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1/22 14:23:28수정됨
Name   심해냉장고
Subject   계절은 돌고 돌며 아이코스도 돌고 돌아.
언젠가 부친께 선물한 아이코스가 내게 돌아왔다. 유품이라거나 유류품 같은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뭐어, 조금 비극적인 이야기 정도는 될 것이다. 당뇨 수치가 나빠진 부친은 금연을 시작했고, 그냥 버릴까 하다가 내게 보낸 것이다. '담배는 작작 피워라 임마 그러다 나처럼 당뇨 걸려.' 라는 짧은 편지와 함께. 유쾌하고, 조금은 비극적인, 그리고 또 지극히 일상적인.

세상에는 두 종류의 아들이 있을 것이다. 건강이 나빠진 부친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하는 타입의 인간과 그래도 전자담배가 몸에 덜 나쁘던데 하고 전자담배를 선물하는 인간. 나는 두 번째 종류의 인간인데, 이건 역시 건강이 더 나빠져서 전자담배도 끊게 된 후 아들에게 그걸 보내며 '담배는 작작 피워라 임마 그러다 나처럼 당뇨 걸려'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나는 졸지에 두 개의 아이코스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나오지도 않는 구형이로군, 이라고 생각하며 기기를 충전기에 물려 본다. 충전등이 점등되지 않는다. 이런, 접촉 불량이로군. 하긴 나는 이미 세 개 째의 신형 아이코스를 수명이 다하도록 쓴 참이고, 이건 그보다 한참 전에 나온 구형 모델이다. 원활하게 작동할 리가 없지. 담배 끊으신 지 좀 되셨구만 이 양반. 하고 투덜대며 다시 충전기를 뺐다가 물리니 그제서야 충전이 시작된다. 카트리지를 꽂아 피워본다. 오, 청소와 관리가 매우 잘 되어 있군. 내 기계에서는 폐차장 냄새가 나는데. 나는 아버지로부터 유쾌한 농담을 하는 피는 물려받는 데 성공했으나 청소와 관리를 꼼꼼하게 하는 피는 물려받지 못한 편이다. 엄마도 꼼꼼한 편인데 왜 나만 젠장. 다시 충전하고, 일을 좀 보다가 피운다. 젠장, 고질적인 접촉불량이다. 청소와 관리를 잘 한다고 해도 인간은 시간을 이길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춥다고 해도 겨울은 오고, 내가 더워도 여름은 올 것이고, 그러다가 아이코스는 수명을 다 하고, 사람은 고장난다. 할 수 없는 일이다.

폐차장 냄새를 나는 내 신형 아이코스를 꺼낸다. 어, 뭐야썅 이건 또 왜이래. 나의 신형 아이코스는, 무려 두 개를 연달아 피울 수 있는 최신 기술을 자랑하는 한정판 크롬도색 아이코스는, 접축 불량을 넘어선 기기 이상으로 아예 작동하지 않는다. 몇 번 충전기를 새로 물려보고 흔들어도 보고 하지만 묵묵부답이다. 이런 제기랄. 아버지 감사합니다, 를 외치며 나는 부친의 아이코스로 하루를 버텨보기로 한다. 담배 하나 사자고 나가기엔 날씨가 조금 추운 기분이니까. 나의 혐오와는 별 상관 없이 곧 월요일은 닥쳐오고 말 것이고, 그러면 나는 추위와 상관 없이 출근을 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출근길에 집 앞 편의점에서 새로 하나 사면 된다. 주말 동안은 아버지의 사랑을 즐기도록 하자.








7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0631 6
    14621 기타[불판] 민희진 기자회견 32 + 치킨마요 24/04/25 297 0
    14620 음악[팝송] 테일러 스위프트 새 앨범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 김치찌개 24/04/24 90 1
    14619 일상/생각나는 다마고치를 가지고 욕조로 들어갔다. 8 자몽에이슬 24/04/24 499 17
    14618 일상/생각저는 외로워서 퇴사를 했고, 이젠 아닙니다 16 kaestro 24/04/24 1047 17
    14617 정치이화영의 '술판 회유' 법정 진술, 언론은 왜 침묵했나 10 과학상자 24/04/23 772 8
    14616 꿀팁/강좌[해석] 인스타 릴스 '사진찍는 꿀팁' 해석 20 *alchemist* 24/04/23 651 13
    14615 경제어도어는 하이브꺼지만 22 절름발이이리 24/04/23 1342 7
    14614 IT/컴퓨터re: 제로부터 시작하는 기술 블로그(1) 2 kaestro 24/04/22 335 1
    14613 음악[팝송] 밴슨 분 새 앨범 "Fireworks & Rollerblades" 김치찌개 24/04/22 107 0
    14612 게임전투로 극복한 rpg의 한계 - 유니콘 오버로드 리뷰(2) 4 kaestro 24/04/21 321 0
    14611 사회잡담)중국집 앞의 오토바이들은 왜 사라졌을까? 21 joel 24/04/20 1203 30
    14610 기타6070 기성세대들이 집 사기 쉬웠던 이유 33 홍당무 24/04/20 1535 0
    14609 문화/예술반항이 소멸하는 세상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소녀들 5 kaestro 24/04/20 675 6
    14608 음악[팝송] 조니 올랜도 새 앨범 "The Ride" 김치찌개 24/04/20 124 1
    14607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2편 15 kogang2001 24/04/19 379 8
    14606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1편 4 kogang2001 24/04/19 354 10
    14605 게임오픈월드를 통한 srpg의 한계 극복 14 kaestro 24/04/19 542 2
    14604 일상/생각개인위키 제작기 6 와짱 24/04/17 815 12
    14603 정치정치는 다들 비슷해서 재미있지만, 그게 내이야기가 되면... 9 닭장군 24/04/16 1254 6
    14602 오프모임5월 1일 난지도벙 재공지 8 치킨마요 24/04/14 780 2
    14601 꿀팁/강좌전국 아파트 관리비 조회 및 비교 사이트 11 무미니 24/04/13 891 6
    14600 도서/문학떡볶이는 좋지만 더덕구이는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13 kaestro 24/04/13 1107 5
    14599 일상/생각가챠 등 확률성 아이템이 있는 도박성 게임에 안 지는 방법 20 골든햄스 24/04/12 1115 0
    14598 음악[팝송] 코난 그레이 새 앨범 "Found Heaven" 김치찌개 24/04/12 192 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