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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11/05 17:43:12
Name   droysen
Subject   독일 대학원에서의 경험을 정리하며: 7편
안녕하세요. 요번주 내내 오전에 홍차넷에 한편 씩 이 글을 썼는데, 드디어 마지막 편이 다가왔습니다. 부족한 글인데 그 동안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분들에게 미리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4월 정도부터 본격적인 석사논문 작성에 들어갔습니다. 저의 논문 주제는 지난 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민족혁명가들의 근대상 (Das Bild der Moderne bei den Nationalrevolutionären in der Weimarer Republik)"이었습니다. 이 민족혁명가들은 소위 말하는 보수혁명 내의 한 그룹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논문에서는 우선 보수혁명이라는 개념의 유래와 연구사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 했습니다. 제가 생각한 최종적인 목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I. 서론
   1. 문제제기
   2. 연구사
   3. 방법론
   4. 사료
   5. 논증 전개
II. "보수혁명"의 배경에서 바라본 민족혁명가
   1. 보수혁명이라는 개념의 등장과 발전
      1.1. 아르민 몰러와 보수 혁명
      1.2. 몰러에 대한 반응과 연구의 발전
   2. 민족혁명가들과 보수혁명 내의 다른 그룹들과의 관계
III. 민족혁명가들의 등장
   1. 전쟁 이전의 민족혁명가
      1.1. 사회사적 배경
      1.2. 세대로서의 민족혁명가
   2. 일차세계대전에서의 체험
      2.1. 전형으로서의 에른스트 융거
      2.2. 전후 민족혁명가들의 발전에 있어서 전쟁체험의 역할
   3. 전후에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직면
      3.1. 전쟁의 재해석과 미래에 대한 희망
      3.2.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환멸
   4. 만남과 조직화
      4.1. 에른스트 융거와 프란츠 샤우베커: 관계의 시작
      4.2. Standarte에서의 탈퇴와 독립 시도
      4.3. 확장과 성숙
IV. 민족혁명가들의 근대 인식
   1. 근대적 현상으로서의 민족주의
      1.1. 전쟁을 통한 민족의 탄생
      1.2. 평시로의 전이
      1.3. 믿음의 문제로서의 민족주의
      1.4 세계사적 범위에서 민족들의 탄생
   2. 서구로부터 강압된 현실로서의 근대
      2.1. 의회주의와 정당제도
      2.2. 경제와 자본주의
      2.3. 서구화된 사회와 위험에 처한 국가
   3. 기술
      3.1. 기술의 문제: 인간과 기계의 관계
      3.2. 혁명적이고 모든 것을 움켜쥐는 힘으로서의 기술
   4. 혁명
      4.1 전체 혁명? (eine totale Revolution?)
      4.2 서구에 대항하는 세계사적 혁명
   5. 중간평가: 탈서구화된 근대
V. 민족혁명가와 나치: 민족혁명가들의 종말
   1. 지적 선구자들?
   2. 나치에 대한 거리두기
   3. 민족혁명가들의 해체: 저항, 박해, 그리고 "내적 망명"
VI. 결론
VII. 참고문헌

석사논문의 분량은 공식적으로 80쪽에서 100쪽 사이였고, 저는 가급적이면 100쪽 가까이 채우는 방향으로 생각했지요. 목차에서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민족혁명가들이라는 애들은 굉장히 특이한 녀석들입니다. 주로 1890년대에 태어나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에는 갓 성인이 되거나 아직 김나지움에 다니고 있던 학생들이었죠. 이들은 전쟁이 발발했을때 자발적으로 참전했습니다. 또한 기계화된 1차 세계대전의 전장 속에서, 개인의 역할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었죠. 모두가 기관총의 위력 앞에서 개인의 역할은 더 이상 없다고 했을 떄도 말이죠. 민족혁명가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에른스트 융거의 경우, 열번이 넘는 총상과 부상을 입고도 수차례 돌진을 통한 공을 세워 연달아 훈장을 받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1차 세계대전하면 떠올리는 참호전을 지루하다고 여기기까지 했었죠.

이렇게만 설명드리면 이들이 무슨 현대판 돈키호테 같아 보이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현대전에서 기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일기를 보면 수차례 기술을 어떻게 활용해야 될지 모른체 주먹구구식으로 명령을 내리는 상관들을 까는 글을 볼수 있습니다. 융거의 경우 심지어 대놓고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경우 스스로 당시 전쟁에서 기술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파일럿에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거부되긴 했지만.  어쨌든 이들은 단지 용맹만을 강조한 꼰대들은 아니었던 것이죠. 근데 이들은 전쟁터 속에서 고도의 기술을 겪으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술문명이 개인 하나하나에게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전체를 자기 안에 놓고, 마치 개인들은 더 커다란 기계 속의 하나의 부품처럼 작동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이들의 지적 혼란이 발생하는데, 개인들이 하나의 부품에 불과하다면, 앞서 말했던 개인 하나하나의 중요성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요? 개인이 하나의 부품에 불과하다면, 필요할 경우 대체해버리면 그만인데 말이죠. 전후에 이들이 자신들이 겪었던 경험을 해석하기 위해서 골몰하는데는 이러한 고민이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지루한 사료해석 과정을 건너뛰고 결론만 말하자면, 이들은 세계대전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인간"이 탄생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인간들이 곧 독일 민족의 담지자들이 된다고 주장하죠. 여기서 이들이 이전의 민족주의자들과 다른 점이 드러나는데, 이들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민족이 탄생했다고 주장합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민족주의가 탄생했다고 여기는 관점과 너무나 다르죠. 근데 이 지점이 이들의 주장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요. 이들이 민족주의가 근대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할때는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된 민족주의가 아니라, 1차 세계대전을 통해 탄생한 민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근대적인"이라는 형용사보다는 "현대적인"이라는 형용사가 사실 더 맞습니다. 독일어에서는 Modern이 양자 모두를 의미해서 무리가 없었는데, 일단은 글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근대라고 쓰겠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프랑스혁명을 통해 시작된 의회주의와 19세기를 거치며 자리잡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새로운 시대정신이 아니라 구체제의 것이 되었다는 해석으로 이어지죠.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은 구시대를 대표하는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해서 독일을 비롯한 다른 민족들이 투쟁한 것으로 재해석되죠. 그들은 세계대전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민족주의가 이러한 구체제의 유산을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의 경험은 독일인들만이 경험한 것이 아니고, 모든 참전국의 병사들이 경험한 것이기에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탈서유럽화된 근대성"을 꿈꾸었다는게 논문의 테제입니다.

뭐 이건 논문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고, 논문 준비 과정은 좀 더 우왕좌왕하는 과정을 겪게 되죠. 우선 사료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까지 주로 자신들이 창간한 주간지를 통해서 활동했는데, 이 주간지들이 뿔뿔이 흩어져있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논문을 쓰는데 필수적인 사료들이라, 5월 중순에는 베를린에 가서 사료를 찾았고, 6월에는 라이프치히에 가서, 그리고 7월에는 베를린에 한 번 더 갔습니다. 특히 베를린에 있는 "보수주의 박물관 (Bibliothek des Konservativsmus)"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잡지들을 찾아서 우선 몇백페이지가 되는 것들을 통째로 복사하고, 집에 가져와서 하나씩 읽어보는 식이었죠.

근데 아무 수업도 듣지 않고 반년 정도를 글만 쓴다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더군요. 전 항상 괜찮다고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업을 듣지 않고 혼자 글만 쓰면 하고싶은 것만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라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모든 것을 해야하니 이따금씩 사람이 무기력해지고, 무기력해지면 잠시 쉬게 되고, 쉬게 되면 쉬고 있는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우울해지고, 뭐 이런 악순환에 빠지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이 박사논문을 쓸때도 가장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4-5년 간을 혼자 해야하니까요. 여태까지 가급적이면 언급을 안 하려고 했는데, 아내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가끔씩 찾아오는 무기력함과 우울함으로부터 끊임없이 저를 격려해주고 할 수 있다고 힘을 준 사람이 아내거든요. 빈말이 아니라, 아내가 아니었다면 처음 유학온 시점부터 지금까지 언제 한 번 크게 무너졌을지도 모를 것 같습니다. 실제로 독일에서 혼자 공부하는 유학생 지인이나 친구들을 보면 우울증 비슷한 증세들을 많이 겪어요. 특히 날씨가 안좋고 해가 일찍 지는 겨울에는 다들 비슷합니다. 전 요즘 한국 기준으로 굉장히 일찍 결혼한 편에 속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일찍 만나 서로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준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논문을 쓰는데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또 있었습니다. 8월 말에 부모님께서 방문하시기로 했었거든요. 저는 독일에 온 후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제가 독일에 오고나서 4달 정도 후에 출장 때문에 독일에 방문하신김에 잠깐 뵌적이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1년 8개월 정도만에, 어머님은 2년만에 뵙게 되는 것이었죠. 두분 모두 휴가를 내고 오셔서, 함께 독일 지역 여행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두 분이 오시기 전에 꼭 논문을 마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홀가분 할 것 같기도 했고, 작은 성취이긴 하지만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근데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했던,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점이 있었습니다. 유학을 떠날 때 했던 스스로와의 다짐이었습니다. '독일의 대학제도가 엄격하다고 하고, 입학은 쉽지만 졸업은 어렵다고 한다. 독일 애들도 제때 졸업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 하는데 진짜일까' 싶은 생각을 했거든요. 이러한 궁금증은 곧바로 '내가 한번 4학기 만에 졸업해보자'라는 결심으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생각 자체가 한국에서 교육받은 흔적인 것 같아요. 독일 애들 중에 졸업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은 것은, 물론 독일의 교육 시스템이 빡센 탓도 있지만, 얘네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여유가 있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때까지 공부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인 것을... 전 공부하는 것을 마치 일종의 경주하는 것처럼 생각했던 거였죠. 모든 것을 마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스스로가 어리석은 거였지만, 당시에는 한 학기라도 더 하게 되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더군요. 아마 이러한 이유가 논문을 열심히 쓴 가장 큰 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8월 15일에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부모님께서 5일 정도 후에 오시기로 했는데, 15일에 출시된 리마스터를 그 사이에 미친듯이 했던게 기억나네요 ㅎㅎ 일찍 시작한 덕분에 운좋게 세계랭킹 99등도 찍어보고... 이후에 부모님과 함께 여행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시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기로나마 지난 2년간의 경험을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 계속 생각만 하고 미루고 미루다가 홍차넷에 글을 쓰게 됐는데, 잘한 결정이었던 것 같아요. 혼자 쓰게 되면 어차피 알고 있는 부분이니 많은 것들을 생략했을 것 같고, 또 이렇게 부지런히 쓰지는 못했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또 모르잖아요. 혹시라도 독일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다른 학생분들이 이 글을 보고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얻게 될지?

한국에서 처음으로 학문을 업으로 삼자고 결심한 순간부터 항상 초점은 박사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박사를 해야할까', '박사논문 주제는 뭘로 하지', '지도교수는 어떻게 정하지' 등등. 사실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할 때 생활에 관련된 부분 빼면 대부분의 생각이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석사는 그저 당연히 의례 거쳐야 하는 중간단계 쯤이었죠. 석사논문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한 적조차 한국에선 없었던 것 같아요. 그저 주변에서 가끔 석사논문을 라면받침으로 쓴다는 말을 들으면서, '왜 본인 혹은 타인의 노력의 산물을 저런 식으로 대하는 것일까?' 싶은 의문은 가끔 들기는 했습니다. 나는 저렇게 되지말자는 생각도 했었고요. 어쨌거나 석사라는 것에 그렇게 많은 의미부여를 한 적은 없었습니다. 아마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석사 2년이 그저 지나가는 중간단계일지도 모르고, 또 언젠가는 이 시간이 저의 기억 속에서도 흐릿해질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매순간 순간을 살아가고 겪어가는 입장이 되니 이 순간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했었고, 소중하게 느껴져요. 첫 수업을 들으려고 강의실에 앉아서 선생님을 기다리며 낯선 독일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떠드는 것을 듣고 있었던 그 순간,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손을 들고 의견을 말했던 순간, 첫 발표를 하던 날, 첫 하우스아르바이트를 작성하던 순간들, 첫 평가를 확인했던 순간, 교수와의 면담 시간들, 독일인 친구와의 대화들, 여행에서의 순간들, 아내와의 행복한 순간들, 그 시간과 경험, 그리고 기억들이 무엇보다도 소중합니다. 이전에는 제가 존경하는 역사학자나 철학자들의 책을 펼치면 앞의 서문은 대충 훑어보기만 했습니다. '왜 이렇게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하지?' 싶었고 큰 감흥이 없었어요. 근데 이젠 작게나마 그 감정을 알 것 같아요. 그 고맙다는 인사가 의례하는 말이 아니라,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다는 것을.  

이제 저는 새로운 시작 앞에 놓여 있습니다. 석사 논문을 지도해주셨던 교수님 밑에서 박사를 이제 막 시작하게 되었어요. 언젠가, 먼 미래에 홍차넷 게시판에 "독일에서 박사논문을 쓴 경험을 정리하며"라는 글을 연재하는 날이 올까요? 열심히 해서 박사논문을 마쳐야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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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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