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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6/02 00:22:42
Name   구밀복검
Subject   <아가씨> 즉석 단평
* 방금 보고 왔습니다. 서사에 대한 설명이 일부 있으나 감상을 해칠 정도의 사전 정보는 없습니다. 약스포 정도 될까요.



- 도입부의 설명은 상당히 성의가 없습니다. 각색이 된 이상 원작처럼 꼼꼼히 상황과 배경과 개인사를 묘사할 필요는 없지만, 인물 묘사를 죄다 생략해버리고 등장 인물들의 내레이션과 대사만으로 최소한의 정보만 주고 넘어가는 것은 허술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줍니다. 어차피 알맹이 없으니까 대충 따라오면 된다고 실토하는 것 같죠.

- 당최 내내 긴장감이 없습니다. 인물의 표면과 이면 사이, 인물과 인물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서스펜스가 원작의 맛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지요. 대사나 컷 간의 여운도 없고 위화감을 고조시키는 작업도 없이 투박하고 무신경하게 서사가 처리되다보니, 자연히 팽팽함도 미스테리함도 위화감도 아우라도 느껴지지 않죠.

- 로맨스라기에는 격조와 품격이 떨어지는 싸구려고, 포르노라기에는 겉멋과 무게가 잔뜩 들어간 사치품입니다. 수준 낮은 개그 쳐서 맥이 풀리게 만들고, 그러면 차라리 대놓고 싼티나게 찍으면 되는데 또 처연하게 BGM은 깔아놓고...

- 대사처리도 유치합니다. 쌈마이스러운 것은 둘째치고 통속적이고 진부하며 창의적이지 못한, 어디에선가 흔하게 들었을 대사들이 주를 이루죠. 이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이 몰개성한 로봇 같은 NPC로 느껴지게 됩니다. 특히 러브 씬에서 둘이 나누는 대화는 극도로 한심스럽더군요. 이게 한창 나이 철 모르는 소녀들이 나누는 대화인지, 오순 아재가 매춘하며 나누는 대화인지..

- 전반적으로 90년대 충무로 코미디 영화를 연상시키는 질박함이 자주 연출됩니다. 귀족 아가씨와 하녀라는 소재에서 직관적으로 떠오를 법한 우아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지요.

- 막판에 나오는 조진웅과 하정우의 독대 장면은 제가 본 한국 영화 한정 최악의 씬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뭔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지..아예 편집해버려도 무방하다 싶네요.

- 일제시대 설정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원작이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를 한국으로 번안하기에 적당한 배경이 일제시대 밖에 없기 때문일 뿐이죠. 내지인과 조선인 간의 계층 차이, 하층민의 신분상승욕 등 활용할 법한 소재들이 제법 있는데 모두 쓰이지 않고 장식으로만 존재합니다. 원작에서 슬몃 비춘 왕자와 거지 같은 구석도 재미있게 잘 활용해볼 법한 소재인데, <아가씨>에서는 결과적으로 스쳐가는 농담처럼 소모된 꼴이죠.

- 배경이 되는 공간인 저택 브라이어는 원작에서 공간적 폐쇄감을 강조하는 기능을 합니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종이 울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등장 인물들을 죄어오죠. 하지만 <아가씨>의 저택에는 그런 공간감, 공간이 인물을 장악해나가는 양상이 드러날 때의 불안과 야릇함 같은 것이 없습니다(사실 원작에서도 이와 같은 배경의 존재감 어필이 부족한 감이 드는데, 그조차 <아가씨>에서는 대부분 휘발되어버렸죠.)

- 심지어 레즈비언 설정도 필연성은 없습니다. 그저 소잿거리 눈요깃거리일 뿐...GL에 대해 던질 수 있는 수많은 질문 중 어떤 것도 던지지 않죠.

- 원작도 사실 대단한 작품이라 할 수는 없고, 평이한 스릴러물입니다. 그것의 열화판이 BBC에서 만든 TV용 영화판이고, 그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 <아가씨>죠.

- 원작과 마찬가지로 <아가씨>에서도 아가씨는 강압에 의해 도색 서적을 낭독하며 뭇 신사들의 추잡한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 도색지 낭독이 이 영화의 본질을 가장 적나라하게 말해주지 않나 싶군요. 무슨 배짱으로 이거 들고 깐에 간 건지..러닝타임 2시간 24분을 들여서 한 이야기라고는 알맹이 없는 개드립의 향연 뿐이고.

- 밀도 깊은 연정의 교감을 드러내는 로맨스를 기대하셨다면 그냥 <캐롤> 두 번 보시고, 강도 높은 육체의 뒤얽힘을 기대하셨다면 그냥 <따뜻한 색 블루> 두 번 보시길(강도의 격렬함을 볼 때 아름다운 성애라기보다는 산소 부채를 발생시키는 피트니스 트레이닝에 가까워보이지만...). 킬링타임 눈요깃거리를 원하신다면...차라리 불건전한 야구동영상이 나을 듯요.
알모도바르 영화니 뭐니 좋은 게 널린 것이 세상입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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