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10/23 00:47:12
Name   은목서
Subject   바닷물에 빠질 뻔한 이야기
(이 글은 전적으로 타임라인의 글자 제한으로 옮겨진 글입니다...끄응...)


예전에 연인과 첫 여행을 갔을 때 일이예요.

여행의 첫 날, 배를 타고 들어간 섬, 이국의 바다에 스노클링을 하러 들어갔어요.

전 물놀이를 좋아하는 것에 비해 수영을 못해요.
수영을 아예 배우지 않았을 때도, 아무 바다나 텀벙텀벙 잘 들어가서 놀았어요.
몸이 물에 뜬다는 걸 아니까요. 그리고 체력은 없어도 근성은 있으니 스스로를 걱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날도 아무 걱정 없이 물 속 물고기를 구경하면서 바다로 나갔어요.

오랜만에 물 속에 머리를 박고 신기한 색의 물고기를 보는건 즐거웠어요.
제 키보다 깊기에 가끔 솟은 바위에 발을 딛고 숨을 고르곤 했어요.

그렇게 얼마나 놀았을까...이제 그만 해변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온 방향 그대로 가면 제가 쉬었던 물 속 바위도 나오고, 조금만 더 가면 해변이 나올거라 생각했어요.
그렇게 물 속 지형을 보고 한참을 갔는데 뭔가 이상했어요. 점점 깊어지는 것 같았죠. 발을 딛을 곳도 없구요.

당황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물에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기다리던 여행 첫날부터 구조를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순서도 없이 합쳐져서 몰아쳤어요.
도움을 청할 방법도 없구요.

고개를 들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러면 바닷물을 얼마나 먹게 될지, 다시 균형을 잡을 수 있을지 겁이 덜컥 났어요.
그래도 힘이 계속 빠지는데 이대로 앞으로 나가기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 물 속에 몸을 세웠어요.
역시 전 해변에서 반대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저 멀리 해변에 그가 보였어요.

그 쪽으로 돌아가야 했어요. 멀게 느껴지는 해변으로 방향을 잡고 다시 물 속에 얼굴을 박았어요.
물 속에서 보이는 바닥은 제 키의 두배는 넘게 깊어 보였어요.
그저 다리를 움직이고 숨을 뱉는 것만 생각했어요.
가다보면 해변이 나올 수 밖에 없어. 아무 생각도 하지마. 그냥 움직여. 다리를 멈추지마. 평정을 잃으면 안 돼.
그렇게 가니 드디어 사람 - 수영 중인 할머니, 할아버지 커플 - 을 만났고, 제 키에 닿는 얕은 곳으로 올 수 있었어요.
그야말로 [생존] 수영이었어요.

연인은…처음에 화를 냈던 것 같아요.
자기도 스노클에 물이 들어가서 바닷물 먹고 힘들었는데, 저를 보니 혼자서 스노클링을 즐기고 있었다면서 왜 혼자 가냐구요.
전 의아한 기분이었어요. 스노클링이란게 같이 할 수 있는 거였어?
원래 바다에 들어가면 다 혼자 아닌가…자기 한 몸도 간수 할 수 없는데, 뭘 어떻게 같이 할 수 있다는거지?
제게는 너무 이상한 이야기라 애매하게 웃었어요.

제가 너무 안 나와서 걱정했다는 말에, 미안하다고… 실제로 위험 했다고 이야기했어요.
이 날은 위험했지만, 어쨌든 둘 다 무사했으니 되었다 생각하고 넘겼어요.

그리고 다음날, 저는 스노클링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는 구명조끼의 끈을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길게 묶어버렸어요.

이게 되냐고 웃었는데, 되더군요. 그는 그대로 물 속을 보고, 저는 저대로 물 속을 보면서
그가 보는 것을 제게도 알려줄 수 있고, 저도 제가 보는 것을 그에게 알려줄 수 있었어요.

제가 멀어지면 그가 당겼고, 가끔 힘을 빼고 그냥 있어도 그가 끌고 가줬어요.
때로는 끈이 엉킬 때도 있었지만, 요령이 생겨 쉽게 풀 수 있었어요.

더 멀리, 더 많이 보지 못해도 그게 훨씬 좋았어요. [같이]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물 속에 있는데도 같이 할 수 있구나…이게 가능한 일이었구나.
제게는 새롭고도 놀라운 일이었어요.

지금도 제게는 그 이틀의 대비가 생생해요.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는 별 거 아닌 일이라도,
저는 생각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열린 거 였거든요.

후일담으로 그 후 수영장에서 제 일천한 수영실력을 알게 된 그 사람은
그 날 제가 얼마나 열심히, 있는 힘을 다해 해변으로 돌아왔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결론은, 여러분 수영 열심히 하세요??!!











15
  • 잘하기보다 함께하기가 때로는 더 귀한 이유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936 일상/생각자살유예중입니다. 30 necessary evil 19/11/03 6379 1
9932 일상/생각미국 고등학생 아이들 6 풀잎 19/11/02 4629 14
9930 일상/생각고등학생 아들,딸 그리고 부부 근데 방이 두개뿐이라면? 16 오디너리안 19/11/02 5163 0
9920 일상/생각인생도 리부트가 될까요. 18 No.42 19/10/30 5333 55
9915 일상/생각82년생 녹차김밥 : 빠른 년생에 관하여 14 녹차김밥 19/10/29 5506 10
9914 일상/생각이직하려 생각하니 착잡합니다. 9 당나귀 19/10/29 4752 1
9900 일상/생각카페 알바생입니다! 46 아이캔플라이 19/10/26 5312 3
9896 일상/생각긴글주의, 뻘글주의) 댓글 스크랩 60개 달성 기념 정리 17 Taiga 19/10/26 4687 5
9891 일상/생각이직을 하게 됐습니다. 9 정중아 19/10/26 4501 12
9890 일상/생각외로움을 뜨는 시간 4 멍청똑똑이 19/10/26 4791 16
9889 일상/생각끌어 안는다는 것, 따뜻함을 느낀다는 것에 대해 3 사이시옷 19/10/25 4506 13
9884 일상/생각자동차 이야기 (잡담에 가까운 글입니다.) 34 Liquid 19/10/24 5464 9
9879 일상/생각소개팅 어플과 여자사람-3(번외) 14 그럼에도불구하고 19/10/23 4447 6
9874 일상/생각착한 여사친 이야기 9 Jace.WoM 19/10/23 5556 32
9873 일상/생각바닷물에 빠질 뻔한 이야기 9 은목서 19/10/23 4816 15
9871 일상/생각도움을 주며 살고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0 nothing 19/10/22 3797 30
9869 일상/생각체온 가까이의 온도 10 멍청똑똑이 19/10/21 3716 14
9868 일상/생각뭐라고 해야 될까요... 8 알겠슘돠 19/10/21 3880 8
9867 일상/생각소머리국밥 좋아하세요? 7 사이시옷 19/10/20 3839 12
9862 일상/생각꿈을 꾸는 사람 2 swear 19/10/19 4864 6
9854 일상/생각소개팅 어플과 여자사람-3 44 그럼에도불구하고 19/10/18 5170 17
9853 일상/생각소개팅 어플과 여자사람-2 17 그럼에도불구하고 19/10/18 4739 9
9852 일상/생각소개팅 어플과 여자사람-1 11 그럼에도불구하고 19/10/18 5362 6
9850 일상/생각엄마가 좋아하는 것 3 멍청똑똑이 19/10/17 4681 16
9839 일상/생각죽음을 대하는 일 2 멍청똑똑이 19/10/15 4420 2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