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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6/21 15:59:30
Name   수박이두통에게보린
Subject   [회고록] 우수에 젖어있던 너의 슬픈 눈망울.
여느 날과 다를 것이 없던 날이었다. 그럴 수 밖에. 군대라는 조직 안에 있으면 항상 쳇바퀴 굴러가듯 모든 일이 덧없이 돌아간다. 달짝지근한 근취를 하고 나서 주섬주섬 군복을 입었다. 미지근하다. 습하다. 한 여름 새벽날의 날씨였다. 당시 내가 있었던 곳은 XXX. 2~3달 간격으로 배속 지원을 나가며 경계 업무를 한다. 게다가 이곳은 1주 새벽근무, 1주 평일근무가 연속된다. 짜증난다. 왜 내가 파견을 간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하며 운전병을 불렀다.

"운전병이야, 오늘도 활기차게 순찰 가자."

"일병, 운전병. 넵!!"

운전병이는 언제나 활기차다. 그럴 수 밖에. 나와 함께 있으면 군대에서는 살 수 없는 싸제 담배를 필 수 있기 때문이다. 순찰 가기 전 사이 좋게 담배 한 대를 피웠다. 그리고 탑승. 붕붕붕. 꽃 향기를 맡으면 힘이 솓는 꼬마 자동차는 개뿔. 털털턹턱턱러털털. 군용 디젤의 매연을 내뿜는 레토나가 안쓰럽다. 섹터1. 이상이 없다. 섹터2. 이상이 없다. 섹터3. 이상이 없...끼이이이익 쾅!!

차가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충격이 느껴졌다. 뭐지. 인명사고가 일어난 것일까. 선탑했던 나의 등줄기에 한줄기 식은 땀이 느껴진다. 차에서 내렸다. 무언가가 바들바들 떨고 있다. 라이트를 비췄다. 아, 나의 라이트는 LED였다. 고효율의 밝은 LED. 주변이 환하게 밝아진다. 역시 LED다. 앗차,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사고가 난 것이 무엇인지 빨리 확인을 해야 한다.

고라니.

"휴"

고라니였다. 엄청나게 큰 고라니. 고라니가 이렇게도 클 수가 있단 말인가. 고라니는 기껏해봐야 담비 정도 밖에 안될 줄 알았는데. 카리스마대빵큰고라니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녀석의 눈망울이 너무나 아름답다. 우수에 젖어있는 것처럼 초롱초롱하고 슬픈 눈망울. 그런 눈망울은 일단 제쳐두고 차에 치인게 고라니여서 안도의 한 숨이 나온다. 그런데 운전병이가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다. 어째서지. 고라니인데. 이렇게 큰 고라니를 처음 본 것이 분명하다. 카리스마대빵큰고라니에게 기가 눌린 것 같다.

"운전병이야, 다행스럽게도 고라니란다. 담배 한 대 피우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하자."

아아, 친절한 나. 카리스마대빵큰고라니에게는 부족하지만 나 역시 카리스마가 있다. 그러나 녀석은 담배를 피우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지. 나의 카리스마가 통하지 않는 것일까.

"운전병이야, 담배 피워. 별 일 아냐."

평소처럼 인화하고 부드럽고 배려심 많은 침착둥이다운 모습으로 말했다.

"저..조..조뗏..아니, 영창 갈 것 같습니다."

녀석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영창이라니. 고라니를 치었다고 영창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그리고 고라니는 유해동물이 아니었던가. 설마 군인은 유해동물보다 못한 존재란 말인가. 이유를 물었다.

"수..수송관이 차 부시면 영창 보내고 주..죽여버린다고 했습니다.."

피식.

녀석, 수송관이를 두려워하는구나. 그럴만도 하지. 녀석을 달래주었다.

"걱정마, 일단 순찰 다 돌고 본부로 가서 중대장에게 보고하자."

그렇게 섹터3을 떠났다. 고라니는 계속 그 자리에 누워있다. 죽은 것인가. 잘 모르겠다. 일단 순찰을 마치고 중대장에게 갔다.

"경례, 중대장님, 순찰 마쳤습니다. 순찰간 특이사항 있었습니다."

"뭐?"

중대장이의 눈빛이 잠시 흔들린다. 순찰간 특이사항이 있었다라고 하니 그럴 수 밖에.

"특이사항이 뭔데?"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 리지가 이런 사투리를 내 앞에서 쓴다면 사랑해 마지못할 것 같지만, 중대장은 리지가 아니다.

"네, 고라니를 치었습니다. 대빵큰카리스마고라니였습니다. 눈망울은 아름다웠습니다."

"죽었냐?"

"미처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피식.'

중대장이가 가벼운 웃음을 짓는다.

"가보자."

본부에서 나왔다. 중대장이와 운전병이가 눈이 마주쳤다. 운전병이는 아직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경례를 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녀석.

"야, 고라니 있는 곳으로 운전해."

붕붕붕. 군용 레토나가 다시금 디젤 매연을 내뿜으며 힘겹게 산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현장. 중대장이 먼저 내렸다. 아니? 그런데 중대장의 LED가 내 것보다 밝다. 그리고 더 광범위하다. 녀석..얼마나 좋은 LED를 산 것일까. 그리고 중대장이 말했다.

"없는데?"

순간 나와 운전병이는 당황했다.

"네?"

"자모씀다?"

"없다고. 고라니."

중대장이의 것보다는 밝지 않고 좁은 범위를 비출 수 있는 나의 LED를 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없다. 정말 없다. 그 고라니가 없다. 분명 아까 차에 치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는데. 어디 갔지, 고라니. 고라니, 고라니. 너의 이름을 크게 불러본다. 운전병이는 내 옆에서 있으나 마나 한 군용 후레쉬를 비추고 있다. 녀석..

"야, 일반 고라니도 아니고 카리스마대빵큰고라니면 군용차에 치인 정도로는 안 죽어. 괜히 왔네. 돌아가자."

중대장이는 그렇게 다시 차에 탔다. 운전병이가 조심스럽게 중대장이에게 물었다.

"주..중대장님, 저 영창 갑니까?"

"푸휄훼헤후휄휄휄휄"

함박 웃는 중대장.

"야, 걱정마. 차 찌그러진건 내일 보급관한테 말해서 제대로 피라고 이야기할게. 오늘은 피곤할텐데 일찍 자라."

그 말을 듣고 운전병이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감사합니다, 중대장님. 감사합니다, 중대장님."

중대장이를 본부에 내려두고 난 다시 소초로 향했다. 그리도 이어진 담배타임. 운전병이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밝다. 그렇게 순찰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 쒯. 남들 일어나기 1시간 30분 전에 잠에 들어야 하는 이유는 뭐냐. 그리고 10시부터 다시 근무를 하는건 뭐냐. 오, 쒜..쿨쿨쿨. 단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운전병이는 영웅이 되어있었다.

군대에 있을 때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허세를 뽐내기 마련이다. 녀석은 '고라니를 쳤고 그 고라니를 ~!@$%^&* 수습했다.' 라는 있지도 않은 허세 가득한 영웅담을 다른 병사들에게 이야기한 모양이다.

'피식'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다음 날 수송관이가 왔다. 그 영웅담은 어느새 파견지에서 대대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아마도 짬에서 밀린 보급관이 수송관에게 말한 모양이다. 수송관이 손에는 군대에서 가장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음료수인 비타500이 들려있었다. 나와 수송관이와 운전병이의 티&담배 타임. 수송관이는 운전병이에게 웃으며 말했다.

"넌 복귀하고 휴가 갈 생각 말아라. ^^"

가만히 있었더라면 중대장이가 충분히 커버를 쳤을텐데. 역시 입이 방정이다. 순간 운전병이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아아, 이 눈은 마치 카리스마대빵큰고라니의 눈망울이구나. 녀석은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인다. 고라니의 눈망울을 가진 운전병이. 그런데, 그 고라니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만일 그게 고라니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차로 친 것은 대체 무엇일까. 우수에 젖어있던 고라니의 눈망울. 휴가가 짤린 운전병이의 슬픈 눈망울. 그 눈망울은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94%의 진실과 6%의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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