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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5/20 22:53:18
Name   하얀
Subject   오물 대처법


“별로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요”

내 의견도 그녀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말들을 또 입에 올려야 하나. 다 끝난 일인줄 알았는데.
월요일 오전부터 지난 금요일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을 받은 우리는 서로간에 시선을 교환했다.
호출된 여직원들 중 네 명은 직접적으로 같은 테이블에 앉은 당사자이고, 나머지 둘은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결국 여러 사항을 고려해서 그 일을 덮기로 했다.

금요일 단합회 점심식사 자리에서 ‘갑’의 관리자는 ‘부적절한 주제’를 지속적으로 화제에 올려 떠들었다.
직접적인 성추행은 아니지만, 수위는 아슬아슬한 수준이었다. 화창한 날씨에 가든 식당에서 소불고기덮밥을 먹으며
고객사 관리자에게 듣기에는 다소 불편했지만, 밤늦은 시간 서너명의 아저씨들이 술에 불콰하게 취해서는 자기들끼리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수위랄까.

단합회에서 그 분은 호스트고 우리는 손님이었다. ‘갑’ 회사와의 주요 채널인 나는 그 분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소불고기덮밥을 먹으면서 애써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해도 그 분은 도돌이표 마냥 자신의 화두로 계속 돌아갔다.
“여자에 대한 외모 평가”,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여자”, “노출” 등 등.

개인적으로 아는 남자가 하나라도 입에 담으면 백미터 밖으로 멀리할 것 같은 짜증나는 주제들을 들으며 
속으로는 ‘갈수록 가관’이라 생각했지만, 고객사 관리자인 그 분에게 정색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자리에서 나만 
면역이 있었는데, 저번 술자리를 같이 했기에 어느 정도 그런 성향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때는 같이 있던 
그 분의 상사도 여자이기에 이 정도는 아니였고, 설마 대낮에 여자가 반인 테이블에서 이럴 줄은 몰랐다.
‘거...저 회사도 참 알만한 문화로구나’ 나는 그저 비소했다. 그 때까지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일정 시작 전까지는 어쩌다 보니 여섯 명의 여자들만 같이 모여서 티타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봇물처럼 그 분의 ‘주옥같은 발언’들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아 나만 느낀게 아니구나’ 테이블에서 아무 티도 내지 않고 먹었던 여자들은 서로의 감정들을 확인했다. 그 이야기가 
자기가 이해한 내용이 맞는 거냐고, 잘못 들은 줄 알았다고, 들으면서도 ‘설마..설마..’ 했다고. 제발 다른 얘기 좀 했으면 했다고. 
그리고 그런 조직과 일하는 담당자인 나를 동정해 주었다. (실제로는 실무자 레벨에서 연락해 그 분과 직접적 업무는 처리하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어느 레벨 이하의 성적인 발언과 행동에는 둔감하고 느린 편이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특히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던 '왕언니'는 분노했다. 그 자리에서 못하게 막았어야 했다고, 자기가 있었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고. 
그제야 나는 진지해졌다. 더러운 것은 그냥 흘려버리는게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잘못한 것이었나.

문제의 점심식사를 뒤로 하고, 이 단합회의 의의를 피부로 느끼는 주요 멤버들은 오후부터 새벽까지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해 냈다. 
다행히 그 회사 사람이 다수였던 술자리와 그 이후 자리에서 그 분은 예상보다 얌전했다. 그 분의 상사와 선배들도 있는 자리여서 일까.
나중에 확인해 보니 저녁 식사에서도 몇몇 추가 발언이 있었지만, 전과가 없었다면 술자리에서 다소 무례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역할극이 끝나고 무대를 퇴장하고 난 뒤, 내게 남은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비애와 후회였다. 그리고 죄책감.

죄책감? 죄책감이라니...이건 내 잘못이 아닌데. 하지만 감정은 살아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제 그 자리에서 막았어야 했는데. 막았다면 계속 그런 말들이 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을텐데. ]

변명도 하고 싶었다. 나는 짧지 않은 과거의 회사생활동안 직접적으로 그런 사람을 겪어보지 못했다. 
과거에 몸 담았던 업계의 합리적인 분위기에서는 진상이 거의 없었고, 더군다나 ‘내가’ 겪을 일은 없었다. 
혼자서 고객사 해외 출장을 잘도 다녔고, 그러면 당연히 관리자분들과의(내가 본 해외파견 나간 관리자들은 100%남자였다) 
식사나 술자리도 제법 되었지만, 소위 말하는 ‘전문가 초청’이기에 원래 그런 사람이라 하더라도 조심을 했지 대놓고 내 앞에서 그러지는 않았다. 

그리고 제지 발언으로 그 분의 주의를 끌고 싶지 않고,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오물이 나오면 강물에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아예 나오지 못하게 막았어야 하는데. ]
그 자리에서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나이와 상관없이 그 테이블 여자 중 내가 젤 직급이 높았는데, 
아니 그 것보다, 나는 웃으며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깡과 이 일 아니어도 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무엇을 해야하는 줄 몰랐다.

조나선 헤이트는 책 ‘바른 마음’에서 우리의 감정과 직관을 ‘코끼리’에, 이성을 ‘기수’에 비유했다. 기수는 코끼리를 이끄는게 아니라, 코끼리의 시중을 들어준다. 내 코끼리가 괴로워하자 기수는 바로 강연과 책을 구해왔다. 우연히.(그런데 정말 우연일까? 다른 사람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나는 이런 경우가 정말 많다. 질문을 담고 있으면 우연처럼 답이 나타난다. 이번에도 숙취로 괴로워하며 유튜브에서 김동률의 음악을 듣고 있는데 바로 아래 어떤 강연의 추천이 떴다.)

그 강연은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이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전 교보에서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어 제목만 본 기억이 났다. 강연을 보고 내친 김에 나가서 책도 봤다.

작가는 좋게좋게 넘어가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으니, [좋게좋게 넘어가지 않아야 좋은 세상이 온다]고 했다.  
화를 낼 필요도 없다. 그런 무례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자리까지 오기 전에 제재받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저 가볍게 쿡 찌르기만 해도 된다. 그녀가 제시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감정을 싣지않고 문제가 되는 발언임을 상기시켜 준다.
       
=> “어...방금하신 말씀 SNS에 올리면 주한 미군과 여가부에서 동시에 항의 받겠는데요?”,
            “요새 그런 말하면 미투로 올라가요”  


2. 상황을 되물어서 객관화하기
       
=> “지금 하신 말씀은 저희 회사 여직원들이 나이들어 보인다고 농담하신 건가요?”,
            “수경에 도수를 넣는게 여자들을 잘 보기 위해서라는 건가요?”


3. 상대가 사용한 부적절한 단어나 논리를 되돌려 주기

       => “뭐 그쵸. 사무실에서 일만 잘하면 되죠. 그럼 부장님은 그렇게 입고 일하세요” 


  4. 최대한 무성의하게 반응하기
       => “네 조언은 감사하지만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전형적인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인데, 하지만 지금이라도 외양간 고쳐서 준비를 해두면 다음에는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는 이틀 연속으로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싶은 감각에 계속 몇 시간씩 물 속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양서류로 변태하는 줄. 맥베스 효과가 아주...)

이 방법이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단계 대응 방법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화의 주제를 돌리기 위해 노력해도 소용없을 경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한 답도 찾았다.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는 어린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에게 묻는다.
왜 이런 일을 하냐고. 그는 답한다.

[“When you can do the things that I can, but you don’t…and then the bad things happen? they happen because of you"
“만약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는데, 그걸 하지 않으면, 그래서 나쁜 일들이 생긴다면, 그건 제 잘못인 거예요” ]


우리가 영웅이 될 수도, 될 필요도 없지만, 이 마음은 다 똑같은 것 아닐까. 나쁜 일을 막고 싶은 마음. 

이렇게 기억하고 다짐해서, 부디 다음에 오물이 나올 때는 잘 대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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