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5/06/22 22:54:03
Name   사슴도치
File #1   1000023586.jpg (192.5 KB), Download : 29
Subject   나는 동네고양이다.


언제부턴가 이 동네에 눌러 살고 있다. 낮엔 벤치 밑이나 돌계단 위에서 몸을 말리고, 밤엔 식당 앞 온기 남은 바닥에서 웅크린다. 정해진 집은 없지만, 내가 머무는 곳이 곧 내 집이다. 여기저기 다녀보니 이 동네가 꽤 살 만하더라.

이 동네에서의 하루는 대개 햇볕으로 시작된다. 아침이면 편의점 앞 자판기 옆으로 가본다. 거기 바닥은 따뜻하고, 간밤에 누군가 떨군 과자 부스러기 냄새가 날 때도 있다.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가끔 나를 힐끔 보고 간다. 어떤 사람은 "어유, 너 여기 또 있네" 하고 중얼거리기도 한다. 자주 마주치는 얼굴이다. 아마 이 구역 순찰자 같은 사람일 거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누군가 나타난다. 반짝이는 네모난 걸 들고 있는 사람. 그걸 나한테 들이밀고, 웃는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걸 들고 있는 사람은 다들 비슷한 표정을 짓는다. 조용하고, 부드럽고, 조금 바보 같기도 한 표정. 해치지 않을 얼굴이다.

가끔은 자세를 바꿔준다.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거나, 고개를 살짝 돌려서 햇빛을 받는다. 그러면 그들은 “오~ 예쁘다~” 하고 말한다. 뭔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뭐, 싫지 않다. 그냥 누워 있었던 건데, 이렇게 감탄해주면 나도 그 순간은 좀 으쓱해진다.

점심쯤엔 골목 쪽으로 간다. 까치들이 자주 노는 곳이다. 지붕 위 전선에 줄지어 앉아서 깍깍 소리를 낸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멍해진다. 나는 그 아래 가만히 앉아서 그들이 날아오르고 떨어지고, 다시 날아가는 걸 본다. 쟤네는 뭔가 목적이 있어 보인다. 나는 목적 같은 건 없지만, 그래서 더 자유로운 걸지도 모른다.

어느 오후엔, 할머니 한 분이 나를 보고 멈췄다. 천천히 봉지를 뒤적이더니 츄르를 꺼내 든다. 그건 내가 아는 냄새다. 가까이 다가가 살짝 핥는다. 아주 잠깐, 아주 가까이. 그 순간만은 허락한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손을 내밀면 나는 물러선다. 츄르는 츄르고, 거리는 거리다.

그리고 해가 기울면 나는 놀이터로 간다. 아이들은 사라지고, 미끄럼틀 밑이 조용해진다. 그 밑에 누워 있으면, 낮에 데워진 금속이 등짝에 따뜻하다. 그 따뜻함은 말이 없다. 그냥 그대로, 나를 품어준다. 고양이라는 존재는 말을 믿지 않는다. 온기를 믿는다.

밤이 되면 다시 골목 어귀, 식당 배기구 밑으로 돌아간다. 그 아래는 늘 훈훈한 바람이 나온다. 거기서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는다. 그날 본 까치, 츄르 냄새, 이상한 네모 물건, 사람들 웃는 얼굴. 그 모든 게 흩어지듯 스며들고, 나는 잔다.

나는 이름이 없다. 누가 부르든, 누가 쓰다듬으려 하든, 나는 그냥 나다. 이 동네에 눌러 사는, 고양이 하나. 거리를 두면서도, 완전히는 떠나지 않고—따뜻한 곳을 찾아, 오늘도 산다.



6
  • 야옹
  • 냐옹!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178 일상/생각나 자신 13 절름발이이리 15/10/05 8392 0
13636 일상/생각나 젊을때랑 MZ세대랑 다른게 뭐지... 31 Picard 23/03/13 6053 11
9639 정치나경원 아들, 고등학교 시절 논문 1저자 등재 논란 23 ArcanumToss 19/09/08 7347 0
781 음악나나 무스꾸리 - 젊은 우체부의 죽음 7 새의선물 15/08/12 7275 0
1349 일상/생각나누는 사회 - 크랙스 리스트 5 까페레인 15/10/26 9248 0
13341 기타나눔 - 서리태 31 천하대장군 22/11/22 3993 13
8763 게임나는 BL물을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관심이 없는건가? 6 덕후나이트 19/01/14 5876 0
8086 음악나는 광속으로 너를 잃어갔어 9 바나나코우 18/08/21 5017 3
11849 일상/생각나는 그 공원에 가지 못한다. 3 Regenbogen 21/07/06 4242 15
4643 일상/생각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11 고양이카페 17/01/17 4863 5
10648 일상/생각나는 나와 결혼한다? 비혼식의 혼돈 15 sisyphus 20/06/03 6533 0
10556 일상/생각나는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9 켈로그김 20/05/06 5109 31
2996 일상/생각나는 너보다 늦었다. 2 No.42 16/06/11 4682 7
12629 일상/생각나는 네 편 9 머랭 22/03/15 5737 39
3452 IT/컴퓨터나는 다녀왔다 용산던전을 22 Raute 16/08/05 6457 3
14619 일상/생각나는 다마고치를 가지고 욕조로 들어갔다. 8 자몽에이슬 24/04/24 3027 17
12003 일상/생각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4 lonely INTJ 21/08/22 5875 7
10030 일상/생각나는 다시 살을 뺄 수 있을까?? 29 원스 19/11/26 6081 0
10982 일상/생각나는 대체가능한 존재인가 14 에피타 20/09/23 6103 23
15121 일상/생각나는 돈을 빌려달라는 말이 싫다. 11 활활태워라 24/12/10 2948 14
15543 기타나는 동네고양이다. 1 사슴도치 25/06/22 1313 6
3427 일상/생각나는 디씨인사이드가 싫다. 31 John Doe 16/08/02 8290 1
1507 일상/생각나는 맑은날이 싫다. 4 스티브잡스 15/11/09 6385 1
1505 일상/생각나는 무단횡단 하는 사람이 싫다. 17 化神 15/11/09 8735 0
4349 일상/생각나는 무엇을 바라고 술을 멀리했던가(가벼운 염 to the 장) 9 진준 16/12/10 4623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