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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6/02 18: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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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신점 보고 온 이야기
저는 예전부터 무속이 궁금했어요. 왜, 그걸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작두 타기라거나,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라거나. 흥미롭잖아요. 그렇지만 주변에 신점 보러 다니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 혼자 가보기는 또 무서워서 여태 한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전 원래 귀신, 호러, 흉가체험 같은 거 보는 건 상당히 좋아하거든요. 되려 그런 유튜브들이 조악하게 만든 페이크 다큐보다 훨씬 눈길을 끌 때도 많고요. 그렇게 보다 보니 요새는 무당분들도 유튜브를 참 많이도 하대요. 무엇보다 재밌었던 프로그램은 그거였어요. 프로듀스 무당48. 당신의 무당을 뽑아주세요.

네, 원래 이름은 물론  그게 아닌데. 신병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심사위원들이 그 중에서 정말 신내림을 받을 사람을 찾고, 합격자랑 불합격자도 있고. 카메라 구도까지 아무리 봐도 오디션 프로 그 자체였어요. 너무 재밌잖아요.

그런 것들을 보다 보니까 한번은 꼭 가보고 싶은 거죠. 그래서 유명한 사람에게 문의를 해 봤더니. 생각보다 안 비쌌어요. 다만 한달을 기다려야 한다나요. 어렵게 잡은 예약날 일이 생겨서 미루려고 하니 한달을 또 기다려야 해서. 두 달을 꼬박 기다리고 그곳에 가게 됐어요. 잘 나가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의외로 위치가 저어기 구석이었어요. 빵 하나 사먹고, 광역버스를 타고 그곳까지 갔어요.

그런데요. 이렇게 말하면 웃기겠죠? 앞에 도착하니까 너무 점집인 거에요. 아니 당연하죠. 점집에 갔는데. 벌써 외관부터 뭐가 압도되는데, 괜히 슬그머니 눈치를 보게 되는 거예요. 벌벌 떨면서 어떻게든 윗층으로 올라갔어요. 누구냐고 하면 어떡하지. 점을 보러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예약한 사람인데요? 신문은 안 보시나요?

벨을 누르고 기다렸더니 유튜브에서 보던 그분이 나왔어요. 아무것도 안 묻고 여기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이것도 당연하죠. 지금 점을 보러 와놓고 잡상인! 나가라! 할 분이면 제가 잘못 온 거 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잡상인도 여기는 안 올 거 같아요.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사람이 말이에요. 그렇게 많은 빨강과 금빛을 보게 되면 압도가 되더라고요. 탱화니 연등이니, 천정의 전통 문양이라던지. 여기서 금빛 상이 번쩍, 저기서 창이 번쩍. 무구도 달려있고 아무튼 눈이 돌아가더라고요. 조금 기다리라고 하길래 거기 앉았어요. 앉았는데..... 다리 꼬면 안 될 거 같아서 예쁘게 다시 앉았어요. 양반다리를 했는데 아 이건 안되나 싶어서 옆으로 앉았다가 다리가 저려서 다시 양반다리 했어요. 뭐 하나가 눈에 딱 들어왔어요. 만국기...?

중국, 미국, 한국...그리고 뭐더라. 6개국의 자그마한 깃발이 나란히 있는 장식품이었어요. 위에는 분홍빛 꽃이 깃발을 따라 총총총 있었죠. 저건 뭐지. 유엔신인가? 혹시 국제연합신인가? 궁금했지만 물어보면 안될 거 같았어요.

무당 분이 들어왔어요. 유튜브에서는 좀 부하게 보였는데 실제로 보니 골격이 큰 거였어요. 그리고 상냥하더라고요. 제가 본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오자마자 뭔가 야! 하거나 이년! 하는 극적인 전개가 되던데 실제로는 아니었어요. 목소리도 조근조근 부드럽더라고요. 그런데도 사람을 확 휘어잡는 분위기가 있어서, 만만해서 말 함부로 한다던가 그러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러고는 점을 봤어요. 궁금했던 것들도 많이 물어봤고요. 할아버지 이야기가 묻고 싶었어요. 할아버지에게 육개장을 해 드린 이야기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되서 집들이를 했는데, 그날 할아버지가 나오셨거든요. 밥을 덜어드렸더니 맛있게 드시더니 그런데 그것 좀 달라고 하셨어요. 그러고 깼죠. 그러고 한주 뒤였나 얼마 지났는데. 꿈에 다시 할아버지가 오셨어요. 육개장을 했는데 너무 맛있게 된 거예요. 할아버지가 웃으면서 그러셨어요. 이거 맛있네, 정말 맛있다. 고맙다. 그러고는 그게 끝이었죠.

그 이야기를 듣더니 그러더라고요. 49제 끝나고 마지막 인사하러 오신거라고. 자손이랑 밥 먹으면서 인사하시고 가시는 거라고. 아직 하늘에는 못 올라가셨겠지만, 밥 드시고 싶었나 보다고. 말이라도 찡하더라고요. 할아버지, 마지막에도 육개장 못 해드린 우리 엄마가 걱정이 되서 그러셨나 싶어서요. 그러고는 솔직히 뭘 맞추기 보다도 제 얘기를 차분하게 잘 들어주시더라고요. 왜, 모모에 그런 이야기가 있잖아요. 모모에게는 아주 특별한 재능이 있다. 그건 아주 드문 재능이다. 사람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잘 들어주는 것. 전 그런 마음이 좀 들더라고요.

이야기를 하고 나니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근데 왜 엄마한테 안 오시고 저한테 온 거예요? 할아버지는 엄마가 많이 보고싶으셨을텐데.
그분이 말하기로는 들리는 사람이랑 안 들리는 사람이 있다네요. 흔히들 신가물이 있다고 하죠. 못 듣는 사람한테 이야기해봤자, 음소거 해놓고 떠드는 거랑 비슷하다고요. 그럴 수 있겠구나 했어요. 라디오도 음역이 맞아야 나오잖아요. 박쥐처럼 영적인 존재들이 이야기는 주파수라도 있는걸까요?

얼추 좀 비싼 심리 상담 세션이랑 가격이 비슷하기도 하고.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면 상냥하게, 힘있게 들어주는 게 좋아서 이야기하다 왔어요. 굿이라거나 그런 이야기는 안 하대요. 말 해도 안 했겠지만, 그래서 더 편하기도 했고요. 아, 맞다. 소원 성취도 하나 했어요. 저 오방기 한번 꼭 뽑아보고 싶었거든요. 그거 궁금하잖아요. 꼭 나오니까.

마무리될 때쯤, 오방기를 뽑으라고 하더라고요. 긴장해서 뽑았는데 하얀색. 또 뽑았는데도 하얀색. 그러더라고요. 괜찮아요. 이제 치유될 거예요. 나아질 거라고 하잖아요. 진짜든 가짜든 저는 그냥 그게 좋았어요. 요새는요. 그래도 넌 잘 될거야 라는 말을 하기도 듣기도 어려운 세상이잖아요. 그래서 고맙습니다, 했어요. 서글서글한 눈매로 웃어주더라고요. 마지막으로 또 뽑았는데 이번에는 빨간색. 이렇게 좋은 기만 뽑기도 어렵다고, 잘 될거니까 용기를 잃지 말래요. 조금만 더 견디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여태까지 쭉 힘들었으니까 좀만 더 견디면, 좋은 때도 올거라고요. 고개만 가만히 끄덕였어요.

의외로 점을 보러 가서 그냥 상담을 하고 온 거 같았어요. 이런저런 일들을 물어보고, 홀가분해져서 집에 갔어요. 궁금한 게 있으면 돌아가서 물어도 된다고 했는데, 유엔 깃발은 물어보면 안 될 거 같았어요. 그런데 아직도 궁금해요. 유엔 깃발 그거...그거는 대체 뭔가요. 연합? 연합의 의미인가....?


그래서 생애 첫 신점 경험은 꽤 괜찮았어요. 진짜든 아니든, 괜찮은 심리상담 비용이다 생각하면 될 거 같고요.
한가지 더, 카메라가 정말 사람을 부하게 만드네요. 연예인들이 괜히 살 빼는 게 아니었어.
저는 재밌었어요. 오방기도 뽑고, 위로도 받고, 이정도면 경험 한번 해 보는 것 정도는 괜찮은 거 같은데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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