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04/09 16:29:39
Name   아침커피
Link #1   https://crmn.tistory.com/129
Subject   너의 살았어야 했던 고향은
"XX야, XX는 어디 사람이야?"
"옹꽁아암. (홍콩사람.)"
"아니야, XX는 한국 사람이야."
"나는 옹꽁 아는데? (나는 홍콩 사는데?)"

순간 뭐라 대답해야 할 지 말문이 막혔다가 "아빠도 한국 사람이고 엄마도 한국 사람이니까 XX도 한국 사람이지." 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다행히 애가 더 묻지는 않았다. 교포 2세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직 유치원도 안 가는 아이가 이럴 줄이야. 그래도 일 년에 서너 달은 한국에 보내 놨었는데. 집에서도 일부러 한국말을 썼는데. 그런데 홍콩 영주권도 없으면서 자기가 홍콩 사람이라니. 나는 겪어본 적 없는 저 정체성 혼란에 어떻게 대응해줘야 할 지 머릿속이 하얬다.

아니, 아니지. 나도 정체성 혼란을 겪은 적이 있구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다 북한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지만 나는 어릴 때 할아버지 친구분들을 자주 뵈었다. 실향민들은 대부분 친척이 적다. 친척이 북한에 남아 있으니까. 그래서 실향민들끼리는, 특히 동향 사람들끼리는 정말 가깝게 지낸다. 할아버지 친구분들도 그래서 나를 좋아하셨던 것 같다. 내가 어린이였을 때 하루는 할아버지 친구분들이 나에게 물으셨다.

"너는 고향이 어디야?"
"경기도 XX시요."
"예끼! 평안북도 XX군이라고 해야지!"

괜히 혼난 나는 기분이 안 좋았다. 나는 태어나서 경기도에서 산 기억밖에 없는데 왜 나를 평안북도 사람이라고 하시는건지. 그런 나를 붙잡고 할아버지 친구분들은 연습을 시키셨다.

"자, 너 고향이 어디라고?"
"평안북도 XX군이요."

이해는 안 갔지만 나는 원하시는 대답을 해 드렸고 할아버지 친구분들은 만족해하셨다.

우리집 애도 이런 상황일 거다. 자기는 놀이터에서 친구들하고 놀 때 한국말을 한 마디도 안 하는데, TV에서도 한국말이 안 나오는데, 밖에 나가면 다 한자와 알파벳으로 된 간판뿐인데 왜 엄마아빠는 나를 한국사람이라고 할까. 그렇게 궁금해하다가 엄마아빠가 하도 너는 한국사람이라고 하니 그냥 그렇다고 해 두자 한 것은 아닐까. 몇십 년 전 내가 그냥 평안북도 사람 하기로 했던 것 처럼.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이 한 곳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고향이 두 곳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나의 살던 고향이 있고 조부모 혹은 부모가 말해주는 너의 살았어야 했던 고향이 또 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왜 평안북도 역시 내 고향이 될 수 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아직 어린이인 우리 애에게 이 것을 이해시킬 자신은 지금은 없다. 너도 고민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되겠지.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그 과정도 재미있을거야.



1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0584 6
    14604 일상/생각개인위키 제작기 와짱 24/04/17 54 0
    14603 정치정치는 다들 비슷해서 재미있지만, 그게 내이야기가 되면... 3 닭장군 24/04/16 290 2
    14602 오프모임5월 1일 난지도벙 재공지 8 치킨마요 24/04/14 598 1
    14601 꿀팁/강좌전국 아파트 관리비 조회 및 비교 사이트 11 무미니 24/04/13 721 6
    14600 도서/문학떡볶이는 좋지만 더덕구이는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13 kaestro 24/04/13 879 5
    14599 일상/생각가챠 등 확률성 아이템이 있는 도박성 게임에 안 지는 방법 19 골든햄스 24/04/12 1004 0
    14598 음악[팝송] 코난 그레이 새 앨범 "Found Heaven" 김치찌개 24/04/12 149 0
    14597 스포츠앞으로 다시는 오지않을 한국야구 최전성기 12 danielbard 24/04/12 915 0
    14596 정치이준석이 동탄에서 어떤 과정으로 역전을 했나 56 Leeka 24/04/11 2365 6
    14595 정치방송 3사 출구조사와 최종 결과 비교 3 Leeka 24/04/11 719 0
    14594 정치절반의 성공을 안고 몰락한 정의당을 바라보며 10 카르스 24/04/11 1229 18
    14593 정치홍차넷 선거결과 예측시스템 후기 11 괄하이드 24/04/11 860 6
    14592 정치2024 - 22대 국회의원 선거 불판. 197 코리몬테아스 24/04/10 5274 2
    14591 정치선거일 직전 끄적이는 당별관련 뻘글 23 the hive 24/04/09 1236 0
    14590 오프모임[5월1일 난지도 벙] 근로자 대 환영! 13 치킨마요 24/04/09 572 1
    14589 일상/생각지난 3개월을 돌아보며 - 물방울이 흐르고 모여서 시냇물을 만든 이야기 6 kaestro 24/04/09 358 3
    14588 일상/생각다정한 봄의 새싹들처럼 1 골든햄스 24/04/09 258 8
    14587 일상/생각탕후루 기사를 읽다가, 4 풀잎 24/04/09 399 0
    14586 음악VIRGINIA (퍼렐 윌리엄스) 신보 카라멜마끼아또 24/04/08 255 2
    14585 오프모임4월 9일 선릉역에 족발 드시러 가실분. 29 비오는압구정 24/04/08 767 4
    14583 정치총선 결과 맞추기 한번 해볼까요? 52 괄하이드 24/04/07 1357 0
    14581 정치MBC 여론M 최종 버전 14 당근매니아 24/04/07 1863 2
    14580 사회의대 증원과 사회보험, 지대에 대하여...(펌) 42 cummings 24/04/04 5023 37
    14579 음악내가 락밴드 형태로 구현하고 싶던 걸그룹 노래들 18 *alchemist* 24/04/04 669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