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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2/15 02:27:04
Name   化神
Subject   군대 친구 이야기
만나가도 시간이 흐르고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면서 연락이 끊기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평생의 친구가 되어 계속 만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전혀 비슷한 구석이 없는 사람들인데도 꾸준히 연락하고 만나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데도 불구하고.

무리 중 가장 멀리 사는 이는 이역만리, 호주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2살이 많아 가장 먼저 30세가 되었고 그는 서양에 살아 만 나이로 센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나와는 동기지간이었는데 군 생활하면서 싸우기는 정말 오지게 싸웠다. 오죽하면 타 중대 아저씨가 흡연장에서 보고 슬그머니 "그쪽 중대 11월 자 아저씨는 왜 그렇게 싸워요?" 라고 물어볼 정도였으니 나름 유명한 사이였다. 전역하면 다시는 안 볼 줄 알았는데 한 편으로는 단순한 인간들이라 전역하면서 연락하고 얼굴보고 하니 또 그 때 그 시절을 추억이랍시고 만나면 했던 얘기 또 하고 투닥거리게 되었다.

그 인간이 호주로 간 계기도 특이한데, 전역하자마자 한국에서는 가망이 없어를 외치더니 다짜고짜 호주로 떠났다. 영어도 할 줄 모르던 인간이 막무가내로 호주로 가서 농장과 공장을 전전하며 생활했다. 아는 이 없고 말 통하는 이 없는 곳에서 홀로 생활하는것이 버겁지 않냐 물었으나 자기는 군대 체질이라며 생각없이 일하는게 편하고 오히려 재밌다고 했다. 군대 체질이면 군대에 있지 왜 갔냐는 말에 군대 체질끼리 모여 있으면 경쟁력 없다고, 군대 체질이 없는 곳에 가야 오히려 경쟁력 있다고 했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끼리 이따금씩 모이곤 했으나 무리 중에서 그래도 이 때는 봐야지 하는게 그 인간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때였다. 1년에 한 번 들어오기도 힘들었으나 지금 세보면 2년에 한 번씩은 들어와서 얼굴 보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본 것이 작년 11월 말이었고, 그 때 그 인간에게 어찌사냐고 물었을 때는 영주권을 딸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고생하는건 크게 달라진 건 없는듯 했지만 영주권이 나오느냐 마느냐 기로에 서 있어서 묘한 흥분감과 긴장감을 보이고 있었다. 어찌저찌 모인 인간들이 네 명인데 누구는 서울에서 오고 누구는 화성에서 오고 누구는 춘천에서 오고 마지막으로 인천공항에서 오니 야 이거 어디서 봐야하냐? 누가 언제 퇴근하냐? 옥신각신 설왕설래 하다 뜬금없이 수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 뭔 수원이여 뜬금없네. 나는 한 시간 반 정도 지하철을 타고 수원에 갔다. 오히려 가장 멀리 호주에서 온 인간이 제일 먼저 도착해서 날 기다렸다. 뭐 먹을래. 야 국밥먹자 국밥. 호주에서는 이런거 못 먹어.

11월 말인데 날씨가 제법 쌀쌀했던터라 뜨끈한 국밥 한 사발이 술술 들어갔다. 야 소주 먹자 소주. 무슨 소주야. 넌 한국에만 있어서 모르는거, 국밥엔 소주지. 알았어 거 참 외국인 노동자 티 엄청 내네.
20분도 안 되서 국밥에 소주 한 병을 나눠마시자 뒤를 이어 다른 두 명이 등장했다. 둘 다 나보다 6개월 먼저 입대한 선임인데 한 명은 동갑, 한 명은 한 살 어려서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이야기하곤 했다. 야 얘 살찐거 봐라. 어 나 살 존나 쪘어. 엘리트 체육하던 애가 부상으로 운동 접고 군대왔는데 철봉 붙잡고 지면과 수평으로 버티는, 우리들끼리 가로본능이라고 이야기하던 그 자세를 하던 친구였는데 못 본 사이 살이 엄청 불어나 있었다. 둥글게 올라온 배 위에 손을 턱, 하고 얹고서는 쓰다듬쓰다듬 하는데 욕이 저절로 나왔다. 아 하지마 진짜 아저씨같어. 아저씨 됐지 뭘!

족발집으로 이동해서 족발 대짜 하나 시켜놓고 남자 넷이서 소주 4병을 나눠 마셨다. 야 요즘 어떻게 사냐? 사는게 뭐 다 똑같지 뭐. 근황토크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하고. 결혼은 언제하냐? 언젠가는 하겠지 뭐. 30대 초반 남자들은 탈모와 뱃살과 결혼 이야기를 하는게 일반적인 루틴인것 같다. 음주와 가무를 좋아하는 종자들이 모인터라 다음은 노래방으로 갔다. 목이 마르면 술을 마시고 술이 취하면 노래를 불렀다. 야 안 죽었네. 아 노래방 오랜만이다. 호주에는 이런데 가려면 차 타고 한 시간은 나가야 돼.

어느새 시간이 12시가 되어서 집에 가려고 주섬주섬 챙기니까 그 인간이 야 더 놀자 하고 붙잡았다. 안 돼 내일 일있어. 아 왜 놀다가. 아 미안미안 다음에 또 봐. 서른 넘으니까 오래 못 놀겠더라. 여기서 더 놀면 주말이 날아간다. 주말은 소중하니까 주말을 지켜야지. 알았어 잘 들어가. 어어 출국하기 전에 연락해~

2주 뒤에 그 인간은 나 돌아간다~ 단톡방에 카톡을 남기고 호주로 돌아갔다. 야 2주 금방이네. 그러게. 연말인데 뭐 안하냐? 그럴거면 수원오지 그랬어. 단톡방에서 다들 평소처럼 농담 던지면서 일상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잘보내라. 응.

또 며칠이 지나고, 호주에 산불이 크게 났다길래 연락하려고 했다. 이따 점심시간 쯤에 단톡방에서 물어봐야겠다. 생각하던 차에 단톡방 멤버중 한 명이 전화를 했다. 응? 뭐야? 뜬금없이 전화를 하길래 뭔 일인가 싶어서 받아봤는데, 그 인간이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자기가 평소에 좋아했던 언덕으로 차를 몰고 가서 그 안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단다. 가장 친한 친구 앞으로 남긴 내용이 있어서 한국에 있던 친구가 호주까지 직접 날아가서 확인하고서는 귀국하기 전에 그 인간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연락처 중 가장 많이 연락한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렸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연락 받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당사자가 본인의 부고 소식을 알려오는 상황이라 다들 믿지 않았다고 했다. 심지어는 욕 하는 사람도 있었단다. 재수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너 보이스피싱이지! 단톡방 멤버들 중에서눈 가장 성질 급한 놈이 보이스톡을 걸어서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 인간의 친구가 설명한 전후 사정을 다 듣고 나서 다른 멤버들에게 알렸다. 우리들은 하나도 믿을 수 없었지만 믿고 말고가 중요한게 아니었지. 전화와 카톡을 반복하며 안 믿기는 이 상황을 서로에게 설명해줬다. 와 진짜야?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응 나도 안 믿겨. 근데 그렇대. 아 알겠어 그럼 한국 언제 들어온대? 이번주 토요일에 수목장으로 진행한대. 아 알았어. 그 때 봐. 어 그래, 몸 조심하고.


오랜만에 8명이 모였다. 야 이래야 겨우 얼굴보네. 그럼, 쉽게 보는 얼굴인줄 알았어? 되도 않는 농담을 하면서 껄렁껄렁 걸어다녔다. 왜 이들은 군복을 입지 않았는데도 예비군처럼 행동하는 걸까. 오전 10시 반에 살짝 쌀쌀한 듯 했지만 전반적으로 날씨가 좋았다. 생각보다 좁았다. 가족과 친지, 친구 몇 명. 그렇게 많지 않은 인원들이었는데도 복잡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들은 조금 뒤 쪽에 위치해서 지켜보았다. 함을 묻고 나서 어머님, 동생과 인사를 한 뒤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먼가 그대로 떠나기엔 아쉽다고 해야할까 미련이 남았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이게 현실인가 싶어서였을까.

한 번 더 보고 가자. 그래. 인사 제대로 해야지.

다시 올라가서 사진도 없이 비석에 이름만 있어서 겨우 찾을 수 있는 채 1평도 안 되는 곳 앞에 8명이 주르륵 섰다. 야 저 인간 좁다고 발광하겠는데? 그러게 저 성격에 저기에 어떻게 있겠노. 거 성격 급하던 양반 아니랄까봐 급하게도 갔네. 응 저승에서는 너보다 선임하려고. 아 큰일났네.
야 경례 한 번 해야지. 아 지랄. 아 왜 쟤 그런거 좋아해. 알았어 하자 해. 부대 차렷, 예비역 병장 ㅇㅇㅇ에 대하여 경례! 충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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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우여, 잘 자라...
  • 동기들 다 잘살고 있는지. 형이라 챙겨주던 동생들아 다들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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