이 있는 향인 것 같았고 B는 대체 생산하는 제품인 것 같았다. A하고 B가 다른 건 확신할 수 있는데 C가 문제였다. 과연 이것의 정체는 A일까 B일까... 잠깐 고민 끝에 나는 답을 적어서 제출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동료의 목소리가 왠지 밝아보였다. 나는 그에게 충분히 도움이 될 정도로 무능력했던 것 같다.  

일상의 사소한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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