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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25 14:47:06
Name   쿠팡
File #1   Screenshot_20201025_025639_Gallery.jpg (223.9 KB), Download : 3
Subject   첫 학회지 투고 논문을 불태우면서


어제밤에 제 생애 첫 학회지에 투고할 논문을 모두 작성하고 투고 신청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미쳤다고 생각 드실 수도 있겠지만, 술 한잔 마시고선 인쇄한 논문 표지를 집 앞 공터에서 불태웠습니다.

제가 학부생 주제에 논문을 쓰기 시작한건 과거에 대한 반추 때문에 생각이 너무 복잡하고 마음이 아픈데, 뭐라도 해야지 잊을 수 있을거 같아서 시작한거였거든요. 스무살이라는 어린 나이이지만 제 내적으로 겪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과 그것과 상관없이 다가오는 학업, 진로, 가정사와 같은 외적인 문제들이 모두 사실 저를 힘들게 만들었어요.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고, 결국 도피처를 찾다보니 유일하게 제 아이디어와 지식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동시에 생산적인건(다시말해 스펙에 도움이 되는건) 논문을 쓰는 것이였죠.

그런데 논문을 적은 문서 수정 로그 기록을 보면서 한가지 신기한 점을 발견했어요. 문득 문서 수정 기록을 훑어보는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설렘과 일상에 행복이 있었을 때는 문서 수정 기록이 전무하고, 반대로 제가 마음을 아파하던 기간에 문서 수정 기록이 빼곡하더라고요. 마음이 아플 수록 논문에 대한 집중도가 올랐다는 정비례 관계를 보여주는거겠죠. 제 논문을 좋아하지만 제가 아플때만 논문이 쓰였다니, 아이러니였어요.

그때 제가 쓴건 논문이였지만 사실은 내 아픈 기억과 수많은 고민들을 어떻게든 분산시킬려고 논문을 악착같이 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논문을 쓰는 행위도 겉으로는 지적으로 생산적인 활동이었지만, 저에게는 신경안정제인 자낙스와 같이 제 심리적인 안정을 주는 약물과도 같은 존재라는걸 깨달았어요. 무언가를 내가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얻는 위안감, 그 자체가 수많은 아픈 생각들에서 저를 벗어나게 하고 신경안정 효과를 주는 것이었죠.

그렇게 밤을 새서 논문을 적는 기간들동안, 제가 했던 수많은 고민들과 아픈 기억들을 생각하니 표지라도 불태워서 날려보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불태우려고 라이터에 불을 붙히는데...아픈 기억들을 잊으려고 막 자료조사를 시작하고 서론을 쓰던 모습, 소개팅을 받고 연애를 시작하며 여자친구와 꽁냥꽁냥하며 "나중으로 미뤄야지~"하면서 기분좋게 논문을 손 놓던 시간, 짧은 연애 후에 이별을 통보받고 눈물 흘리면서 기억을 잊으려고 다시 논문에 손 대는 모습, 논문 투고 마감기한에 쫒겨서 바에서 논문 읽는 모습까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논문 하나에도 제 스무살의 일부가 들어가있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새로우면서도 아픈 기억들이 중간중간 파편처럼 들어가있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제 첫 학회지 투고 논문을 태우게 되었습니다.
논문을 다 쓰고(물론 Accept까지 되어야 하겠지만) 불태우기까지 했으면 마음이 후련해야 하는데 더욱 무겁기만 했네요. 많은 생각이 드는 밤이었습니다.

※본래 탐라에 있던 글이지만 티타임에 올려달라는 요청에 내용을 더해서 티타임에도 조심스래 적어봅니다. 글이 두서없이 길어졌지만 읽어주셨다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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