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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11/14 03:25:52
Name   Erzenico
Subject   [뜬금 없는 번외] Fred Hersch

([프레드 허쉬 Fred Hersch]가 공연을 마칠 때 늘 앙코르로 연주하는 곡, [Valentine]입니다.)

#. 타임라인에 적으려던 글이었지만 길이도 길어지고 무엇보다 최애 피아니스트인 이 분을 타임라인에 흘려보내듯 언급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프레드 허쉬의 일생에서 어려웠던 부분을 언급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의 개인사를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결코 누구를 힘들게 하거나 모욕주기 위한 의도가 없으므로 만약 기분이 상하거나 글을 읽기 힘든 분이 계시면 아무 미련없이 글을 지우려 합니다. 언제든 고민없이 쪽지 주십시오.


#. 제가 재즈를 듣자고 생각했던 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야자 후 귀가하던 버스에서 문득 '그래, 도시의 밤에는 재즈가 어울려'라고 생각하게 해준 지금도 제목을 알지 못하는 한 곡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오는 변화는 중요한 것이든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이든 가리지 않고 아주 갑자기 다가오는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저처럼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구요...

#. 돈이 없는 고등학생에게, 부산에선 가뜩이나 생소한 재즈를 취미로 찾아서 듣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마도 부전동인지 전포동 구석에 있던 책방에서 엠엠재즈 과월호를 싸게 사서 보고 지금은 없어진 '재즈가 있는 쉼터'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사이트(물론 이 사이트가 없어진 것은 저작권 문제를 끝내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컸지만 아무튼 그 때는 고마운 곳이었던)에서 랜덤 플레이리스트를 통해 새로운 곡을 듣고 또 몇몇 사이트의 추천을 통해 초보의 구미를 당길만한 앨범들을 많이 알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비록 그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고교 시절 겪고 있던 많은 우울감과 심적 어려움들이 조금씩 완화되어 감을 느꼈습니다. 돌이켜보면 참 좋은 기억이었지요.


(96년작 Passion Flower에 수록된 'Lotus Blossom')

#. 랜덤 플레이리스트 중에 유독 아름다운 선율을 가진 곡을 고3 말쯤에 알게 되었습니다. Fred Hersch라는 피아니스트의 솔로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Lotus Blossom]이라는 스탠다드 곡이었어요. 저는 어떤 것이 스탠다드이고 어떤 것이 오리지널 곡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지식 수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를 그냥 아름다운 곡이구나 하는 감상으로 느꼈습니다만, 이후 Lotus Blossom이라는 곡에 대해서도 알게되고 그 작곡가인 빌리 스트레이혼이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히트곡 제조기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 그 뒤 한 동안 그의 소식을 별로 듣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 그의 앨범을 두 어장 구매는 하였습니다만 솔직히 말하건대 별로 듣지는 않았기도 했고요. 그러던 중, 한 2011년쯤부터 - 1년차가 무슨 여유가 있었는지 - 아마존으로 국내 미발매된 앨범을 4-5장씩 사모으는 재미에 빠지게 되었고 우연히 그의 당시 새 앨범인 'Alone At The Vanguard'라는 걸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첫 내한공연이 있었던 2013년에는 이미 그의 빅 팬이 되어 그간 그에게 어떤 일이 되었는지 알게된 이후였습니다.


(Alone At The Vanguard 수록곡인 'Echoes')

#.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실일 수도, 중요한 일일수도 있겠으나 그는 93년 커밍아웃을 한 남성 동성애자이며 HIV로 인한 AIDS로 80년대부터 치료를 받은 바 있습니다. 이 병의 합병증으로 인해 2008년에는 2개월 간 코마에 빠졌다 깨어나 2년여의 재활기간을 거친 뒤에야 겨우 피아노를 다시 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위의 연주는 그 긴 재활기간을 거친 뒤 두 번째 앨범에서, 그것도 클럽에서 녹음된 실황공연의 연주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란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에 감탄하고, 또 그 의지가 저에게는 좀처럼 생기지 않아 스스로가 약간 한심해지는 기분이 잠깐 들었더랬지요.

#. 첫 내한공연을 접한 뒤의 기분은, 배경 상황이건 그간에 앨범으로 들어왔던 곡이건 머릿 속에서 모두 날아가버리고, 그저 황홀한 기분이었습니다. 1-2년간의 집중적인 감상으로 장착된 팬심이 그의 연주를 오픈 마인드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아주 흔치않은 고양감과 인턴, 레지던트 1,2년차를 거치며 쌓인 우울감이 승화되는 듯한 느낌은 아주 황홀했지요. 물론 사인회에서 함께 찍은 사진에 3년간의 수련의 흔적이 배에 쌓여있는 모습을 보고 금새 다시 우울해지긴 했습니다만.

#. 그의 두 번째 내한은 트리오 연주로 진행되었으며, 저는 이 때 스탠다드를 연주하는 그의 마음가짐이랄까, 신조같은 것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스탠다드를 연주하는 데 있어 그 곡이 작곡된 배경과 오리지널 버전 - 오래된 곡인 경우 뮤지컬 삽입곡인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작곡가나 그의 가까운 친구가 연주한 것 - 을 깊이 탐구한 뒤, 이를 처음부터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재조합해나가는 방법으로 이질적이진 않지만 동시에 아주 새롭게 느껴지는 자신만의 버전을 만들어 낸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로, 제가 언젠가부터 단순히 감상자의 입장이지만 스탠다드 곡을 비교해 들을 때면 가능하면 원곡이 뮤지컬에서 어떻게 노래로 불리는지 찾아듣고 그 느낌을 다른 버전과 비교해보는 것과 유사하게 느껴져 더욱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두 번째 내한에서도 즐거운 경험을 하였고요.

#. 내한공연의 특성상 인건비와 항공비의 문제 등등으로 빅 밴드 구성은 흥행이 보장된 공연이거나 인접국가의 스케줄과 겹쳐있는 경우가 아니면 거의 내한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론 그의 앙상블 공연을 꼭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가 코마에서 깨어난 경험을 바탕으로 쓴 곡인 My Coma Dreams를 마지막으로 오늘의 글은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덧, 프레드 허쉬의 내한 공연은 언제나 지인이 운영하는 공연기획사 [플러스히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공감 공연도 그 시기에 이루어 진 것이에요 ㅎㅎㅎ 정말 좋은 연주자들 많이 데리고 오니까 관심 있으신 분들은 페이스북에서 플러스히치를 검색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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