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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2/15 00:11:49
Name   nickyo
Subject   17171771 - 1
몇 년 전에 썼던 글입니다. 아마 보신 분도 몇 있으실듯.. 총 3 부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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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쯤으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2학년때였나.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시기는 참 애매하면서도, 청춘의 한 가운데에 서 있다는 느낌이었다. 무언가를 하기에는 조금 늦은 것 같고, 무언가를 안하기에는 시간이 아쉬운. 어른은 아니고, 입시전쟁에 들어설 각오도 덜하지만 더 이상 소년도 어른도 아닌 청소년만의 멜랑꼴리함. 내 고교생활 2학년은 그렇게 약간은 폼을 잡고, 조금은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굴고 싶었던 시기였다. 본격적으로 음악도 하고싶고, 친구들과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장에서 매일같이 축구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내 감정에게 만큼은 어른인 척 쿨해지는- 이제는 더 이상 가벼운 시비에도 주먹이 나가기 전에 웃음부터 지으려 하는. 그런 어른스러움을 흉내냈었던 것 같다.


그 애를 처음 만난건 고1때였다.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 아니, 소녀라고 보기에는 봉긋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줄이지 않은 치마의 단아함과 흰색 블라우스의 교복. 앳된 얼굴과 다 커버린 맵시가 더 매력적이었던 아이. 소녀와 아가씨 사이에 서 있던 그녀는 지금 생각하면 '청소년'이 갖는 앳된 처녀의 매력이 굉장히 빛났던 것 같다. 이 나이에 표현하자면 그 매력은 아마 배덕감 같은 것으로 이야기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나는 순수했으니까 그저 봄 빛 기운 살랑이는 여학생이 매력적이었다고만 하자. 어쨌거나 우리가 만나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그 애는 방과 후 음악실에서 노래연습을 하고 있었고, 나는 판치기-교과서에 동전을 올리고 손바닥으로 쳐서 뒤집는 도박놀이-를 한 벌로 음악실 앞 청소를 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학교는 남녀의 건물이 나뉘어있었지만 몇 가지는 공용으로 썼었는데, 그게 바로 음악실과 강당, 도서관이었다.


이어폰을 꽂고 노래연습에 한창인 그 아이의 노래실력은 솔직히 엄청 웃겼다. 특히 고음부에서 찢어지는 목소리에 빵 터질 뻔 했지만 겨우 웃음을 참아가며 복도를 청소했다. 그 애는 그때까지만 해도 내 존재를 몰랐지만, 난 음악실 안도 청소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실문을 열었다. 그 순간에 우리가 마주친 눈빛 사이로 흐르는 어색함은 이루 말할수가없다. 클라이막스에서 얼굴을 잔뜩 찡그린채 목청을 높이는 아이와, 생전 처음보는 한 험상궂은 남학생의 등장. 그 애는 입이 벌어진 채로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제가 청소당번이어서요' 라고 겨우겨우 웃음을 참으며 말하고 성큼성큼 빗자루를 들고 들어갔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 이 때 말아올려진 입꼬리를 들키지 않고 태연함을 잘 가장했다고 뿌듯해 했던것 같다. 물론, 그걸 모를 리 없었겠지만.


"어..언제부터.."


그 애는 그러고는 내가 무어라 대답도 하기전에 인사도 하지않고 낼름 도망가 버렸다. 사실 놀란것은 나였다. 그렇게 노래를 못하는 애가 생각보다 예..예쁘다.... 남중 남고를 보내는 내게 있어서 예쁜 여학생이랑은 인연이 없었던 만큼 굉장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고 2,  무언가 시작하기엔 늦은 듯 하지만 설레임이 조금 덜 수줍어지는 그런 나이. 나는 그 애의 단발머리 옆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볼이 또 보고 싶었다. 그날은 어쩐지 넓은 음악실 청소가 슥삭슥삭 쉽게만 느껴졌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누구에게 떠들지도 못한 채 아쉬움만 달래던 일상속에서 재회의 계기는 우연찮게도 금방 찾아왔는데, 그건 정말 예상치도 못한 곳이었다. 나는 그 당시 록 밴드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새롭게 여 후배 보컬 하나를 구했다고 한 것이다. 나는 밴드에는 소속되어있지 않았지만 으레 보컬이 빠지면 땜빵연습을 도와주는 식으로 그들과 어울리는 친구였기에 다음에 새 보컬 소개도 받을 겸 합주실에 한번 놀러가겠노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당연히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며칠 뒤에 합주실에서 본 아이는 그때 그 단발머리 소녀였다.


"아!!!!!!!!!"


손가락으로 대뜸 그녀를 가리키며 어안이 벙벙해진 나였지만, 그녀는 날 못알아보는 듯 했다. 꾸벅 인사를 하기에 어...어..네. 하고 얼떨떨한 인사를 받았다. 보컬..보컬이라며 왜 쟤가 여기...??? 당황스러운 그 순간, 우연이 두 번 겹치면 운명이 아닐까 하고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말했다 시피 10대 후반의 고교시절은 이런것들에 쿨하고 싶어하는 법이라 금세 머리속에서 그런 동화같은 로맨스를 지워버렸다.



친구들은 날 앉혀두고, 그 여자애와 함께 몇 곡을 연습할건데 내게 좀 봐달라고 했다. 당시 나는 딱히 엄청 우월하게 노래를 잘하거나 그런건 아니었지만 친구들의 단점만큼은 기가막히게 딱딱 찝어내곤해서, 친구들이 종종 그렇게 부탁을 하고는 했다. 평소라면 흔쾌히 형님이 또 코치해줘야겠냐며 거들먹거렸겠지만.. 으아..  그때는 합주실 입구에서 합주실까지 내려가는 길이 굉장히 멀게 느껴졌던 것 같다. 다시 만난것도 너무 좋고, 긴장도 되는데 '어떻게 쟤가 틀린걸 지적하라는거야..' 우연이 조금 짖궂다고 느꼈다. 그치만 솔직히 만남이 없는 것 보단 그렇게 엮일 수 있다는데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은 대체로 자우림의 노래를 커버했다. 여자애들이 커버하기에 난이도가 크게 높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래도 그 애에게는 좀 힘든게 사실이었다. 속으로 '대체 어떤 정신나간게 쟤를 보컬로 쓰려고 데려온걸까'싶었지만, 취미밴드니까 뭐.. 예쁘니까 뭐.. 하면서 그 애가 열심히 노래하는걸 가만 지켜봤다. 다 듣고나서 그래도 지적할건 해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떼려던 찰나 그 아이는 '처음 뵙는 선배가 있으셔서 너무 긴장했어요......'하고 수줍게 얼굴을 가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는데 아..너무 예뻤다. 도저히 지적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역시 나도 쿨해봐야 혈기왕성한 남학생일 뿐.. 하며 괜시리 드럼을 치는 친구에게 '넌 박자가 그게 뭐냐'고 핀잔을 주고 다시 한번 가자고 했다.



결국 내가 첫 연습때 그 신입 여 후배에게 한 말은 안녕, 잘가. 그리고 '괜찮네' 였다. 괜찮네라니. 양심은 대체 어디다 팔아먹은걸까? 그치만 로맨스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 꼭 나쁜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거기서 일일히 그거 지적한다고 노래가 바로 느는것도 아니고 말이다. 좋은게 좋은거지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연습이 끝난 뒤 그 애를 바래다 주고 집이 같은 방향이라 함께가던 베이스 친구는 빠른 눈치를 자랑하며 내 엉덩이를 퍽 차고는, '홀렸냐 새끼야' 라며 웃었다.나는 아니라고는 했지만, 어..음. 그래. 솔직히 너무 잘보이고 싶은 맘이 가득했다. 다음 연습은 언제냐고 물었더니 베이스를 맡는 친구가 실실 웃으며 '기타치는 친구가 데려온 여자애니까 걔한테 물어봐, 야~ 이거 친구끼리 의 상하는거 아니냐?'라며 놀려대었다. 끝까지 아니라며, 걔 완전 얼굴 애같고 별로라고 투덜대긴했지만 맘 한구석에서는 다음에 볼 날이 기다려지기만 한, 그런 날이었다.


나는 명목상 정식 밴드멤버가 아니었기에 그들의 연습에 매번 얼굴을 비칠 수는 없었다. 가끔 놀러갔을 때에는 오늘은 남자곡 연습인데? 하는 베이스의 옅은 비웃음을 맞이해야 했는데, 그도 그럴것이 양 손에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가득 사간 채 연습실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상황을 잘 모르던 남자보컬은 베이스가 꾸며낸 '삼각관계'이야기를 들었고, 함께 그 이야기를 들은 기타를 치던 녀석이 사뭇 굳은 표정을 하고서는 억지로 웃으며 '너 걔한테 관심있었냐?'라고 물었다.제딴에는 넌지시 묻는다고 던진 이야기지만 그 애의 표정이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하는 표정이었기에, 손사래를 치며 '미쳤냐~'고 둘러대었다. 보컬친구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옆에서 얄밉게 '뭐 어때~ 뭐 어때~'하고 추임새를 넣었고, 베이스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낄낄 대며 계속 웃었다. 약이 오른 나는 그 친구의 귀에 마이크를 대고 '그만 쳐웃어!'라고 소리질러 주었다. 귀를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대는 놈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학기가 지나고 방학을 맞이할 때 까지 그 아이와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때때로 음악실이나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그 아이의 그림자를 쫒아 두리번 대었지만 단 한번도 스치지조차 못하였다. 그렇게 조금씩 그 아이의 얼굴이나 표정이 머리속에서 희미해져 갈 무렵, 드럼을 치던 친구가 낙원상가에 같이 좀 가줄 수 있냐고 하였다. 자기 스틱도 새로 사고, 그 여자아이가 레코딩용 마이크를 사고 싶어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일종의 연습용 서브 보컬이기도 해서, 홈 레코딩이나 마이크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있었는데 드럼인 친구가 ' 단 둘이 가는건 영 어색하다'며 나를 끌어들인 것이다. 원래는 정식 보컬인 친구와 함께 가려고 했으나, '귀찮아서 싫다'고 퇴짜를 맞았다나. 나는 한동안 그 여자아이를 못 봤기에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자 찬스였다. 그치만 내심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학원도 안다니는 주제에 '방학에 워낙 바빠서.. 일단 시간을 좀 보고..뭐.. 안될건 없을거 같은데..'하며 쪼다마냥 우물대었다. 당연히, 드럼 친구가 약속으로 잡은 날은 어떠한 일정도 없는 올 프리 데이였다.



여름은 좋은 계절이다. 옷이 얇다. 열혈남아에게 여름이란 즐거움과 행복이다. 지나는 사람들을 보며 그 아이가 빨리 오길 바라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싱글벙글 하고 있자 스니커에 청바지, 반팔을 입고 간 자리에 하늘하늘한 얇은 원피스 한장을 입은 그 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는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하고는 으레 어색한 사이의 인사를 나누었다. 해가 아직 뜨거워지기 전인 오전 열시였는데, 우리는 인사 이후에 마땅히 할 이야기가 없어 서로 핸드폰만 만지작 대고 있었다. 드럼친구가 왜 안오지 안오지 하며 초조하게 오분쯤 시간을 보내자, '스틱은 인터넷이 더 싸네 그냥 둘이 갔다와라'  라는 문자 한 통이 띠링, 하고 날아왔다. 그야말로 드럼스틱으로 치라는 드럼은 안치고 내 뒤통수를 친 것이다. '한여름에 흘리는 식은땀'을 처음으로 느끼면서, 나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후배를 쳐다봤다. 그 후배는 약간 더운 날씨에 뾰루퉁해져 있었는데 그게 또 한 귀여움했다. 한 십여초를 머리속에서 긴장하지 말자고 중얼대면서, '드..드럼치는 친구가 혹시 문자했니? 오늘 못 온다고 나한테 방금 그러는데 어..어떡할래?' 라고 그 애에게 말을 걸었다. 한심하게도, 첫 마디의 목소리가 떨린걸 분명히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 진짜요? 아 대박..뭐야..."



그 친구는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핸드폰으로 드럼을 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듯 했다. 그러나 금세, '전원이 꺼졌대요..대박..'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정말, 정말 셋이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마치 상황이 '꾸며낸 듯이' 보여서 등줄기의 식은땀만 두배로 늘었다. 남중, 남고를 다니는 내게 이 시련은 중1때 디아블로 2를 하며 12레벨로 노멀 안다리엘을 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 시절이 떠오르기에 충분한, 그런 어려움이었다. 음 그래. 별로 어렵지 않고 즐거웠다는 이야기이다. 긴장감 있고, 스릴 있고. 그리고 어렵지만 매우 즐거움이 기대되는 시간 말이다.



"그럼 다음에 갈까?"



제발 그냥 같이 가자 하는 마음의 소리를 잠시 접어두고 체면치레 즈음으로 어렵사리 꺼낸 말에, 후배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그냥 둘이 가요. 다음에는 시간이 안맞을 수도 있고.. 마이크도 빨리 사고싶구..' 라고 말하였다. 오 신이시여. 아이 러브 유! 첫 단추가 잘 끼워졌다는 생각에 나는 기쁨 반 당황스러움 반으로 그 아이와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그 당시 내 핸드폰은 아이스크림폰이었는데, 나는 네이트 버튼을 누르고 틈틈이 '여자애와 대화하는 법'을 검색하고 있었다. 당연히, 제대로 된 게 나올리가 없었다. 우리는 '날씨가 참 덥다 그지?' 같은 말을 하며 낙원상가로의 길을 재촉했다. 차라리 백명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게 편할 거야. 라고 생각했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하철이 텅텅 비어있길래 그 아이보고 앉으라고 하고 난 서서가려고 했더니, 뭐해요? 옆에 앉으세요. 라고 묻는말에 차마 '아냐 서있을께'라고 말을 할 수 없어서 '어..어 그래 응'하고는 앉았다. 다행히 정면을 보는 것 보다 훨씬 나았는데, 낙원상가가 있는 인사동까지는 지하철로 한 30분을 가야했어서 이대로 말 없이 계속 있을수는 없었다. 나는 넌지시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고, 다행히 이건 정답이었다. 우리는 10분만에 자우림과 윤도현밴드에 대해 열띤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 애를 보면 자꾸 약간 파인 원피스의 가슴부분이 눈에 들어와 3초를 채 마주보지 못했다. 지금이라면야 그게 파였다고 보기도 민망했을텐데, 그때는 그 애가 가진 '살색'자체가 너무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음악얘기에 신이 난 덕에 내릴 때 쯤이 되서는 다행히 그 아이와 꽤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 날 나는 윤도현 밴드 앨범을 꼭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감사합니다 YB 롹앤롤 예! 라고, 혼자 머리속으로 감사함을 외쳤다. 여자아이의 툭툭 부딪히는 팔이 그렇게 야들거리는 거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낙원상가에서 그녀에게 간단히 마이크와 컴퓨터 선을 골라주었는데, 그 아이는 계속 이것 저것 물어보며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물어보았다. 나도 원래는 보컬쪽에 관심이 있어서 그렇다 라고 하자, '그럼 왜 같이 안하세요?'라고 물어왔다. 당시 밴드 메인보컬인 친구는 나와 초중을 같이 나왔는데, 그 애가 노래를 잘 한다는걸 고 1때 알고는 지기 싫어서 노래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 밴드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던가, 이런걸 구구절절이 이야기 하자니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임기응변으로 '난 노래를 진짜 못해. 좋아하기만 하지' 하고 웃어넘겼다. 그 아이는 굉장히 아쉬워 하며 진심으로 내게 '연습하면 잘 할 수 있어요!'하고 응원하였다. 이 친구야, 너도 연습이 많이 필요하겠더라. 하고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돌아가는 길에는 집에서 레코딩 할때의 주의사항이나 쿨 에디트 같은 레코딩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고, 반주 MR같은건 어디서 구하냐는 등의 이야기도 했다. 헤어지기 직전에 용기를 내어 '궁금한게 있으면 물어보기도 하고 MR같은것도 보내줄 수 있게 연락처를 교환하자' 라고 최대한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고. 그 후배는 아침과는 다르게 굉장히 살가운 느낌으로 흔쾌히 번호를 주었다. 떨리는 손이 들킬까 무서워 팔에 쥐가 나도록 힘을 주었다. 지하철에 내려서 그 아이 아파트 단지앞까지 데려다 준 뒤, 헤죽헤죽 웃음이 비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집까지 한달음에 뛰어왔다. 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만큼 설레임이 가득했다. 집에 돌아와 핸드폰을 열자,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 '마이크 연결은 했는데 인식을 못해요. 어떻게 하면 되요?'



그 문자를 본 순간 머리속을 강타한 것은 그 애의 집에 갈 일이 생긴건가?! 하는 것이었다. 만화를 너무 봤어.. 하지만.. 이건 현실이지! 하고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여.. 여학생의 집에 생..생면부지의 내가 놀러..놀러 간다고? 아니 생면부지는 아니지만.. 어 어쨌거나 친구는 아니고.. 선배..선배지. 선배와 후배. 십대, 청춘예찬. 남 녀 단 둘이 한 지붕 아래 어색하게 마주앉아... 같은 망상들이 3초정도 머리속에 빨리감기로 지나갔다.



그 뒤로는 상당한 고뇌의 시간이었다. 만화마냥 왼쪽 귓가에서는 '얼른 가서 해준다고 해!'하는 소리가, 오른쪽에서는 '문자로 그냥 알려주는게 나아!'라는 소리가 들렸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헤집었는데, 전화를 하자니 긴장되고 문자로 설명하자니 좀 찌질해보였지만 집에..집에 찾아간다는건 정말 너무 과감한 선택지였다. 나는 여자의 방에 가 본거라곤 초등학교 2학년때 친구집에 숙제하러 간 때 이후로 처음인 일이라, 갈등을 도무지 쉬이 해결할 수가 없었다. 문자를 쓰고 지우기를 몇 번을 반복했을까, 결국 '마이크 인식방법' 과 '잘 안되면 내가 지금 가서 해줄까? 나 아직 집에 안오고 잠깐 어디 들렸거든 나온김에 블라블라'를 한꺼번에 쓴 장문의 mms가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핸드폰 화면에 '아! 이제 되네요.' 라는 답장이 떴다. 맥이 탁 풀리면서도 뭔가 엄청 아쉽고 속도 쓰리고 그런데 또 마음은 편안하고.. 일종의 멘붕상태를 겪었다. '아.. 응 이제 문자를 봤네 미안' 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이제 보긴 개뿔..




그 후로 우리는 종종 문자를 주고 받았다. '뭐해?'같이 친한사이의 문자는 도저히 할 수 없어서, 정말 가끔 미친듯이 좋은 음악을 찾아서 그 애에게 소개해주고는 했다. 진짜 팔자에도 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유일하게 그 애에게 쉬이 말을 걸 수 있는 기회였다. 그 아이는 당시 J-pop에 가까운 일본 락 그룹들 곡과 한국 인디씬 곡들을 좋아하고 있었기에 각종 곡들에 대해 추천하고 이야기하며 조금씩 친해져갔다. 나는 그 애와의 대화창구 유지를 위해 일본어까지 공부해가며 각종 j-pop을 섭렵했었다. 친해진 김에 조금 더 뻔뻔해 지고자 밴드 연습도 매일 '여름방학에 할게 없다' 는 핑계로 끝날때쯤 찾아가 뒷풀이에만 참석했다.그도 그럴게, 일찍 찾아가면 또 뭔가 봐주고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도저히 그 애 앞에서 노래가 어떻고 하며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전히 따로 어디서 만나자는 이야기는 도저히 꺼내지 못한 채, 우린 뙤약같은 태양을 뒤로하고 겨드랑이를 기분좋게 간질이는 바람과 함께 가을을 맞이했다.



사람이 같이 밥을 먹으면 친해진다고 한다. 수번의 연습 후 뒷풀이를 지나며 그 애는 '선배'에서 '오빠'로 칭호를 바꾸었고. 나는 '저기' 대신에 그 아이의 이름 뒷 글자를 따서 '정아' 라고 불렀다. 정아- 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닭살이 돋는 것 같았기에 쩡! 쩡! 하면서 스스럼없이 그 애를 부를 수 있을때의 기분은 최고였다. 가끔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지나가다가도 쩡! 이라고 부르면 환하게 손을 휙휙 흔들어주는 모습은 정말이지 수업으로 지친 마음을 한번에 씻어주는 청량음료 같았다. 재밌는 건, 당시 기타를 치던 친구도 쩡이에게 마음이 가득했지만, 나와 서로 눈치만 보느라 누구도 쉬이 들이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때까지도 바보같이 자신의 감정을 속이며 '좋아하는 정도는 아니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들에게 '여자로 보는거 아니라니까~'라는 식으로 떠들어 놓은 것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씩 가까워지며 설레임도 더해가는 것을 그저 '우정'이라고 속이려 했던 난, 기타치는 친구가 조금이라도 그 애와 가까워 지는 것을 보면 도저히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울컥, 하고 울화가 치밀어 괜스레 말이 줄고 자리를 뜨고는 했다. 기타를 치던 친구는 그 애대로 밴드내에서 들이댄다는게 눈치가 보였는지 주변을 맴돌기만 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미련한 곰퉁이 둘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어느새 바람이 점점 차가워 지는 가을의 끝 무렵, 연말 공연을 위해 열심히 연습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메인 보컬이 학교 성적이 위험하다며 잠시 연습을 빠져나갔던 기간이 있었다. 결국 그 땜빵은 내가 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나는 듀엣곡에는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쩡이와 연습이 겹칠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같이 연습을 하게되면 어쩔 수 없이 예전에 다 하지 못한 채 슬쩍 넘어갔던, 노래를 하게 된 이야기를 해야했는데 그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밴드 친구들에게는 그냥 '어차피 공연은 나랑 안하니까 듀엣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말을 둘러대며 빠졌지만 눈치 빠른 베이스는 '수줍어하는거봐 크크크크크크'하고 매번 놀리며 복장을 뒤집어 놓고는 했다. 그런 연습날에는 난 베이스 치는 친구만 아주 집요하게 '박자를 못맞춘다' '현 잘못 퉁겼다' '느낌이 안산다' 같은 식으로 지구 내핵까지 그 친구의 연주를 까고는 했지만 그 애는 태평스럽게 '그래?'하고는 곧잘 연주를 해서 더욱 속이 뒤집혔던 것 같다.



남자 솔로 곡 연습을 꾸준히 나가던 어느날, 쩡이는 '왁! 기습이다!'라며 간식거리를 사들고 연습실을 찾아왔다. 나는 이태리 석상마냥 쩌정, 하고 굳었다. 신경쓰지 말고 연습을 하라며 동당대는 쩡이를 보니 갑자기 목이 확 탔다. 처음 몇 번은 아예 첫 음을 놓쳐서, 친구들이 엄청 핀잔을 주었다. 특히 기타치는 친구는 평소에는 별 말도 안하면서 그날 만큼은 엄청 쏘아대었다. 진땀을 흘리는 날 보며 쩡이는 순진하게 '오빠 괜찮아요 천천히 해요'라며 웃어주었다. 결국 몇 번의 실패 끝에 겨우 노래답게 연습이 시작되었고, 한번 음이 붙자 그 뒤로는 다행히 꽤 자연스럽게 노래를 할 수 있었다. 마디를 넘어가며 점점 익숙한 감각이 들었기 때문에, 절이 넘어가고 나서는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속으로 으쓱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노래를 못 한다고 했던 거짓말은 기억도 하지 못하고 쩡이에게 잘 보였다는 생각에 말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쩡이는 연습이 진행될수록 점점 표정이 안좋아졌다. 합주실 대여시간이 끝나 연습실을 나설때 쯤 되서는 아예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드럼이나 기타, 베이스랑 이야기를 하며 자주 가던 음식점으로 향했다. 나는 내가 뭘 잘못한걸까, 옷이 이상했나, 어디 밥풀이 묻었나, 양치질은 했나, 남대문은 잠겨있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졸졸 뒤를 따랐다. 쩡이의 반응 하나에 내가 더 초라해 지면서도, 그게 더 화가나고 기분이 상했다. 식사자리에서도 쩡이는 여전히 나를 '없는'것 처럼 취급하는 듯 했는데, 처음에는 왜 그러나 싶던 것이 나중에는 나 또한 점점 풀이죽고 기분이 싸하게 식어갔다. 결국 집에 가는 길에 '쩡이네 아파트 앞까지 가자'는 친구들의 말에 '일 있어서 간다'며 집으로 혼자 털래털래 돌아갔다.




다음날 쩡이에게서 문자 한통이 왔다. 방과후에 잠깐 도서관에서 보자고 말이다. 나는 어제 갑자기 싸해진 쩡이가 먼저 연락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자고 얼른 답장을 보냈다. 나로서도 쩡이와 사이가 멀어지는건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 수업이 하루종일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학교가 끝나는게 이토록 멀었던 날도 없었던 것 같다. 기다리던 수업 종료의 종소리가 울리고 종례가 끝난 뒤 헐레벌떡 뛰어간 도서관에는 쩡이가 앉아서 잡지를 읽고 있었다. 조심스레 뒤에서 어깨를 톡 치자 쩡이는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까닥 하고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왔네요. 저랑 얘기좀 해요.'라며 딱딱한 말투로 날 도서관 옆의 벤치에 데리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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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솔직한 묘사들이 문장 문장마다 주말에 돌아가는 청소기처럼 굉장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 하나 읽다보면 어느새 빨려 들어가서는 진한 향수병을 불러 일으키네요. 다른것 같지만 참 비슷한 각자의 첫사랑은 언제나 재미있고 조금씩은 아린것 같아요. 다시 읽어도 지루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도 다시 읽고 싶은 그런 글이었습니다. 비록 조금 아린다고 할지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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