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8/12/12 08:42:56수정됨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오징어 깎는 노인
대학원생의 학위논문쓰기는 연애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모르는 사이었다면 애초에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을, 같은 반/과/동아리/부서에서 계속 부대끼며 얼굴을 보다보면 정들어 콩깍지가 끼게 되지요. 대학원생과 논문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쓴 초고를 보고 보고 또 보다보면 논문에 정이 붙어버려서 그만 정우성이요 원빈으로 보이게 됩니다.

자기가 학교에서 정우성을 주워왔다고 확신한 대학원생은 자랑스럽게 부모님께 사진이라도 보여줍니다. 부모님(지도교수)은 열에 아홉 머뭇거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내 눈엔 오징어인 것 같은데…” 화가난 대학원생은 아무리봐도 정우성인데 엄빠가 꼼꼼히 살펴보지 않았을 뿐이라고 강변합니다. 심드렁하게 다시 사진을 살펴본 부모님은 “그래 뭐 오징어는 아닌 것 같다만 그래도 흔한 수산물이란 생각엔 변함이 없구나.”라고 하곤 하지요.

부모님(지도교수)은 보통 조정기간을 가져보라고 조언합니다. 니가 너무 이 오징어에 몰입한 나머지 실성한 것 같으니 한 번 4주 정도 잊고 살다가 다시 들여다보라고, 그러면 좀 더 객관적으로 보일 거라고. 그리고 조언에 따라 실제로 4주 뒤에 다시 만난 우성이는 보통 촉수를 흔들며 반갑다고 인사합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금단의 관계에 돌입한 이상 대학원생은 정우징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깎고 깎고 또 깎고, 옆에서 누가 ‘이제 됐으니 그냥 주시오’라고 해도 ‘서두르면 쓰나!’하면서 연구실 처마를 훑고가는 구름 한 번 쳐다보다가 이내 다시 깎기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깎다보면 또 정이 들어버려서 오징어가 정우성으로 둔갑합니다. 다시 부모님께 선뵈고, 핀잔 듣고, 또 다시 이어지는 조정기간…

이처럼 정우성과 오징어의 변증법을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 특이점이 옵니다. 논문이 더할나위 없이 완벽해졌다는 게 아닙니다. 이는 ‘한계점’에 더 가까운데, 재료와 손재주의 한계로 인해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더 이상 깎을 수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을 말합니다. 우리 남친이가, 내 논문이 끝내 정우성은 못될 거라는 현자타임을 겪은 후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자세로 이놈의 촉수를 꼭 부여잡고 마지막으로 지도교수에게 데려갑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어중간한 어인魚人족 한마리를 건네주면서 “황송하지만 이놈이 못쓰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지요.

그러면 지도교수는 물끄러미 논문을 바라보다 뜻밖에 “이 크라켄은 어디서 훔쳤어” 합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러면 길바닥에서 주웠단 말이냐?”
“누가 그렇게 큰 걸 빠뜨립니까. 떨어지면 철퍼덕 소리는 안 나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특대형 어족자원을 연성했는지, 그것으로 이제 무얼 하려하는지 묻거든 대학원생들은 행여나 크라켄을 빼앗길까 두려워 곱송그리며 말합니다.
“그저 이 학위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63
  • 지금도 논문을 깎고 있을 모든 대학원생을 위하여.
  • 풉키풉키
  • 현웃
  • 박수
  • 내 우징어 생각난다.. 도서관 구석에 잘 꽂혀있겠디
  • 푸하하하핳핳하하 대학원생 입장에선 슬픈데 전 정말 웃기네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춫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828 영화명작 애니메이션 다시보기 21 기아트윈스 17/12/26 7861 6
6275 일상/생각게임중독 28 기아트윈스 17/09/13 5826 10
6779 일상/생각푸른행성 2 (The Blue Planet 2) 1 기아트윈스 17/12/18 4461 6
6848 영화명작 애니메이션 다시보기 (2) 21 기아트윈스 17/12/29 6677 6
6905 역사무굴제국의 기원 23 기아트윈스 18/01/06 6951 20
6911 스포츠잉글랜드 축구는 왜 자꾸 뻥뻥 차댈까요. 35 기아트윈스 18/01/07 7119 10
6980 스포츠UEFA가 FFP 2.0을 준비중입니다. 3 기아트윈스 18/01/21 5272 0
6997 과학/기술국뽕론 43 기아트윈스 18/01/25 8257 36
7139 스포츠축구에서 세트피스 공격은 얼마나 효과적일까 9 기아트윈스 18/02/18 5481 12
7153 철학/종교옛날 즁궈런의 도덕관 하나 5 기아트윈스 18/02/23 5107 18
7249 정치현실, 이미지, 그리고 재생산 27 기아트윈스 18/03/18 5548 6
7260 철학/종교감동(感動) 18 기아트윈스 18/03/22 6113 21
7362 영화인어공주, 외국어, 인싸 24 기아트윈스 18/04/10 6179 27
7453 정치[팩트체크] 힐러리가 통일을 반대한다구? 33 기아트윈스 18/04/29 9978 12
7596 정치권력과 프라이버시 30 기아트윈스 18/05/28 5879 25
7709 스포츠[불판] 대한민국 VS 스웨덴 156 기아트윈스 18/06/18 6849 2
7764 철학/종교칸트 전집 번역 논쟁은 왜때문에 생겼나. 75 기아트윈스 18/06/28 9991 16
7781 육아/가정고부갈등을 해결해보자 - 희망편 40 기아트윈스 18/07/02 6527 54
7813 문화/예술왜 일본 만화 속 학교엔 특활부 이야기만 가득한가 - 토마스 라마르 30 기아트윈스 18/07/09 6970 22
7883 일상/생각사라진 이를 추억하며 10 기아트윈스 18/07/19 5437 39
8620 철학/종교인생은 아름다워 22 기아트윈스 18/12/08 6798 41
8632 일상/생각오징어 깎는 노인 32 기아트윈스 18/12/12 6366 63
8797 사회우리 밥상에 차려진 아시아의 비참 10 기아트윈스 19/01/25 5955 23
8926 일상/생각영국은 섬...섬... 섬이란 무엇인가? 29 기아트윈스 19/03/04 6560 22
9180 도서/문학고속도로로서의 템즈강: 18세기 템즈강 상류지역의 운항과 수송에 관한 연구 34 기아트윈스 19/05/11 5981 15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