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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7/15 07:51:51
Name   뤼야
Subject   [리뷰]하울의 움직이는 성 - 남녀의 공포와 동반성장


예술가는 아름다운 것의 창조자이다.
예술은 드러내고, 예술가는 감추는 것이 예술의 목표이다.
비평가란 아름다운 것에서 받은 인상을 별개의 양식이나, 새로운 소재로 바꾸어 놓는 자를 말한다.
비평의 최고인 동시에 최하의 형태는 자서전 형식이 아닐 수 없다.

아름다운 것에서 추악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형편없는 타락자이며, 그것은 잘못된 행위이다.
아름다운 것에서 아름다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교양인이며, 그러한 인물에게는 가능성이 있다.
아름다운 것을 그저 '아름답다'라는 의미로만 받아들이는 자는 선택된 인물이다.

-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서문 중에서 -

영화관에 가서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대부분의 상영관에서는 광고가 방영됩니다. 돈내고 영화를 보러 갔는데 왜 그따위 시시껄렁한 광고를 강제적으로 봐야하는지 짜증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만, 얼마전에 재밌는 광고를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자동차보험 광고였는데, 잘 차려입은 청년이 좋은 차에 아름다운 연인을 옆에 태우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차를 후진시키기 시작합니다. 주차되어있던 차를 막 빼려던 참인데 난데없이 다른 차가 옆구리를 들이받죠. 그때 비로소 깔리는 BGM이 재밌습니다. "Lonely~ I'm Mr. Lonely. I have nobody~"

처량하게 깔리는 BGM을 뒤로 하고, 사고를 수습하려고 내린 남자는 차에 타고 있던 청년이 아닙니다. 성장成裝을 한 어린 사내아이죠. "엄마! 나 이제 어떻게 해?" 남자는 외롭습니다. 잘 차려입고 좋은 차를 타고 애인에게 허세를 부려보지만, 곤란한 지경이 되면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집니다. God bless him! 아마도 이 광고가 짜증을 동반하지 않았던 이유는, 남자의 허세와 그 안에 감춰진 성장에의 공포를 유머러스하게 비틀어 '감추면서도 드러내는' 이중의 목표를 달성한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저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 열광합니다. 수많은 의미가 똘똘 뭉쳐진 원형의 이야기를 창조해내는 천재(오스카 와일드가 이야기하듯, 예술가는 감춘다)와 그리고 그것을 애니메이션이라는 양식으로 재현(다시 오스카 와일드의 입을 빌어, 예술은 드러내는 것)하는 그만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름다운 것'에서 '아름다운 의미'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오스카 와일드의 예언대로, 자동으로 교양인이 됩니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네요?

재미있는 것을 재미있다고 말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교양인이 된다는 데, 작품을 두고 뭔가 거대한 말을 한번 보태려 시도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꼭 비평이라는 칼날을 대어서 자신의 밑천이 두둑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비평가들이 너무나 많죠. 비평가의 업이 천박함을 말한 사람은 오스카 와일드 뿐만이 아닙니다. 진정한 비평이란 정말 자신의 밑천이 창조자보다 두둑해서 비평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많은 의미와, 상징을 끌어내도록 하고 더불어 다른 작품을 더 정교한 안목으로 볼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하죠.

제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영화관에서 본 자동차 광고를 떠올린 것은 이 작품이 성장에 대한 남자의 근원적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영리하게도 여자의 근원적인 공포도 함께 대비시키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받지 못함'이죠. 소피는 자신이 '한번도 예뻐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예감하고 경제적 자립의 길(모자만들기)을 모색합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천부적인 마법사 하울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그는 황무지 마녀의 저주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방에 온갖 주술이 걸린 물건으로 장식하고 자신의 나약한 내면을 보호하려고 애쓰지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성장의 공포를 간직하기 이전의 하울(화덕의 케루시파로 상징되는)과 성장의 공포가 담긴 하울의 방이 공존하는 기묘한 곳으로, 일반적인 성城과는 다른, 마을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일으키는 기괴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마치 웃자란 듯한 하울의 성의 모습은 뿌리가 튼실하지 못하고,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하울의 내면을 형상화 한 모습이지요. 즉, 하울은 장자長子로 태어나지 못해 자신의 영지를 스스로 개척해야 했던 중세의 말탄 기사를 연상시킵니다.

또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라푼쩰 설화의 외전처럼 읽을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라푼쩰이 마녀에게 저주가 걸리고 갖혔던 성을 하울이 먼저 차지한 셈이 되는 것이죠. 제가 라푼쩰의 성을 '음경의 거푸집'으로 읽었다면(https://redtea.kr/?b=3&n=168), 하울의 성은 그 자체로 주인없는(?) 음경이 되는 셈입니다. 황무지 마녀는 주인없는 음경을 차지하려는 목적으로 볼품없는 외모의 소피를 끌어들이지만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지요.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허세스런 남자(오죽하면 하울의 이름이 howl-육식동물의 수컷이 허세스럽게 우는 모습-이겠습니까!)와 외모는 훌륭하지 않지만  내면이 알찬 여자의 만남이라니, 이런 조합 살면서 한번쯤은 본 적 있지 않으신가요?

보잘것 없는 자신의 외모, 설상가상으로 황무지 마녀의 저주로 젊음마저 빼앗겨 버린 소피는 '날 잡아 잡수...' 하는 심정으로 하울의 성에 들어갑니다. 움직이는 성안에 어지러이 흩어져있는 방과 복도에는 돌보지 못한 먼지와 때가 가득하고, 소피는 성안 곳곳을 청소하기 시작합니다. 성안이 깨끗이 정돈될수록, 이것은 결국 하울을 향한 소피의 사랑인데, 하울은 자신의 근본(케루시파로 상징되는, 성장컴플렉스 이전의 하울)과 가까워지고, 소피는 이 와중에 자신의 컴플렉스를 털어버리고 마법에서 벗어나 젊은 모습의 소피로 돌아가지요.

소피의 용기는 하울에게 전염되고, 하울은 결국 소피를 마법의 저주에서 구해내지요. 아름다운 외모로 신데렐라 되기도 아니고, 진정한 사랑을 위해 일부러 못생겨지는 억지스러운 이야기(슈렉... 미안하다. 재미없다.)도 아닙니다. 못생긴 모습으로 진정한 사랑을 행한 댓가로 아름다워지는(박씨부인전)도 아닙니다.  너나없이 아무 부담없이 즐겨볼 수 있는 판타지 속에 감춰진 모더니티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하울의 성은 사랑에 빠진 두 남녀와 고아 소년, 마법(능력)을 잃어버린 늙은 마녀로 상징되는 경계에 선 인간들의 급진적인 가족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로서의 역할도 합니다. 하울의 성이 어디엔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도는 것은 튼튼히 뿌리내린, 정당한 유산으로서의 일반적인 성城 - 분명 이 성의 주인은 아름다운 여자와 용감한 남자일 터! -에 대비되는 공간의 동화적 은유로 읽히지요. 아름다운 여자와 강한 남자의 이야기는 예로부터 흔하디 흔합니다. 예로부터 흔한 이야기를 비틀어 아름답지 않은 여자와 강하지 못한 남자의 만남을 이렇게나 아기자기하게, 자기만의 스타일로 엮어내다니 참으로 대단하지요.

애인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중 베스트로 [모노노케 히메][바람계곡의 나우시카](다치바나 다카시가 그의 책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꼭 읽어야할 50권의 책중 한권으로 꼽은 만화판)를 꼽습니다. 물론 저도 이 두 작품안에 담겨진 인간과 역사에 대한 하야오의 철학과 통찰이 좋긴 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많이 본 것은 [내 친구 토토로][하울의 움직이는 성]입니다. 이유는? 정말 재미있으니까요.

저도 토토로를 만나서 나무를 하룻밤만에 크게 키우고, 고양이버스를 타고 남모르게 전깃줄타고 돌아다니고 싶습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멤버가 되어 성도 깨끗이 청소하고(저는 특히 소피가 성을 청소하는 장면을 좋아합니다. 보는 내내 속이 다 후련해지거든요.) 케루시파한테 장작을 많이 던져준 다음, 고요한 호숫가 근처에서 하얗게 세탁한 빨래를 바람에 말리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미야자키 하야오는 제게 하울입니다. 작품을 만날때마다 '공중산책'(하울과 소피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시켜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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