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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09/05 01:21:00
Name   샨르우르파
Subject   새로운 인생
5년 전 나는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새로운 인생』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대학생 오스만은 헌책방에서 구한 정체불명의 책을 읽고는 접신이라도 했는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그는 모든 것이 낯설어졌다.
책 읽기 전과 같은 세상에 살았지만, 그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과거의 것이 아니었다.
새로워진 세상을 탐구하던 그는 대학에서 메흐메트라는 남자와 함께 다니는 자난이라는 여대생을 만난다.
정체불명의 책을 읽었던 자난은, 오스만과 정체불명의 책을 논하다가 갑작스럽게 오스만을 향해 입맞춤을 한다.
그리고 자난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종되고,
자난을 찾던 오스만은 메흐메트가 정체불명의 남자에 총탄을 맞고 어디론가 사라진 걸 목격했다.
짝사랑하는 자난이 그리워지고, 메흐메트의 행방까지 궁금한 오스만은 자난을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목적지는 없다. 정해진 기간도 없다.
오로지 자난을 찾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버스를 타며 정처없이 떠돌아다닌다.
정신없이 돌아다녔다는 방증인지 교통사고 현장도 세 번이나 목격한다.
그러다 세 번째 교통사고 버스 현장에서 자난을 찾게 된다. 그러나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자난은 오스만더러 그 책을 읽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고,
이름도 새로 생겼고, 둘은 부부 관계가 되었고, 나린 박사의 회의에 참여한다는 새로운 임무가 생겼다고 선언한다.
나린 박사를 찾아간 그는 어떤 거대한 음모에 저항해야 한다는 계획을 알게 되고,
그와 관련되어 갈수록 알 수 없는 일들에 휘말려갔고, 일의 연쇄를 만들어갔다.

소설 리뷰하러 쓴 책이 아니니 책 이야긴 여기까지만 하겠다.
소설을 자세히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읽다보면 이 스토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
복잡하고 난해한 장치와 은유가 많이 사용되어서 더더욱.


2016년 겨울의 나는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평범하게 대학생활 1년을 즐긴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대학생으로서 전공 수업을 처음 듣기 시작했고, 
복수전공도 신청했고 수용됐고, 
괜찮은 이성 둘 번호 따놓곤 별로라서 포기했다가 이불킥하고, 
저자의 고향 터키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23번의 국내 여행이 있었고, 일본 큐슈와 간사이와 대만이라는 3번의 국제 여행이 있었고, 
사회복무요원 복무를 위해 휴학했고, 그 2년동안 100여 권의 책을 읽었고, 인터넷 방송이라는 신세계를 알게 됐고, 
다이어트를 했고, 외모와 패션을 가꿨고, 
사람들 많이 만나려 여러 커뮤니티와 동호회에 기웃거렸고, 
일상에서 상시적으로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고, 복학해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었고, 
교회를 계속 다닐까 고민하다가 성경 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고, 
영화를 즐기기 시작했고, 
여러 인연을 어쩌다 만나게 됐고, 
대학원에 지원해서 합격했고, 교수님과 행정 담당자들과 이메일을 주고받게 되었다. 
평생 다시 나올까 싶은 귀중한 인연을 내 부족함으로 걷어차는 슬픈 일도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평범해 보이는 인생인데 무언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내 집이, 내 주변 환경이, 심지어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진다.
과거의 내 사진을 보면 나가 아닌 것 같다. 단순히 외모가 많이 달라져서 그런 건 아니다.
수많은 일들이 있었는데도 어떨 땐 신기하다가 어떨 땐 멀뚱멀뚱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아니 '다를 수밖에 없었던' 생활에 종종 놀라게 된다.
어떤 압도적인 힘에 의해 인생이 끌려다니는 것 같다.
알파고의 이세돌 승리,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 최순실과 박근혜 탄핵, 코로나19라는 초인적인 힘도 현실이었는데 오죽하겠나.  
하루하루가 낯설고, 도대체 어디로 가는걸까 궁금함이 든다.
독립영화나 마술적 사실주의 소설의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낀다.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생이다.
정처없이 떠도는 여행같은 인생이라니.
그렇다. 내 인생은 오스만처럼 알 수 없는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 속에서 꼬여버리기 시작했다. 

사실, 세계가 꼬여버렸는데 내가 꼬여버리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알파고의 이세돌 승리, 브렉시트의 예상치 못한 가결, 트럼프의 예상치 못한 당선, 박근혜의 기괴한 스캔들과 탄핵, 백일몽이었던 남북정상회담, NO재팬 신드롬, 아파트값과 가상화폐의 이상급등, 코로나19와 원격의 세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의 호언장담, 갑작스레 뜬 국뽕운동, 갑자기 호러영화가 되버린 중국, 갑자기 낯설고 혐오의 존재가 된 이성, 정체불명의 K-시리즈,
기괴한 UI를 가진 키오스크.
마스크를 써서 새로워진 나의 얼굴 아이덴티티.
KTX보다 싸진 비행기.
책임있는 자유주의를 구사한다는 자발적인 K-방역.
불안할 정도로 들려오는 한국 문화컨텐츠 대성공 소식들.


이 낯설고 무서운 것들은 대체 무엇인가.
내가 사는 세계가 그 세계가 과연 맞는가?
사회과학도로서 낯설게 된 세계를 다루기는 더더욱 조심스럽다. 


『새로운 인생』은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터키 80-90년대의 혼란스러운 사회상, 서양과 동양의 갈등, 신문물과 전통과의 갈등을 단층선에서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내가 지금 사는 세계도 비슷하다. 
코로나19 정국, 갑자기 부상해버린 2021년의 한국, 서구의 혼란상과 비서구의 불안함, 유동성과 버블경제, AI와 디지털경제 속에서 
어디로 치닫을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쯤되면 나는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 한국버전에 살고 있다고 결론지어도 될 듯 하다.


새로운 인생, 여행하는 듯한 느낌의 인생은 사실 치명적이다.
소설에서 자난을 짝사랑하는 오스만의 언행은 찌질하기 짝이 없었고, 이는 파국적인 결말로 이어지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려 여행하다 버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메흐메트와 자난도 사람을 현혹시킨다며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에 대해 경고한다.


아마 내 새로운 인생도 그럴 것이다.
연애와 섹스는 어쩌면 내 정열을 태우고, 내 인생을 낭떠러지로 밀어버릴지 모른다.
새로운 선후배와 친구 관계는 스트레스만 만들고 담배와 술이라는 위험한 취미로 유도할지 모른다.
스트레스 쌓이는 대학원 공부는 나를 자살 직전까지 몰고갈지 모른다.
시대를 뒤흔들 지식인계의 새로운 사상은 나를 형장으로 이끌지 모른다.
새로운 인생을 위한 결혼과 육아는 나의 새로운 인생을 제약할지 모른다.  
특이점 수준의 과학기술은 유나바머의 우려처럼 우리를 노예로 만들지 모른다.

어쩌면 인생은 생로병사의 진리만 남는 공허한 것이라는, 불교적인 결론만 날지 모른다.
더 나아가자면 새로운 인생 따윈 없다는 결론도 가능하고.
누구나 겪을 일을, 시대상이 불안하다는 핑계로 과거에 읽었던 책이랑 억지로 연결해 포장했을 뿐일지 모른다. 
나는 매사에 쓸데없이 진지한 인간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이 있다.
새로운 인생의 결론이 어찌되든, 새로운 인생이 환상임이 드러날지언정,
새로운 인생을 찾는 과정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철학을 한때 전공했기에 잘 안다.
철학에서 결론 이상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추론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주의 실재에 완벽하게 도달할 수 없음을 증명한 논증들이 얼마나 값진지...
그리고 (적어도 내가 인식하는) 새로운 인생은 이미 시작되었으니, 원하지 않는다 해서 피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낯선 세상을 향해 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씁쓸하지만.
나는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 결말이 새로운 인생을 위해 버스여행하다가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하는 따위의 것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나를 새로운 인생으로 부르는 초월적인 존재에 순종하기로 했다.
과거의 인생이 더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이해했고, 
순종 안한다고 새로운 인생이 도로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없다.  
새로운 인생을 이젠 돌이킬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결론이 어찌됐든 간에 내 운명임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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