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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9/08 15:49:23
Name   아복아복
Subject   사소한 친절
1.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지금보다 많이 어렸던 시절엔 나만 세상 힘들게 살고 남은 다 희희낙락하며 사는 것 같았는데 아니더라구요. 인생이란 게 모두에게 다 공평하게 거지 같은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렇게 거지 같은 게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국 살아내야 한다면, 우리의 하루하루를, 그리고 우리의 삶을 버티게 해주는 건 별 거창한 게 아니라 정말이지 사소한, 아주 사소한 친절들인 것 같아요.

2. 소싯적을 너무 개차반으로 살아 우리 아버지를 비롯한 형제들에게조차 외면 받는 삼촌 한 분이 있어요.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을 산 사람이에요. 친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아끼던 며느리인 우리 엄마 손을 붙잡고 그러셨대요. 삼촌만 생각하면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고요. 당신 돌아가시면 저런 망종을 누가 챙기겠냐면서요. 엄마는 할머니의 말씀에 당신의 마음이 아팠던 것과는 별개로 보이지 않는 데서는 삼촌을 인간 말종이라고 했고, 아직 열 살도 안 되었던 나조차 거기에 바로 동의를 할 정도로 삼촌은 어찌 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우리 아버지를 비롯한 삼촌 형제들도 삼촌을 망나니 취급하고 상종하지 않았죠.

할머니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신 이후 삼촌은 일가친척 다 있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혼자 일용직으로 근근이 살면서 형제들과 거의 왕래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삼사년 전부터 우리 아버지를 비롯한 형제들이랑 가끔 얼굴 볼 정도는 되었어요. 상경할 때마다 저를 찾는 아버지 때문에 저도 십년 넘어만에 삼촌을 뵈었죠. 나만 잘난 것 같던 어린 시절엔 막돼먹은 이 삼촌이 너무나도 싫었는데, 젊은 시절의 패악이 무색하게 환갑이 넘어 쪼그라든 삼촌을 보니 삼촌도 불쌍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아버지 상경 때면 종종 삼촌을 뵈었어요. 그러다 작년 가을 쯤, 젊은 시절 버릇이 어디 안 갔는지 삼촌은 술 먹고 큰아버지를 비롯한 형제들에게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꼬장을 부렸다고 해요. 그 꼬장이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삼촌은 형제들이랑 또 틀어졌죠.

다시 삼촌 소식을 들은 건 얼마 전이에요. 삼촌이 위암 말기라고 하더라고요.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저한테 당신 대신 삼촌 병문안을 가라 하시더라고요. 마음은 쓰이지만 삼촌이랑 틀어졌으니 당신이 문안 가기는 싫으셨던 거죠. 뭐 못 갈 건 전혀 아니었지만 항상 이런 식으로 당신 불편한 일들을 저에게 넘기곤 했던 아버지에게 너무 화가 나서 아버지랑 대판 싸웠어요.

그러고 한 한 달 지났나, 7월쯤이었나 봐요. 아버지가 다시 연락이 와서는 삼촌 보러 같이 가자시더라고요. 내가 화났던 건 삼촌 병문안 자체가 아니라 당신 힘든 일들을 항상 모르쇠하고 자식에게 미뤄버리는 아버지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같이 가겠다고 했어요. 그 사이에 삼촌이 인간쓰레기라는 걸 온갖 욕을 곁들여 말하면서도 그래도 불쌍하니까 좋은 마음으로 가면 나중에 복 받을 거라는 엄마 전화를 받기도 했고요.

그렇게 오랜만에 뵌 삼촌은 많이 마르셨더라고요. 삼촌은 결혼도 안 해서 가족도 하나 없는데, 암 진단 받고 두어 달이 되도록 아버지랑 내가 갈 때까지 삼촌을 찾아온 형제들도 없었대요. 그 동안 어찌 살았는지 친구라 할 만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았어요. 그나마 온 우리 아버지도 아픈 삼촌을 위로하기보다는 훈수를 두는 식이었죠. 식당에서 겨우 두 살 많은 형의 훈수를 아버지 꾸중 듣듯이 기가 죽어 듣는 삼촌을 보자니 내가 어린 시절 봤던, 출현만으로도 일가친척을 긴장하게 했던 그 인간 말종 삼촌이 맞나 싶었어요. 삼촌이랑 뭐 그리 가까운 것도 아닌데 세상 의지가지없는 삼촌 모습이 왠지 남일 같지 않아서 조만간 또 오겠다고 했어요.      
  
3. 사는 게 항상 그렇듯 하루하루가 바쁘다 보니 삼촌 생각을 못하고 있다가 퍼뜩 추석 전에는 한번 뵈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주 금요일 오후가 비길래 뵈러 가기로 했죠. 그래서 월요일에 삼촌에게 전화까지 드렸는데, 최근 일이 주 사이에 처리할 업무가 너무 많았고 특히 목요일까지 계속 이런저런 일이 몰려서 계속 잠을 제대로 못 자다보니 두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온몸이 쑤셔서 막상 금요일 오후가 되니까 그냥 아무데나 쓰러져 잠이나 자고 싶더군요. 이렇게 일이 몰리게 된 게 윗사람 말하는 대로 그때그때 손바닥 뒤집히듯 업무 내용이 바뀌는 상황 때문이었던 거라 피로가 더 심했어요. 할 일은 계속 생기고 쉬지는 못하니까 혼자 있으면 말끝마다 욕이 붙었었죠. 넋이 나가서는 있다가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싶어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근처 백화점에 갔죠. 빈손으로 갈 순 없으니까요. 명절이라 양말을 팔길래 양말 세트를 하나 샀는데, 삼촌이 뭘 먹고는 사나 싶어서 식품 매장 가서 두유도 한 상자를 샀어요. 그래도 명절인데 싶어서 한참 고민하다 유과 세트도 하나 샀죠. 그러고는 1호선 타고 삼촌 계신 요양 병원을 가는데,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1호선 특유의 냄새 때문에 속은 너무 역하고, 그날따라 유난히 많았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자리 경쟁과 무례함도 견디기가 너무 어려웠죠. 역시 그날따라 유난히 심했던, 욕설을 섞어 큰소리로 떠드는 목소리들을 듣는데, 나는 절대 저렇게 돈도 없이 교양 없고 천박하게 살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어요.

이어폰을 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항상 집안을 채웠던 욕지거리들, 방 안에 깨져있는 유리조각들이며 장판에 남은 공격적인 신발 자국들, 조용히 좀 하고 살라는 지긋지긋한 주인집 아줌마 눈치, 콩나물 무침이나 오뎅 볶음 따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반찬거리들. 이런 게 너무 싫어서 죽어라 공부만 했죠. 힘들었어요. 너만 출세해서 가족 버리고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보겠다던 엄마의 저주, 여자애가 쓸데없이 욕심이 많다던 아버지의 푸념, 잘난 것들은 다 재수 없다며 인생 쉽게 산다고 퍼부었던 남동생, 내 성적을 듣고 공부 잘해봤자 별 거 없다며 싫은 소리를 먼저 했던 친척 어른들의 무례함 같은 것들이요.

야자 끝난 밤 10시에 버스가 끊긴 길을 1시간 동안 혼자 집에 걸어가면서 간절히 바랐던 건, 누가 나한테 '힘들지' 하고 말해주는 거였어요. 내가 바란 건 그저 그 따뜻한 말 마디였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서 나를 그저 적대적으로만 대해온 가족들. 나에게 힘드냐는 말을 해주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어요. 그래도 내가 가족에게 갖는 아주 작은 희망을 가지고 힘들게 뭐라도 했을 때, 최소한 그때는 고맙다고 말해주길 바랐어요. 용돈 한두 푼 모아서 엄마 화장품을 샀을 때 이건 싼 거라 별로라고 말하지 않고, 없는 형편에 대출 받아서 아버지 친구분들까지 모시고 환갑잔치를 치렀을 때 이건 너희들이 자식이니까 해야 하는 거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 딸 고맙다고, 너무 고맙다고 말해주길 바랐어요. 어리숙하고 멍청한 나지만 성취라고 할만한 것을 이룰 때, 정말 그때는, 최소한 정말 그때는, 우리 딸 고생했다고, 대단하다고, 멋있다고 말해주길 바랐어요. 100등을 올려 11등을 한 내게 넌 곧 죽어도 10등 안엔 못 드냐고 말하지 않고, 대학 합격을 한 나에게 빨리 졸업해서 돈 벌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우리 딸 대견하다고, 축하한다고 말해주길 바랐어요. 근데 그 따뜻한 말 한마디 듣는 게, 글쎄요.. 저는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앞에서 삼촌 얘기 때문에 생략하긴 했지만, 사실 엄마 아버지를 비롯한 우리 가족은 특별히 삼촌을 욕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죠. 당신들도 비속어 없이는 말을 이어가지 못할 정도로 교양 없고 천박하고 무례하고, 부정적인 현실을 개선할 용기 같은 거 없이 돈도 없이 그저 매사를 불평하기만 하면서 그 와중에 남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1호선을 타고 목적지인 노량진역까지 가는 동안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삼촌을 보러 가기로 한 걸 후회했어요. 나 혼자 사는 것도 힘든데 왕래도 없었던 삼촌이 아프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고마운 줄도 모를 텐데.. 하면서 말이죠. 다른 사람들을 막 밀치면서 노약자석으로 달려가 앉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자리 양보 받아도 감사 인사 하나 없이 너무 당연하게 앉아버리는 할머니를 보면서 우리 엄마 아버지 같다고, 삼촌도 사실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면서요.

4. 노량진역 내려서 병원 가는 마을버스를 탔는데, 마을버스도 1호선과 좀 비슷했어요. 수산시장에 들렀다 오시는 건지 바퀴 달린 장바구니, 돌덩어리 같은 그 손수레들을 들고 타시는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꽤 많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제가 생각한 건, 아 저 답답한 사람들, 저걸 왜 마트에 가서 편하게 못 사지, 먹는 게 저렇게 중요한가, 그래 우리 엄마도 저러고 다니지.. 뭐 이런 거였어요. 그냥 답답하고 짜증이 났어요. 웬 허리 굽으신 할머니가 포대자루 얹힌 녹슨 손수레를 들고 힘들게 버스를 타시는데 그것도 도와드리기가 싫더라고요. 나도 두유며 뭐며 무거워 죽겠는데, 이러면서요. 그 와중에 역시 돌덩어리 같은 손수레를 버스 중앙에 세워두고 손에 잡은 채 앉아계신 한 아주머니가 어딘가를 향해 계속 얘기하시는데, 버스에서 저렇게 큰 소리로 얘기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나 싶어서 신경질이 났어요. 무슨 내용인지 잘 듣지는 못했지만 도대체 누구한테 하는 얘긴지나 봐야겠다는 생각에 아주머니 시선을 따라갔는데, 예닐곱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아주머니 좌석 앞앞 좌석에 퀵보드 같은 걸 옆에 세워두고 앉아있었어요. 아주머니 손자더라고요. 그 어린 애기가 버스 좌석에 앉아서는 바닥에 닿지도 않는 발을 덜렁덜렁 거리면서 퀵보드 손잡이를 꼭 쥐고는 불안한지 할머니를 계속계속 돌아보고 있었어요. 아주머니는 그 애기를 보면서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얼마나 가야 내리는지를 말하고 있었던 거고요.

그 어린 애기는 할머니랑 떨어져 앉아서 혹시나 할머니랑 같이 못 내릴까봐 걱정했겠죠. 아주머니는 어린 손자의 전전긍긍이 걱정 돼서 그렇게 한 정거장마다 그렇게 얘기를 했던 거고요. 장은 보러 가야 되는데, 애기도 데려가야 하고, 장 보는 동안 애기는 심심할 테니 미안한 마음에 퀵보드를 가져가게 하긴 했는데, 막상 좁은 마을버스를 타니 퀵보드는 애기에게 짐이 되었고, 아주머니는 손수레 때문에 퀵보드 챙길 손이 없고... 뭐 제가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친 건진 모르겠지만, 애기랑 아주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니 순간 잠깐이라도 짜증을 냈던 게 부끄러워졌어요.

5. 아주머니가 누구야, 이제 여기서 내린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그 좁은 마을버스에서 퀵보드까지 가지고 내릴 애기 생각에 제 마음이 다 급해졌어요. 아주머니는 당신 먼저 내리고 애기랑 퀵보드를 내려줄 생각이셨는지 버스 문 열리자마자 바로 내리셨고, 그 와중에 애기는 퀵보드를 한 손에 끌고 버스 문으로 가더라고요. 양손에 나눠쥐었던 두유랑 쇼핑백 두 개를 급하게 왼손에 다 쥐고 오른손으로 애기 퀵보드를 버스 밑으로 내려줬어요. 잠깐이라도 신경질이 났던 게 민망해서 퀵보드 내려주고는 바로 뒤돌았는데, 뒤에서 어, 저기, 저기, 인사해요, 안녕, 고마워요, 뭐 이런 소리가 들렸어요. 뒤돌아보니까 애기가 저한테 손 흔들고 있더라고요. 아주머니가 애기가 고맙다고 인사했다며, 고맙다고 하시고요. 애기가 웃는데, 진짜 요 며칠 썩어있던 제 표정이 저도 모르게 펴졌어요. 저도 웃으면서 손 흔들고는 안녕, 했어요.

애기한테 인사하고 버스 출발하는데, 저 서있는 바로 앞좌석에 앉으신 아주머니가 저를 보시더니 두유 당신 짐 위에 두라시더라고요. 그렇게 했어요. 두유가 되게 무거웠는데 바닥에 막 내려놓기 좀 그래서 들고 있었던 거거든요. 그때 허리가 굽으신, 예의 그 할머니가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시는지 아직 다음 정거장 한참 남았는데도 내릴 준비를 하셨어요. 버스 안에서 수레가 막 움직이는데, 수레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할머니도 너무 위태로워 보였어요. 두유 내려놓고 비게 된 손으로 할머니 수레 못 움직이게 수레 손잡이를 계속 잡고 있었더니, 할머니가 저한테 이따 당신 짐 좀 내려달라고 하시더군요. 할머니한테 저도 여기에서 내린다고 하고는 수레 못 움직이게 계속 잡고 있다가 정거장 도착해서 내려드렸어요. 혼자 다니시기도 어려운 분이 이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타셨나 싶어서 할머니 버스 타실 때 모른 척했던 게 또 부끄럽더라고요. 할머니가 고마워요, 하고 가시는데, 사실 저는 원래 제가 내려야 할 정거장보다 한 정거장 더 먼저 내린 거였지만 뭐랄까, 되게 마음이 가벼워져서 병원까지 걸어갔어요.

6. 왕래도 없었던 삼촌이랑 무슨 얘기를 하나 걱정하기도 했는데, 그냥 어떻게 지내시냐는 얘기 하다 보니까 생각보다 시간이 금방 갔어요. 한 삼사십 분 있다 일어나는데, 삼촌이 뭘 이렇게 많이 사왔냐고, 그래도 네가 조카딸이라고 이렇게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우리집에선 네가 제일 대단한 사람 아니냐면서, 앞으로 잘 되래요. 아니라고, 추석 지나고 또 온다고 했어요.  

7. 요즘 하루하루 정말 힘들었어요. 내가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고, 뭔가 다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도 많아요. 안 그래도 다들 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와중에 나도 모르게 나 자신에게 냉혹해지고, 가족마저도 나를 판단하고 평가하기만 하는 것 같아 세상 기댈 데 없을 때는 정말 죽을 것 같죠. 그래도 그냥 살아가야 되니까 우선 살긴 하는데요. 그때 정말 우리를 꾸역꾸역 어떻게든 살아가게 하는 건, 진짜 별 거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안쓰러이 여겨서 베푸는 자잘자잘한 친절함들인 것 같아요. 그 친절함을 고마워하는 마음들이랑요. 내일도 아침 일찍부터 할 일이 많고 이미 철야 확정이지만, 마을버스에서 만났던 사람들이랑 삼촌 생각하면서 힘내서 살려고요. 여러분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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