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8/02/04 22:48:48
Name   epic
Subject   노력에 대한 단상.
노력과 재능에 대한 고루한 논쟁의 해답은 사실 존재합니다. 재능이나 노력이 실제로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지는 알 수 없으니 이는 신경 쓸 가치가 없는 문제죠. 그런데 재능이란 헤아릴 수 없을만큼 다방면에서 영향을 받는 것이라 측정부터가 거의 불가능한 반면 노력의 형태는 대체로 정형화되어 있어서 얼추 계량이 가능합니다. 즉 (통제하거나 측정할 수 없는 영역은 운으로 치부하는 야구의 DIPS이론을 빗대자면) 구체적인 측정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재능'은 그 자체로 불확실한 것이기에 운이나 마찬가지고, 보통의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노력을 얼만큼 하느냐 뿐이니 거의 절대적으로 노력이 재능에 우선한다고 볼 수 있는 셈이죠. 재능이 워낙 눈에 띄어 딱히 측정하려들지 않아도 누구나 거대함을 알 수 있는 모차르트 레벨 쯤이 아니고서야 말이죠.


그럼에도 현재 노력, 아니 '노오력'의 왕도성에 의구심을 품는 목소리들이 커져가는 것은 단순히 게으름 따위가 아니라 그렇게 노력하고 성공해야할 사회적인 유인이 척 보기에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죠. 갑질, 불공정, 불평등한 분배 등도 문제고, 노력해서 얻은 크고 작은 보상에 대한 가치 판단도 그렇죠.


그렇게 당위성을 잃은 '노력'은 이제 '엔터테인먼트화'된 듯 합니다. 다시 말해 노력은 이제 '관람'할 때 그 의의가 있다고나 할까요. '노오력'이라고 비꼬는 어느 누구도 김연아 앞에서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습니다. 정현의, 이제동의, 마이트 가이의 투혼이 전해주는 감동도 어느 시대에나 퇴색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고요. 그러나 거기서 끝입니다. 가끔 혈기 넘치는 사람들이 나태한 자신의 모습을 비추며 자극받아야겠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들 중 몇이나 어제를 반복하지 않을까요. 여태까지 몰랐던 것을, 아니 알아도 안 했던 것을 자기 경험도 아닌 일에 갑자기 깨우침을 얻을 확률은 없다시피 합니다. 즉 노력과 투혼은 방송, 신문기사, 열혈 만화 등을 통해서만 잠깐 체감할 수 있는 유희같은 것이 되어버린 거죠. 오늘날 노력이 가능한 사람은 (문화자본을 갖춘) 귀족이 아니면 별종(연예인, 예술가 등)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노력의 중요성을 외치는 이들이 망각하는 사실은 노력도 분명 리스크가 따르는 행위라는 점입니다. 실패하면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는 리스크, 도전과 노력이 단지 시간낭비에 불과하지 않을까하는 리스크, 얼핏 괜찮아 보이는 현재 상태를 버리는 리스크 등.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일수록 잃는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렇기에 노력은 더욱 실제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잠깐 감동받고 자극받는 정도의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인 것은 아까 노력해야할 유인이 떨어지고 있다고 했음에도, 그럼에도 부와 성공은 노력하는 사람이 얻게 된다는 당연한 순리가 무너진 것은 아니라는 거죠. 즉 경제적, 문화적으로 노력이 가능한 여건을 갖춘 사람은 노력의 왕도성을 여전히 신봉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노력을 불신하게 되고, 이것이 사회적 격차를 더 벌리는 결과를 가져오겠죠.


좀 잘난 척하는 것 같은데 이 미래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전혀 두려운 일이 아니지만 정책을 짜고 대계를 수립해야 할 정치가나 행정가들이 여기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을지 많이 의문이 드네요. 특히 저들은 거의 모두가 성공과 노력을 신봉함으로써 그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그래서 청년층에 대한 문제의식도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임을 떠나 '요즘 애들이 유약해'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4
  • 이 글을 보고 내일부터 열심히 살기로 다짐합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234 일상/생각한국맥주가 맛이 없는 이유 (엄.진.근) 29 empier 17/09/05 5111 0
6254 정치트럼프 정부에서 한.일 핵무장 허용검토 얘기가 나왔습니다. 13 empier 17/09/09 4507 0
9904 스포츠두산 한국시리즈 우승 empier 19/10/27 4937 0
12588 정치좋은 유튜브 소개시키러 왔습니다. 1 empier 22/03/07 2962 2
383 기타(잡문) 문학에서의 '부사' 사용 63 Eneloop 15/06/20 9246 0
470 기타(잡문) 꿈 이야기 25 Eneloop 15/06/29 8035 0
2413 일상/생각인공지능은 카렐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스카이넷이 될 것인가 1 Eneloop 16/03/16 5321 3
2920 일상/생각[단편] 시간을 정리하다 - Trauerarbeit 2 Eneloop 16/05/30 4607 1
7361 사회슬라보예 지젝과 정치적 올바름 15 Eneloop 18/04/10 7633 16
6875 도서/문학밑줄치며 책 읽기 (1) <하류지향> (우치다 타츠루, 2013) 5 epic 18/01/02 5248 7
6943 도서/문학올림픽의 몸값 (오쿠다 히데오, 2008) 7 epic 18/01/15 5515 8
7047 일상/생각노력에 대한 단상. 3 epic 18/02/04 3731 4
7074 일상/생각자아비판 - 커뮤니티의 유혹 7 epic 18/02/09 4389 17
7169 오프모임저랑 공연 데이트 허쉴? 17 epic 18/02/27 5083 3
7576 일상/생각커피야말로 데이터 사이언스가 아닐까? 33 Erzenico 18/05/24 4521 12
5789 일상/생각잡학은 왜 인문학으로 불려야만 했을까? 7 Erzenico 17/06/14 3430 7
5968 음악Ragtime - 재즈의 태동에 대하여 4 Erzenico 17/07/18 4406 6
6009 음악Dixieland - 재즈의 탄생 14 Erzenico 17/07/26 3583 8
6047 음악Orchestral Jazz - 주류 대중문화로 자리잡은 재즈 9 Erzenico 17/08/03 3675 1
6086 음악Swing Jazz - 씽씽 불어라, 재즈의 바람 6 Erzenico 17/08/10 5416 9
6110 음악[번외] 3 Divas of Swing Era - 1. Billie Holiday 2 Erzenico 17/08/16 4524 5
6151 스포츠나의 관심 선수 잔혹사 10 Erzenico 17/08/23 2864 0
6154 음악[번외] 3 Divas of Swing Era - 2. Ella Fitzgerald 2 Erzenico 17/08/24 3140 4
6181 음악[번외] 3 Divas of Swing Era - 3. Sarah Vaughan 3 Erzenico 17/08/27 3721 3
6237 음악Bebop - 카우보이는 아닐 지라도 10 Erzenico 17/09/06 4776 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