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3/19 13:36:57
Name   사이시옷
Subject   툭툭
참 신기합니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며 혼내는 사람이 있어요. 혼내는게 끝났나 싶은데 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말예요. 이런 상황의 희생자가 되면 긴장하고 있다가도 시나브로 진이 빠려버려 엉덩이가 점점 뒤쪽으로 빠집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오래 혼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팀원이나 후배가 업무상 실수를 해도 두 세마디면 끝나요. "너 왜 그랬니? 이런 저런 일을 했어야지! 앞으로 잘해줘" 라는 3단계만 지나면 더 혼내는 것도 뻘쭘해져서 자리를 빠져나옵니다. 누구를 혼낼 수 있을 정도의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는 자각도 원인이긴 하지만요.

  그래서 오래 혼낼 수 있는 사람들이 신기했어요. 혼내려면 뼈 속까지 때리는 것이 얕잡혀 보이지도 않고, 잘못의 반복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멋있어 보기까지도 했죠. 티비에도 나오잖아요. 좀 옛날 드라마지만 강마에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수컷들. 그래서 진이 빠지는 것을 각오하고 스스로 새록새록 빡치며 고성을 질러대는 상사의 모습을 벤치마킹도 해봤지만 결국 포기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아무리 연습해도 내뱉을 수 없는 찌든 삶의 아저씨가 내뱉는 끈적한 Civa처럼 안되는 건 안되는 것이더군요.

  하지만 얼마 전 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스토커처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혼내는 거머리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요. 대상이 남이 아니라 바로 저라는 것이 좀 다르지만요. '혼낸다' 보다는 '자책한다'가 더 가까울것 같네요.

  그런 밤이 있습니다. 산책하는 강아지처럼 제 삶의 곳곳에 숨어있는 전봇대와 나무 아래를 킁킁거리며 제가 싸질러 놓은 실수와 잘못의 냄새를 맡는 날이요. 남들에게 그랬듯 쿨하게 툭툭 털고 앞으로 나가가는 것이 아니라 "난 참 못난놈이구나. 그러니까 이런 짓을 했었지."라는 답 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 한쪽 발을 들고 죄책감이라는 오줌을 줄줄 쌉니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새록새록 빡치며 고성을 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리고 스스로 잊을 만한 과거의 실수는 방금 오줌을 눈 탓에 냄새가 진해서 잊지 못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멍멍.

  신입의 티를 벗어버린지 한참 된 후배의 큰 실수도, 서핑하다 위험하게 끼어든 시꺼먼 얼굴의 아저씨도, 마구잡이로 손을 휘둘러 아빠의 눈탱이를 후려친 7개월된 못생긴 아들에게도 그랬듯이

  저에게도 '허허, 왜 그랬지? 담엔 안그러면 되지'라고 말하며 툭툭 털고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5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0629 6
    14620 음악[팝송] 테일러 스위프트 새 앨범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 김치찌개 24/04/24 54 1
    14619 일상/생각나는 다마고치를 가지고 욕조로 들어갔다. 6 + 자몽에이슬 24/04/24 348 14
    14618 일상/생각저는 외로워서 퇴사를 했고, 이젠 아닙니다 14 kaestro 24/04/24 969 17
    14617 정치이화영의 '술판 회유' 법정 진술, 언론은 왜 침묵했나 10 과학상자 24/04/23 615 8
    14616 꿀팁/강좌[해석] 인스타 릴스 '사진찍는 꿀팁' 해석 20 *alchemist* 24/04/23 623 13
    14615 경제어도어는 하이브꺼지만 22 절름발이이리 24/04/23 1297 6
    14614 IT/컴퓨터re: 제로부터 시작하는 기술 블로그(1) 2 kaestro 24/04/22 327 1
    14613 음악[팝송] 밴슨 분 새 앨범 "Fireworks & Rollerblades" 김치찌개 24/04/22 106 0
    14612 게임전투로 극복한 rpg의 한계 - 유니콘 오버로드 리뷰(2) 4 kaestro 24/04/21 316 0
    14611 사회잡담)중국집 앞의 오토바이들은 왜 사라졌을까? 21 joel 24/04/20 1192 30
    14610 기타6070 기성세대들이 집 사기 쉬웠던 이유 33 홍당무 24/04/20 1516 0
    14609 문화/예술반항이 소멸하는 세상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소녀들 5 kaestro 24/04/20 663 6
    14608 음악[팝송] 조니 올랜도 새 앨범 "The Ride" 김치찌개 24/04/20 118 1
    14607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2편 15 kogang2001 24/04/19 376 8
    14606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1편 4 kogang2001 24/04/19 352 10
    14605 게임오픈월드를 통한 srpg의 한계 극복 14 kaestro 24/04/19 535 2
    14604 일상/생각개인위키 제작기 6 와짱 24/04/17 812 12
    14603 정치정치는 다들 비슷해서 재미있지만, 그게 내이야기가 되면... 9 닭장군 24/04/16 1244 6
    14602 오프모임5월 1일 난지도벙 재공지 8 치킨마요 24/04/14 777 2
    14601 꿀팁/강좌전국 아파트 관리비 조회 및 비교 사이트 11 무미니 24/04/13 890 6
    14600 도서/문학떡볶이는 좋지만 더덕구이는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13 kaestro 24/04/13 1105 5
    14599 일상/생각가챠 등 확률성 아이템이 있는 도박성 게임에 안 지는 방법 20 골든햄스 24/04/12 1112 0
    14598 음악[팝송] 코난 그레이 새 앨범 "Found Heaven" 김치찌개 24/04/12 192 1
    14597 스포츠앞으로 다시는 오지않을 한국야구 최전성기 12 danielbard 24/04/12 1042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