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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8/09 02:28:36
Name   그리부예
Subject   <당나귀의 지혜> 독서평(1)
이번에는 조금 더 제 본진(?)이랄 수 있는 책 얘기를 좀 해 보려 합니다. 앤디 메리필드라는 사람이 쓴 책 <당나귀의 지혜>를 소개하려 해요. 적어도 두 번에 나누어서요. 이 책은 제 닉과도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책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어느 커뮤니티에서건 닉네임을 정하기 어려워해서 그냥 그때그때 가까운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을 가져다 쓰곤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게 이 책에서 찾은 이름이었어요. 하지만 언제나와 같은 임시변통의 느낌은 아닙니다. 이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이 책을 읽고 나면 이 이름을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부예, 지금 당장 손을 뻗어 그 이마를 쓰다듬어 보고 싶은 어느 당나귀의 이름. 프랑스어로 ‘빈둥거리다’의 명사형.

앤디 메리필드는 원래 뉴욕에서 도시지리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영국 리버풀 출신의 소년은 뉴욕 생활에 오래 동경을 품고 성장해 마침내 꿈꾸던 삶, 뉴욕 지성인들의 세계에서 주목받는 신성이 되는 데 성공합니다. 앙리 르페브르, 데이비드 하비 같은 거장들의 뒤를 잇는 뛰어난 진보 지식인으로서 주목을 받았지요. 하지만 그는 어느 날 그토록 동경해 왔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란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항상 남을 흉내 내며 살아왔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소음으로 가득한 대도시의 삶이 괴로워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는 유년기의 한 기억에 의지해 당나귀와 함께하는 프랑스 시골 여행을 떠납니다. “그는 내가 실패한 세계, 그래서 떠나기로 한 세계에 맞먹을 만큼 막강해 보였다.”

여러분은 살아 있는 당나귀를 본 적이 있나요? 수굿한 머리에 귀를 날개처럼 펄럭이며 두 눈을 검게 반짝이는 이 동물의 초콜릿 빛 털을 만져본 적은요? 저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모든 문장을 따라 읽는 일은 그리부예라는 이름의 당나귀 옆에서 함께 걸으며 그의 나직한 숨소리를 듣는 것, 그가 투레질 칠 때 가만히 그의 목을 양팔로 감고 안전을 확인시켜 주는 것, 그가 민들레를 뜯는 일에 삼매경일 때 어느 그루터기에 앉아 일기를 적는 것을 추체험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그리부예를 압니다.

저는 멘탈이 튼튼한 편은 아닙니다. 아직도 유소년기의 저린 기억들을 악몽 속에서 마주치고 타인과 대화할 때면 그 음색의 고저 변화, 중간중간 섞이는 웃음소리에서 저를 향한 의심과 경멸을 망상하다 자리를 마치면 서둘러 술로 도피하곤 합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삶(많은 사람과 만나고, 믿음을 주려, 또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는)을 견딜 수 있을까 거의 매일 같이 회의합니다. 자주 기존의 모든 관계와 단절하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이름을 바꾸고 살고 싶다는 몽상에 잠기곤 합니다. 물론 그러려면 돈이 필요한데 저는 매달매달 카드비 메꾸기도 급급한 사람이죠. 그리고 착실히 나이를 먹어 가고 있고요.

“내가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부예. (...) 어쩌면 나는 보잘 것 없는 내 출신 성분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신탁된 재산이 있어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이들보다 그리부예 너에게 더 친근감을 느낀다. 어쩌면 나는 열 살 때 미리 상처를 받아버린 것을 기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경험 때문에 나는 현명해졌고 내가 어느 쪽 울타리에 속해 있는지를 알게 되었으며 앞으로도 그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나귀 편에 속해 있는지, 당나귀를 부리는 사람들 편에 속해 있는지.”

이 책에는 그리부예 이외에도 몇 마리의 당나귀가 더 등장합니다. <돈키호테>의 산초가 파트너로 삼았던 대플,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당나귀 발타자르> 속 발타자르, 19세기 스코틀랜드 작가 R. L. 스티븐슨이 여행길에 동반했던 모데스틴. 희극에 등장하는 대플을 빼고, 발타자르와 모데스틴의 삶은 비참합니다. 특히 스티븐슨은 여유 있는 도보 여행을 꿈꿨지만 한눈팔기를 좋아하는 당나귀의 습성을 참아 줄 만큼 심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데스틴을 모질게 학대했죠. 펜싱을 하듯 날카로운 작대기로 모데스틴의 엉덩이를 찔러댔습니다. 그리고 로베르 브레송은 아마 발타자르를 통해 평범하고 힘없는, 그러나 선량한 사람들의 삶을 형상화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세상은 그런 이들을 재촉하며 엉덩이를 찔러대지요. 피가 나거나 말거나.

왜 당나귀는 아둔함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저자의 여행길에서 그리부예는 자주 머뭇거립니다. ‘뷔리당의 당나귀’라는 오래된 우화가 있어요. 당나귀는 워낙 선택지 앞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려서, 만약 배가 고프면서 동시에 목이 마른 당나귀가 건초 한 더미와 물 한 동이 사이에 놓여 있다면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죽게 되리라는 내용이지요. 저자는 그리부예와 함께하는 여행 안에서 이 오랜 우화가 얼마나 인간중심적이고 편협한 것인지를 확인합니다. 일찍이 브레송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당나귀라는 동물의 부드러운 털 속에 묻힌 신성한 무구성을 발견합니다.

핍박받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에서 제가 살면서 만나 온 친구들을 떠올렸습니다. 선을 추구하고 주위를 돌보려 하다가 많은 상처를 입은 이들을요. 흔히 미련하다는 소리를 듣는. 하지만 이런 이들이야말로 우리 본성에 충실한 이들이 아닌가 생각해요. 저 자신은 미련하기에는 용기가 없어서 자주 비겁하게 영악해지는 사람이지만요. 그러므로 그리부예, 그 이름은 제가 아는 어떤 사람들에게 돌려져야 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앤디 메리필드는 이 책을 낸 후 주로는 프랑스에 머물며 다시 정력적인 학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까 그는 그리부예와의 여행을 통해 어떤 회복을 이룬 듯합니다.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 그들에게 말을 건네고 토론을 하고 일을 도모할 용기를 되찾은 것이겠지요.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이 책을 어느 정도 읽어 나가다 보니 그런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존재의 무게를 우리 스스로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니 우리가 가냘픈 다리와 신비로 가득 찬 발굽을 가진 게자리 속 불멸의 당나귀 등에 올라타 있는 것이라면? 디오니소스는 이렇게 묻고 있다. 이번에는 차례를 바꿔 우리가 당나귀를 이고 가야 한다면? 악한들이 성공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당나귀로 사는 편이 낫겠다고 그리스 희곡 작가 메난더는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면 그리부예는 주둥이를 주억거리며 동의할 것이다. 내게 주둥이가 있다면 나도 주둥이를 끄덕이며 동의할 것이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당나귀보다 더 불쌍한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들은 적어도 자신의 잔인한 운명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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