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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4/28 13:58:37
Name   Wilson
Subject   교양 해부학과 헌혈과제
제가 다닌 대학에는 교양으로 '해부학'수업이 있습니다. 저도 교양 해부학의 존재를 입학하고 나서 우연히 신문을 보고 알았는데 특이한 교양이다보니 신문에서 그 교수님과 교양 해부학 강의를 간략히 설명해 주더라구요. 나이 지긋하신 의대 노교수님이 진행하는데 고등학교에서 배운 신체구조에서 좀 더 나아가서 각 근육, 뼈의 이름과 기능을 배우는 듯 했습니다. 의사분들이 보기에야 수박겉핥기에다 걸음마 수준이겠지만 일반인 입장에서는 다른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수업인데다 마지막 시간에는 해부 참관이 있다니! 이쪽으로 조금 관심있는 학생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20명 정원은 항상 수강신청 접속과 동시에 만원이 되었습니다. 저도 의대는 못갔지만 미드 하우스, 본즈에 빠져살던 시절이라 학기마다 신청하려고 했지만 늘 실패했구요.
그러다 군대를 다녀오고 4학년이 되어서 무슨 교양을 넣을까 생각하다 문득 해부학 교양 기억이 났습니다. 이번 아니면 이제 들을 기회가 없을거 같아 간절했는데 운좋게도 신청에 성공해서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헉헉 나도 이제 하우스나 브레넌이 될 수 있는건가?!

그렇게 시작된 교양 해부학 강의 첫 시간. 학생회 활동하면서 의대 계단식 강의실을 몇번 가봐서 의대에서 수업하나 기대했는데 아쉽게 일반 교양 강의실에서 하더라구요. 아무튼 교수님의 등장을 기대하는데 왠 30대 초중반의 젊은 여자분이 강단에 올라와서 뭔가 주섬주섬 준비를 하는겁니다. 조교님인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여러분 안녕하세요. 해부학 강의를 맡은 ○○○입니다." 알고보니 교양 해부학 강의를 처음 시작하셨던 노교수님은 2년전에 정년은퇴하시고 아마도(?) 석사나 박사과정의 대학원생분이 앞으로 해부학 강의를 맡아 진행하실거라고 하더라구요. 뭔가 오리지날이 아닌거 같아 살짝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졸업하는 마당에 해부학 들어온게 어딥니까.

새로운 교수님은 해부학 강의 오리엔테이션으로 첫 시간을 시작했습니다. 예상한 대로 시험은 뼈와 근육 명칭 암기시험을 봅니다. 뼈와 근육은 의대생들이 쓰는 영어이름 말고 최근 모든 이름들이 한글화(?)가 이루어져 한글 이름으로 배울꺼라네요(물론 업계에서는 다 영어 이름을 쓴다고). 중간, 기말고사는 치루고 과제는 따로 없지만 종강때까지 본인이 헌혈한 헌혈증서 두 장을 제시하는 것으로 대체한다고 합니다.
"혈액공급은 현대 의학에서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고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참여입니다. 해부학 수업을 듣는 여러분들도 이런 부분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종강시간까지 헌혈을 두번 하시고 헌혈증을 제시하시면 됩니다. 사정상 헌혈을 할 수 없는 분은 별도로 이야기해주세요."

저도 헌혈은 가끔 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아쟈를 빼준다고 해서 하기도 하고 군대에서도 전방이지만 말라리아 위험이 있는 최전방은 아니라 가끔오는 헌혈차에서 하기도 하고. 게다가 학교 지하철역 딱 입구에 헌혈의 집이 있어서 가끔 붙잡히는 날이면 헌혈을 하곤 했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드는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과연 헌혈이 타인에 대한 사랑의 나눔일까? 나는 본 적도, 만난적도 없고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내 혈액을 받아 수술을 받고 살아난다면 난 모르는 사람을 위해 내 피를 기부한 이타적인 사람인가? 거의 모든 사회과정이 분업화 된 현대에 기계적으로 헌혈에 단순히 참여하는 걸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권장되고 칭송받아야 하는 행위인가?'

평소에도 헌혈하며 이런 생각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발적이었고 앞에서 나열된 논리도 일견 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헌혈에 동참했지만 이번엔 문제가 좀 달라졌습니다. 이젠 '학점'을 위해 헌혈을 사실상 반 강제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헌혈증을 제출하고 과제점수를 받는 것이 저의 가치관을 충분히 납득시키고 그럴만한 명분이 있어야 했습니다.

자, 그럼 '헌혈이 타인에 대한 이타심과 인간으로서의 존중을 보여주고 생명을 살리는 행위다'라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하나씩 생각을 해 봅시다. 여기서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알려진 헌혈에 대한 인식과 당위성을 적고 이 문구가 맞는지, 논파를 할 부분은 없는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1. 수술 과정에서 혈액은 꼭 필요하며 혈액은 인공적으로 생산이 불가능하며 결국 건강한 혈액을 만들 수 있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일정정도의 헌혈을 통해 혈액을 비축할 의무를 진다.

일단 1항은 큰 문제나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설사 혈액을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비용이 지나치게 크고, 헌혈의 위험성이 현재 알려진 것 처럼 개개인에게 큰 문제가 아니라면 헌혈을 통해 혈액을 꾸준히 공급되어야 하고 이것은 국가라는 사회단위 구성원 모두의 책임이겠지요.

2. 수술은 위급한 사고를 당하거나 복잡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 '신체적'으로 생명이 위험한 사람에게 행해 지는 것으로, 그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사람으로서, 나아가 생명으로서 존중받고 다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수술 과정에서 필수적인 혈액을 제공하는 것은 모르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인류애를 표현하는 행위이다.

2항도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에 기초한다면 딱히 걸고 넘어질 부분이 없습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이 살인마라 '나쁜'사람이건, 착한 사람이건 행위나 사람의 사회적 판단을 일단 미뤄두고, 또는 사회에서 그 판단을 맡은 기관이나 사람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돈이 많은 사람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사고나 질병으로 목숨이 위험하다면 누구나 일차적으로 도움이 필요하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3.  헌혈은 수술에 꼭 필요한 혈액을 공급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헌혈과 수술, 회복이 모두 분업화되고 내가 헌혈한 사람이 건강하게 산다는 것이 가시적으로 확인되지 않다 하더라도 사회에서도 꼭 필요한 부분으로 충분히 고귀하고 중요한 부분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향한 소속감, 자부심으로 삶의 의미를 상당부분 채우고 있습니다. 손흥민이 챔피언스리그에서 활약하는 것을 보고 흥분하고 기뻐하는 것도 그러한 부분이고 손흥민이 뛰는 경기장에 태극기를 가져가 흔드는 것도 같은 의미겠지요.
한 사회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면 같이 기뻐하고 축하하는 거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라도 혼자 모든일을 할 수는 없겠지요. 그가 매일 아침 먹는 커피, 토스트를 내가 만들어준다고! 이렇게 한 사회가 달성한 성취물을 공유하고 분업화도 설사 그러한 내가 기여한 가시적인 부분이 보이지 않더라도 자부심일 가지게 해 줍니다. 헌혈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내가 헌혈로 기여한 부분이 나에게 가시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틀림없이 누군가는 나의 혈액으로 수술을 받고 건강한 삶을 살고 있을꺼야라는 믿음과 자부심을 주는거지요.

마지막으로 앞서 설명한 3항의 사회기능이 자기역할을 다 하며 잘 수행된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몇년 전, 대한적십자사의 헌혈관리실태가 뉴스에 오른적도 있듯, 거의 무상으로 기부하는 혈액에다 관리하는 기관이 하나다 보니 헌혈혈액 관리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겠지요. 앞어 언급한 헌혈의 당위성이 아무리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 인식되더라도 헌혈 혈액 관리에 대한 사회적 믿음이 부족하다면 사람들은 헌혈을 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회의주의자 입장에서 아직도 내가 모르는 사람이 수혈받는 헌혈이 사랑의 실천인가, 판단중지를 선언하고 의문이 해소될때까지 헌혈을 거부해야 하나, 의문이 말끔히 가시진 않지만 그 나머지 부분은 학점과 타협하기도 하고 종강 전에 헌혈을 하고 헌혈증을 제시했습니다. 대부분의 수강생들도 헌혈증서를 제시하고 과제점수를 받았고 수업 마지막 시간에는 의대건물에 가서 해부된 시체를 참관했습니다. 사실 실제 시체를 해부하는 것을 보는건가 기대했는데 오래전에 해부되고 분해된 시체를 직접 관찰하는 정도더라구요. 그래도 시체를 기증해주신 분들께 예를 표하고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시험기간에는 열심히 위팔뼈, 노뼈, 자뼈, C7, T12을 외우고 기말고사를 보았습니다.
그래도 평소 관심 있던 분야라 열심히 해러 그런지 제 대학생활동안 몇 없는 A플을 받았지만 하우스는 안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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