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9/13 02:48:45
Name   The xian
Subject   'e스포츠 팬'이 아니라 '아이돌 팬'이라는 말의 헛점
이번 시즌의 행동과 그간의 설화 등등을 가지고, 원래 김정수 감독과 T1의 케미스트리 혹은 거취에 대하여 글을 쓰려고 했으나, 지금 T1에 발생한 난리 때문에 원래 쓰려던 글들을 다 버려버렸습니다. 처음엔 감독을 팀에서 경질하기 위해 휴가를 간 사이에 T1이 뭔가 통수치듯이 결정하고 여론전을 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최초 기사의 수정사항이나 드러난 정황들을 보면 오히려 기자가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여 소스를 얻었다는 식의 정황이 발견되고. 이렇게 되면 오히려 언플은 감독이 한 건가 싶고, 도저히 뭐가 뭔지 모르겠더군요.


뭐 어쨌거나.

가만 보면 김정수 감독과 T1의 현 상황에 꽤 많은 영향을 미친 [페이커에 대한 김정수 감독의 디스리스펙트 혹은 그에 준하는 뉘앙스로 읽힐 수 있는 말과 행동]에 대해, 의견이 찬반으로 나뉜 건 오히려 대한민국이었습니다. 팀을 위해 감독이 특정한 선수를 혼내거나 오더를 일원화시키기 위해 무언가 해도 되는 게 아니냐는 반응이나, 페이커의 처지나 팬심만 가지고 팀에서 출전 선수를 정할 수 있는 것 아니라고 말하는 목소리도 무시 못할 정도였지요.

설령 예전에 김정수 감독이 페이커를 혼냈다 페이커를 주전 자리에서 빼고 팀이 하나가 되었다 오더 일원화가 되었다 한 것처럼, 선발전 엔트리 가지고 또 인터뷰에서 입을 털며 '베스트 멤버가 아니다' 운운하면서 또 자기 점수 깎일 짓을 했다 한들 선수 출전 권한은 감독의 몫이라는 의견이나 당위성도 나름 정당성은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 건들에 대해 해외 e스포츠 팬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들끓었습니다. 누군가는 '전 세계 T1 팬덤을 쪼개놓았다'고 표현했는데 '쪼개놓았다'는 건 팬덤이 분열된 국내반응에서나 쓸 법한 소리고, 해외 반응은 오히려 [붕괴되었다]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T1에 대해 일방적으로 분노하며 아예 등을 돌려버린 수준이지요. 이처럼 국내팬과 해외팬의 인식의 차이는 꽤 명확했지만, 여기는 대한민국이기도 하고, 저는 뭐 감독에게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선수교체까지는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김정수 감독이 그가 말한 오더 일원화나 공격적인 팀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 지금 상황을 보면 그런 국내와 국외의 인식의 차이를 넘어서서, 특히 팀 팬을 자처하거나 극단적인 페이커 팬들의 움직임을 비판하는 포지션에 있다고 자처하는 분들이 T1에 대해 생긴 국내외(특히 해외) 팬덤의 분노와 비판을 깎아내리고, 심지어 '팬들이 팀을 망쳐놓고 있다, 진정한 팬이 아니다' 라거나  'e스포츠가 아이돌판이 되었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까지 심심찮게 보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굉장히 동의하기 어렵고 선을 넘은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류'의 말을 들어보면 페이커 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은 팀을 위해 움직여야 하니 특정 선수에 대한 반응이나 출전 요구를 하는 건 팬으로서 부당한 일이고, 페이커도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지금 개인 팬들이 떠드는 소리는 선수를 위한답시고 팬들이 팀을 분열시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 선수 개인이 소속된 팀을 위해서라면 팀이 분열될 수도 있는 말이나 움직임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합니다.

누군가가 특정 선수가 안 나온다고 게임단에 DM이나 악플 등으로 영향을 미친 일이 있고 그것이 팀에 상당한 부담을 주는 건 당연히 저도 알고 있는 일입니다. 유독 T1이 심할 뿐이지 다른 팀도 안 그런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런데 여기에서 제가 가장 먼저 의문을 가지는 건, 그게 오롯이 선수 개인 팬들의 움직임이라는 것이 과연 맞는 말인지가 의문이란 겁니다.

그런 범인 찾기 사고방식의 방향성이라면, 오히려 '팀을 위한다'는 그릇된 명분으로, 아니면 누군가를 위한다는 건 거짓이고, 그저 특정한 대상에 악영향을 끼치기 위해 특정 선수를 배제하거니 기용해야 한다는 압박을 안티들이나 팀 팬덤에서 주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도 성립되어야 하겠지요. 살제로 페이커가 조금만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여도 무수한 악성 DM이나 악플이 달리고, 최근 네 시즌 중 세 시즌을 우승한 사람에게 한 시즌 비틀거렸다고 포변이니 은퇴니 하는 선 넘는 소리가 심심찮게 오가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렇다면 지금 T1에 영향을 미치는 악플 사례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과도한 움직임을 일으키는 부류로, 선수 개인 팬이라는 불특정 다수를 지목해 '팀에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한다'고 비난하는 게 과연 정당한 당위성이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당연히, 그런 비판을 하는 쪽은 오로지 팀을 위해서 조용히,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고, 그런 데에 전혀 개입한 사실이 없을까요? 잘해봐야 확증편향이라고 봐야 할 듯 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 애초에, 선수 개인이 좋아서 그 스포츠를 보는 사람에게, '네가 응원하는 선수도 팀의 일원이니 팬들도 팀을 생각해줘야 한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이며, 선수 개인이 좋아서 쫓아다니는 움직임은 '맹목적인 아이돌 판'이고, 팀까지 위해서 팀이 잘 되기를 바라는 움직임이어야만 '성숙한 e스포츠 팬덤'이라는 논리는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을까요?

그런 주장을 가만 보면 마치 '팀 팬'은 'e스포츠 팬'이고 '개인 팬'은 스포츠를 좋아하거나 스포츠 전체를 보는 팬이 아니라 '그저 개인만 떠받들기 때문에' 스포츠 팬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그 분들의 방향성과 자기들 목소리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명분인 듯 한데 솔직히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고 '팬심'이라는 것을 잘 모르거나 팬이 되는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쓴 소리인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e스포츠를 그렇게 까대는 사람들이 PC방 비유 하면서 '1000원만 주세요 e스포츠 하고 올께요' 운운하고 비웃든 말든 이미 e스포츠는 스포츠의 범주입니다. 이미 스포츠가 되어 있는 e스포츠의 팬덤을 이것 저것, 선수니 팀이니 분류해 마치 스포츠가 아닌 양 낮춰잡아야 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자기 의견과 맘에 들거나 팀, 전체 스포츠 판을 위해 가동하는 팬심은 스포츠의 팬심이고, 선수 개인에게 집중되는 팬심이나 자기 맘에 안 드는 팬심은 아이돌의 팬심일까요?

원래 팬심이란 것이, 그 스포츠가 좋아서 지켜보는데 그 중에서 돋보이는 팀 플레이어라 팬이 되는 '팀 스포츠'의 측면에서 팬심이 생기는 경우도 있는 법이고, 반대로 스포츠 자체는 잘 몰라도 특정 선수 한 명에게 매료되어 팬이 되는 '상징성'의 측면에서 팬심이 생기는 경우도 있는 법입니다. 둘 중,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그른 게 아니지요.

하물며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에서  세계 최고의 미드 라이너로 GOAT라는 말에 손색이 없는 페이커에게 '팀 스포츠'적인 면에서 접근하는 팬심과, '상징성'으로 개인에게 집중하는 팬심 중에서 후자의 측면이 더 강하다고 한들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고 그게 자기 맘에 안 들거나 이해가 안 간다고 그걸 '스포츠 판'이 아닌 '아이돌 판'이라는 식으로 비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개인 팬들의 존재가 e스포츠의 스포츠화를 방해한다는 식으로 주워섬기고 있지만, 역으로 말하면 상업적인 스포츠 판에서 그 상업성과 상징성의 근간을 이루는 팬덤 자체를 그렇게 자기만의 잣대로 무시하는 소리야말로 e스포츠의 가치를 자기 멋대로 깎아내리고 방해하는 게 아닐까요?




결론적으로, 지금 T1에 대해 오가는 팬들의 반응이나 목소리를 자기 멋대로 재단하여 개인 팬보다 팀 팬이 우월하거나, 명분과 이유가 더 있다거나, 개인 팬들이 팀을 분열시키고 있다거나, 심지어 개인 팬덤은 e스포츠 팬덤이 아닌 아이돌 팬덤이다 하는 부류의 말들은 애초에 팬심이 이렇게도 생길 수 있고 저렇게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거나. 아니면 자기의 합리화를 위해 팬심을 자기 좋을대로 재단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연하면 팬의 마음이란 게 반드시 지금 응원하는 팀을 위해 움직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고객이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는 브랜드나 상품을 계속 이용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팬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는 선수나 프로구단을 팬이 그대로 붙잡고 있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지요. 애초에 다른 스포츠에서도 응원하는 선수 따라 그 선수가 옮겨간 팀 혹은 리그로 팬심이 움직이는 일이 아주 흔한데. 그러면 그 스포츠들도 죄다 줄줄이 [아이돌 판]일까요? 뭔가 안 맞는 말이잖습니까.


이번 시즌 페이커에 대해 행한 T1 혹은 김정수 감독의 처사가 그만한 이유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누가 옳고 그른지 등에 대해 국내에서는 이야기가 아직도 설왕설래하고 있고 저도 한동안 서로에게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다만 어느 쪽에 명분과 당위성이 있느냐 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했지만, 저는 요사이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생각의 방향성을 조금 달리 하게 되었습니다.

팬들의 입장에서 보면, T1의 페이커에 대한 행동이 국내의 적잖은 팬들은 물론 수많은 해외 팬들이 등을 돌릴 정도로 '모욕감'을 줬을 때 게임은 이미 끝난 일이지요. 그리고 그 기반에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를 이해시키는 일은, 이미 모욕감을 느낀 팬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팬들에게는 자기가 팬질을 하기에 모욕감을 느낀 상황이 해소되느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요.

뭐, 그렇게 등을 돌린 팬들이 다시 돌아오게 만들지 아니면 지금의 체제 혹은 방향성에 동의하는 새로운 팬을 만들지에 대해서는 T1의 선택이긴 하나, 자신들이 가진 팬들을 등을 돌리게 만들어 프로게임단의 가치를 깎아먹는 짓을 해서는 제아무리 T1이라도 오래 못 갈 게 뻔한 노릇이지요.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봐야겠습니다.


- The xian -



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0612 6
    14609 문화/예술반항이 소멸하는 세상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소녀들 1 + kaestro 24/04/20 233 4
    14608 음악[팝송] 조니 올랜도 새 앨범 "The Ride" 김치찌개 24/04/20 36 0
    14607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2편 14 + kogang2001 24/04/19 245 6
    14606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1편 4 kogang2001 24/04/19 242 8
    14605 게임오픈월드를 통한 srpg의 한계 극복 13 kaestro 24/04/19 431 2
    14604 일상/생각개인위키 제작기 6 와짱 24/04/17 750 11
    14603 정치정치는 다들 비슷해서 재미있지만, 그게 내이야기가 되면... 9 닭장군 24/04/16 1129 6
    14602 오프모임5월 1일 난지도벙 재공지 8 치킨마요 24/04/14 732 2
    14601 꿀팁/강좌전국 아파트 관리비 조회 및 비교 사이트 11 무미니 24/04/13 846 6
    14600 도서/문학떡볶이는 좋지만 더덕구이는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13 kaestro 24/04/13 1064 5
    14599 일상/생각가챠 등 확률성 아이템이 있는 도박성 게임에 안 지는 방법 20 골든햄스 24/04/12 1089 0
    14598 음악[팝송] 코난 그레이 새 앨범 "Found Heaven" 김치찌개 24/04/12 172 0
    14597 스포츠앞으로 다시는 오지않을 한국야구 최전성기 12 danielbard 24/04/12 991 0
    14596 정치이준석이 동탄에서 어떤 과정으로 역전을 했나 56 Leeka 24/04/11 2486 6
    14595 정치방송 3사 출구조사와 최종 결과 비교 4 Leeka 24/04/11 762 0
    14594 정치절반의 성공을 안고 몰락한 정의당을 바라보며 10 카르스 24/04/11 1329 18
    14593 정치홍차넷 선거결과 예측시스템 후기 11 괄하이드 24/04/11 906 6
    14592 정치2024 - 22대 국회의원 선거 불판. 197 코리몬테아스 24/04/10 5333 2
    14591 정치선거일 직전 끄적이는 당별관련 뻘글 23 the hive 24/04/09 1261 0
    14590 오프모임[5월1일 난지도 벙] 근로자 대 환영! 13 치킨마요 24/04/09 601 1
    14589 일상/생각지난 3개월을 돌아보며 - 물방울이 흐르고 모여서 시냇물을 만든 이야기 6 kaestro 24/04/09 384 3
    14588 일상/생각다정한 봄의 새싹들처럼 1 골든햄스 24/04/09 276 8
    14587 일상/생각탕후루 기사를 읽다가, 4 풀잎 24/04/09 422 0
    14586 음악VIRGINIA (퍼렐 윌리엄스) 신보 카라멜마끼아또 24/04/08 272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