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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08/02 22:53:49
Name   j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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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워크래프트 3)낭만오크 이중헌의 이야기. 네 번째. (마지막)





(뒷줄 왼쪽부터 프레드릭 요한슨, 이중헌, 정인호, 이형주. 가운데 사복 입은 선수가 박세룡)



워3 확장팩이 발매를 앞두고 오크 유저들은 상당한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확장팩 직전까지 이어진 패치의 흐름이 명확하게 나엘 하향, 오크 상향이었기에 블리자드가 종족별 균형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지요. 확장팩에서 추가된 내용들도 오크의 약점을 하나 하나 고쳐주는 것이었습니다. 유닛 하나 하나가 비싸고 체력이 높은데 중반까지 회복 수단이 없었던 오크를 위해 종족 상점에서 회복 아이템 힐링 샐브가 주어졌고 자폭 데미지가 무려 900에 달하는 공중 유닛 뱃라이더가 추가되어 더 이상 키메라를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반면 오크의 주적 나이트엘프와 휴먼은 주요 유닛과 특수 기술에서 명백한 하향을 받았고요. 베타 테스트에서도 오크가 엄청 강해졌다는 결과가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막상 확장팩이 나오고 보니 이게 웬 걸, 차라리 클래식 말기가 더 낫겠다 싶을 만큼 오크는 최약 종족으로 굴러떨어졌습니다. 워3라는 게임은 마법의 활용과 그 마법 유닛을 잡아먹는 안티 매지컬 유닛, 그리고 마법을 제거하는 디스펠 유닛의 존재가 대단히 중요한 게임인데, 블리자드는 오크에게 이런 저런 상향을 해주면서도 딱 하나, 마법면역을 가진 안티 매지컬 유닛을 오크에게만 주지 않았습니다. 클래식 시절에는 공용 아이템 니게이션 완드로 디스펠이 가능했는데 이조차도 없어지자 오크는 그야말로 상대가 구사하는 마법 지옥에 시달렸죠. 오크에게도 광역 디스펠 유닛으로 스피릿 워커가 새롭게 주어지긴 했는데, 이 놈은 '비싸고 강한' 오크의 컨셉에 충실해서 값이 비싸고 인구수를 3이나 먹는데다 가지고 있는 마법도 영 시원찮아서 좀처럼 쓸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확장팩과 함께 출시된 중립영웅 비스트 마스터의 존재가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영웅은 워3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수차례에 걸친 패치로 모든 스킬과 영웅 스탯에서 모조리 너프를 얻어맞은 영웅이지요. 그러니 처음 나온 순정품 상태일 때는 정말 악소리나게 강한 사기 영웅이었죠. 그런데 환장하게도 이 놈은 오크가 쓰기엔 그리 좋지 않은데 다른 종족, 특히 나엘이 오크에게 쓰면 끝내주게 성능이 좋았습니다. 이 놈의 약점은 작은 마나량과 상대의 디스펠인데 오크는 디스펠이 시원찮은 반면 나엘은 게임 시작하자마자 주어지는 일꾼에게 광역 디스펠+마나감소 기술이 있었거든요.

이런 이유로 확장팩에서는 나이트엘프가 여전히 최강이고, 오크보다 못 한 종족이던 언데드가 화려한 상향을 받아 단숨에 나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한 종족이 되었으며, 휴먼은 오크와 함께 비주류 종족이 되었죠. 그런데 둘이 붙으면 휴먼이 유리했기에 오크가 밑바닥이었고요.

확장팩 직후에 열린 양대 방송사의 워3리그 예선에서 오크들은 추풍낙엽으로 나가 떨어졌습니다. 두 대회를 통틀어 본선에 진출한 오크는 단 한 명, 프라임리그 2에 진출한 한석희(gamrock) 뿐이었습니다. 이전 글에서 말했듯 이중헌은 PL 1에 집중하면서 확장팩 적응 기간을 이유로 대회에 불참한 상태였죠. 결국 한석희마저 단 1승에 그치며 16강에서 탈락하자 방송대회에서 오크는 사라졌습니다. 배틀넷에서도 모든 종족 가운데 50레벨을 가장 마지막으로 배출한 종족이 오크였죠.(최초 달성자는 박준 lyn.)

다시 찾아온 오크의 암흑기에서 팬들은 이중헌의 복귀를, 그가 오크의 희망을 제시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점은 이중헌이 소속된 푸 클랜은 확장팩의 유통사인 손오공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손오공 프렌즈'로 창단되었고 이중헌과 동료들은 더 나은 환경에서 연습을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은둔하며 실력을 기른 이중헌은 2차리그와 mbc게임 프라임리그 3에서 마침내 예선을 뚫고 본선에 올라옵니다. 다만 온게임넷에서는 서글픈 해프닝 끝에 본선에 진출했는데, 당시 본선 진출자를 10명만 뽑기로 되어 있던 예선에서 휴먼과 오크가 전멸하는 결과가 나오자 스폰서였던 손오공 측이 강력하게 항의하며 재예선을 요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거죠. 결국 온게임넷이 추가 예선을 실시하여 6명의 진출자를 추가 선발했고 그 중 한 명이 이중헌이었습니다. 재밌는 건 두 대회 모두 이중헌, 강서우(reign), 김동현(may) 이 3명이 같은 조에 편성되었다는 겁니다.

이중헌이 들고나온 해법은 그런트+디몰리셔였습니다. 그런트는 클래식 시절 쓰레기 유닛에서 벗어나 확장팩에서 강한 유닛으로 거듭났고 디몰리셔는 그런트에게 부족한 화력을 채워줄 수 있는 공성병기였죠. 그러나 이중헌은 mbc게임의 PL 3에서는 김동현을 눌렀으나 강서우, 김태인(rainbow)에게 패하며 1승 2패로 탈락하고 맙니다. 다행히 온게임넷 2차리그에서는 강서우를 이겨내면서 강서우, 김동현과 함께 2승 1패로 3자 재경기를 갖게 되죠. 여기서 이 세 명의 선수는 한국 게임대회 사상 유례 없는 대기록을 세우는데, 재경기 이후 또 재경기를 거듭하며 무려 5차례의 재경기(총 15경기)끝에 강서우와 이중헌이 8강에 진출했습니다.

재경기에서 10경기나 치르고 올라온 경험치 덕분인지, 8강에서는 나이트엘프 장용석(freedom)을 상대로 멀티 이후 우주방어 타워 전략으로 승리, 천정희(sweet)에게는 제플린을 활용한 일꾼 견제로 완승을 거두며 조 1위로 쉽게 4강을 확정지었습니다.

4강에서 마주친 선수는 지난 1차리그의 우승자, 디펜딩 챔피언이며 이중헌의 팀 동료이자 프라임리그 1 결승에서 맞붙어서 승리한 바 있던 이형주였습니다. 이 막강한 상대를 이기기 위해 이중헌이 준비해온 해법은 그런트+디몰리셔에서 이어지는 타워러시였습니다. 예상치 못 한 전략에 당황한 이형주는 게임 중간중간 승기를 잡아놓고도 흔들렸고, 이중헌이 3:1로 승리하면서 결승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대회는 지금까지의 여느 대회와는 달리 4강에서 더블 엘리미네이션 방식을 적용했고 이형주는 최종 플레이오프에서 천정희를 3:2로 꺾고 결승에 올라옵니다. 비록 4강에서 이긴 바 있으나 껄끄러운 상대, 이형주의 반격은 매서웠습니다. 이중헌의 전략에서 뼈대가 되는 그런트를 곰과 드라이어드 조합으로 무너뜨리며 1,2경기를 연달아 가져갔고, 3경기에서는 이중헌의 타워러시를 완벽한 대처로 막아내면서 이형주가 2연속 우승을 달성합니다. 이중헌은 또 한 번 결승에서 패배하며 온게임넷에서 3연속 준우승에 머물고 말죠.

이 때부터 이중헌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앞서 말했듯 타워 러시처럼 불안정한 전략에 목을 매야 할 만큼 오크는 할 것이 없었고, 급변하는 게임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강자들은 이중헌의 플레이 방식을 점점 옛 것으로 밀어내고 있었죠. 영원히 이중헌의 천하일 것 같았던 오크 진영에서도 황태민(zacard), 박준(lyn), 홍원의(headache) 등의 고수들이 배출되어 세대교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손오공 프렌즈는 양대 방송사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합쳐 4개의 대회를 모조리 우승하면서(온게임넷 워3 2차리그, MBC게임 PL 3, 온게임넷 프로리그, MBC게임 CTB3) 역대 최강의 기세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이미 팀의 중심은 이중헌이 아니라 박세룡과 이형주였습니다. 프로리그에서는 주로 팀플에 출전하며 4승 1패로 선전했지만 개인전에서는 2승 2패의 평범한 성적을 거뒀고, CTB에서는 1승에 그쳤죠. 다만 프로리그 플레이오프에서는 손오공이 1:3을 4:3으로 뒤집는 역전극의 마지막 7세트에 나와 승리를 따내며 특유의 영웅 기질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긴 했습니다.

이중헌을 둘러싼 워3의 외부 환경도 급변하고 있었죠. 많은 투자에도 불구하고 워3는 당초의 기대만큼 흥행하지 못 했고 워3 팀들의 해체가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어떤 팀들은 대회 중에 해체되기도 했고요. 이런 위기 속에 열린 helloapm배 weg(사실상 2차 프로리그)에서는 손오공 프렌즈가 전체적인 부진에 빠지며 충격적인 3전 전패 탈락을 겪었습니다. 이중헌은 손오공이 탈락하는 마지막 경기에 출전해서 언데드 김도형에게 패해 팀의 탈락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열린 MBC게임의 PL 4, 이중헌은 마지막 불꽃을 피워올립니다. 개막전이었던 장용석과의 경기에서 이중헌은 누구도 생각지 못 했던 고블린 팅커를 두번째 영웅으로 뽑아들었습니다. 경기가 열리기 직전에 패치로 추가된 신규 중립 영웅이라 팬들은 물론 선수들조차 연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중헌은 일진일퇴 공방 끝에 팅커를 6레벨로 만들어 궁극기 로보 고블린으로 변신시켰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라는 이현주 캐스터의 경악스런 찬사를 받으며 승리했습니다. 이중헌의 팬들에게 명경기를 이야기 해보라 하면 1,2위를 다투는 전설의 경기이자, 이중헌이 팬들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었습니다. 이어서 이중헌은 천정희, 전지윤(medusa), 오창종(zandarke)을 연파하면서 8강에 진출하죠.

그러나 여기까지였습니다. 8강에서 이 대회의 우승자가 될 이재박에게 1:2로 패하며 탈락했고, 이후 며칠 뒤에 이중헌은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이중헌의 은퇴는 방송사가 주도하는 워3대회, '워3의 스타리그화'의 실패를 선언하는 상징이었지요. 이중헌의 은퇴 이후 박세룡 또한 은퇴를 선언했고 불과 몇 개월 전 까지만 해도 워3 천하를 제패했던 손오공 프렌즈는 선수들의 은퇴와 이탈이 이어지며 공중분해 되어 사라졌습니다. 온게임넷은 스폰서를 구하지 못 해 자체 비용을 들여 3차 워3리그(개인전)를 개최한 후 워3를 포기했고 MBC게임은 끈질기게 대회를 이어갔지만 이미 워3의 중심은 세계로 옮겨가고 있었죠.

2005년 3월, 이중헌은 충격적인 프라임리그의 맵 조작을 폭로했습니다. 이 사건은 아예 따로 글을 써도 될 만큼 가볍게 넘어갈 소재가 아닌데, 이건 그의 게이머로서의 행적이 아니니 여기선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 사건 때문에 워3가 망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만 밝혀두겠습니다.

이중헌은 03년 5월 경에 은퇴를 번복하고 복귀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가 뛸 무대는 한국에 없었고 급변하는 게임 환경에도 적응하지 못 했죠. 그가 사라진 자리를 메운 것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선수들이었고, 이중헌은 더 이상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 하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이중헌에 대한 글을 엄청 길게 써왔는데, 사실 그가 워3 게이머로서 활동한 기간은 겨우 2년 밖에 안 됩니다. 그는 이 짧은 기간 동안 다른 게이머들의 몇 배에 달하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한국의 게임 방송사들이 주도한 초창기의 워3 대회는 그와 함께 잊혀졌고 그의 이름도 '옛날에 대단했다더라' 같은 막연한 기억과 단편적 기록으로만 전해져 옵니다. 이제는 그 때를 기억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죠. 지금껏 이중헌에 대한 길고도 지루한 글을 써온 것은, 단지 이중헌 개인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그 시절의 기억과 이야기가 통째로 잊히는 것이 안타까워서 였습니다. 이렇게 인터넷 한 켠의 작은 공간에서나마 그 때의 이야기를 보존해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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