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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2/16 18:07:40
Name   nickyo
Subject   머리에 꽃 꽂은 그녀
이것도 예전에 써둔거..
이건 제 얘기 아닙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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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그리도 더운 여름날 열대야를 기록할 초저녁에, 나는 에어콘 조차 없는 방을 대청소하고자 했을까? 여전히 이유를 모르겠다. 찜통처럼 찌는 더위에 서랍들마저 지친듯 혓바닥을 길게 빼내어 온갖 물건이 다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었고, 침대 위에는 각종 책들과 옷들로 난장판이다. 책상위에는 다 마신 페트병 몇 개와 햄버거 껍질같은 것들이 널려있다. 더위에 헉헉대며 팬티바람으로 엉덩이를 긁적이다가, 영문도 모르게 그런생각이 들었다. 까짓거, 청소하지 뭐.


온 몸에서 육수를 철철 뿜어내며 정리를 시작했다. 네가 내게 말했듯이 나는 할 때는 하는 사람이고 싶어서, 바닥부터 책상, 책장, 서랍, 침대, 그리고 그 사이사이 먼지까지 청소기 빗자루 걸레 먼지털이 같은 현대문명의 도구들을 이용하여 쓸고 밀고 닦았다. 쓰레기를 싹 버리고 군데군데 늘어붙은 먼지를 싹 닦아내니 그럭저럭 사람사는 방 같아졌다. 여전히 서랍은 헤벌쭉 하게 입을 열고 늘어져 있었다. 게으른 녀석 같으니라고, 주인이 이렇게 열심히 청소를 하면 자기 스스로 정리정돈이라도 하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월트 디즈니 만화동산같은 상상을 하며, 서랍속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들춰내었다. 


-팔락.


얇은 코팅지조차 씌워지지 않은, 다 말라비틀어진 꽃잎이 서랍에서 들춰낸 물건 사이로 떨어졌다. 나는 허공에서 천천히 팔락거리며 떨어지는 꽃 한송이를 보았다. 손에 쥔 물건들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민 빨간 편지봉투를 찾아내었다. 진웅에게. 아, 그랬었지. 너구나. 정말 오랜 시간이 흘러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나는 허리를 숙여 조심스레 꽃을 주웠다. 수분이 없어 퍼석퍼석한것이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듯 했다. 살며시 편지 봉투위에 꽃을 올려 책상 한 켠에 두고, 나는 선풍기를 찾아와 틀었다. 어느새 벌써 초저녁을 지나 밤이 되어간다. 조금 쉬어야 겠다. 너무 덥다. 완전히 잊었던 네가 갑자기 여기저기서 물밀듯 머리속으로 쏟아져 내려와서 그런건 아니었다. 아니, 그래서가 맞았다. 새삼 여전히 너무 선명한 네가 좀 당황스러워서, 잠시 쉬고 싶었다. 




나는 재수를 했었다. 그래서 대학교 1학년에 처음 들어갔을 때에는 아무래도 '한 살 차이'라는 것 때문에 조금 거리감이 있지 않을 까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교내 오리엔테이션에서 술게임에 왕창 지며 잔뜩 술을 들이 붓고, 교외 오티에가서 벌칙게임마다 걸리는 허술함 덕택에 애매했던 거리감을 없앨 수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이 익숙해 지고 서로의 이름을 어색함 없이 부르며 지낼 수 있게 된 3월 초의 입학식에서 나는 처음 너를 보았다. 너는 그러니까, 참 당돌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도화지를 보는 듯이 매끈하고 새하얗던 너, 내 키가 조금 컸기로서니 내 가슴팍까지밖에 오지 않는 아담한 너. 너는 그렇게 한참이나 아래에서, 나를 두드렸다. 등을 툭툭 두들긴 손이 워낙 작아 처음에는 어느 어린이가 공원과 학교를 착각했나 싶었다. 어린이 대공원 바로 맞은 편에 있는 학교니까, 출구를 잘 못 찾으면 그럴법도 하겠다 싶었거든. 게다가 넌 참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덜 자란 듯한, 뭐랄까. 정말 아이같았단 말야. 화장기 하나 없이 고운건, 아이들이나 가능한 거잖아? 그래서 난 네게 말했지. "어떻게 왔어? 공원은 여기가 아닌데. 혹시 가족 입학식에 왔는데 사람을 못찾고있니?" 너는 정말, 황당한 표정으로 대답했지. "야, 너도 08학번이지?" 그 때 참 벙 쪘었는데.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며 "어? 아, 어. 어? 설마 대학생?"하는 되물음에, 그 작은 손바닥을 쫙 펼쳐서 팔뚝을 딱 내려치고는, "잘 부탁해!" 라고 했었지. 아마 넌 어깨를 치고 싶었겠지만 내가 조금 높았던 것 같다. 



너를 두번째로 만난건 4월의 일이었다. 입학식 이후로 전혀 보이지 않길래, 나랑은 학과가 달랐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사이에 학교는 그야말로 술과 연애와 젊음이 온갖 짬뽕이 된 시기였어서 솔직히 널 거의 잊어버리기도 했다. 몸이 좋지 않아 3월 내내 학교를 나오지 못하다가 아이들이 다들 서로에게 너무나 많이 익숙해질 때인 4월 쯔음 그렇게 첫 수업 데뷔를 한 너는 파리한 얼굴에 팔 다리도 가느다란것이, 작은 발로 또박또박 걷는 그 걸음마저 조마조마 해 보이고는 하였다. 뒤로 묶어 내린 새까만 머리와, 마르고 아담한 몸. 안경 쓴 얼굴은 검은 테와 창백한 피부가 대조되어 약간 신비감을 만들던 너는 입학식에서 만난 당돌한 첫 인상과는 다르게 아주 선선히 잘 웃는 아이였다. 내 인상이 험상궂고 덩치가 큰 편이라 아직까지도 친구들은 조금 어려워 했었는데, 그런 내게 먼저 다가와서는 "나도 술 사줘!"라며 당차게 외치던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난다. 참 일관된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친구들이 전부 수업을 통일해 들을 때에도, 나는 유독 내가 듣고 싶은 과목들을 쫒아다녔다. 그런데 묘하게 너는 나와 겹치는 수업이 가장 많았다. 혼자 앉기를 좋아했던 내게 끝까지 옆자리를 밀고 들어와서는 매일같이 배고프다며 징징대고는 했다. 점심시간은 아직 멀었는데! 아침을 안 먹고 오냐는 물음에 먹고 온다는 대답을 하면서도, 배 고픈건 고픈거라고 웃는 너는 참 즐거워 보였다. 하루는 교양 수업 내내 옆에서 배곪은 아기강아지마냥 낑낑대며, 배고프다고 날 보고 엎드린 얼굴로 칭얼대는 널 데리고 수업 중간에 지하 식당을 데려갔다. 그도 그럴게, 네 눈망울이 너무 절박해 보였거든. 지하 식당에서 둘이 라면과 떡볶이를 하나씩 붙들고, 넌 무슨 그렇게 작고 말랐으면서 그 음식들이 대체 어디로 다 들어가는지 하고 핀잔을 주었더니 아까의 망울진 눈망울은 교실에 두고 오기라도 한 듯 새초롬히 흘겨보고는 총총총 걸어가 만두 한 접시를 더 사오고는 그랬다. "넌 무슨 덩치도 산만한게 먹는게 그렇게 째째하냐! 너 이 만두 손대기만 해봐 내가 다 먹을꺼니까!" 앙칼진 네 말에 내가 다이어트 중이라고 투덜대자마자, 살 빼서 뭐하냐며, 자고로 남자는 어느정도 듬직한 맛이 있어야 된다며 자신의 남성관을 줄줄 쏟아내는 네게 난 "식기전에 젓가락질이나 부지런히 하셔야죠?"하며 웃고는 했다. 너는 그러면, 그렇게 떠들면서도 참 신기하게 음식을 쏙쏙 입으로 잘 가져갔었다. 참 많이 웃었던 것 같다.




한 학기가 끝나 갈때쯤, 학과 친구들은 우리 둘을 보며 야수와 마녀라고 했다. 덩치크고 무서운 남자와 창백하고 가녀린 여자. 허구한 날 붙어다니며 투덜대는 우리 모습이 그네들한테는 꽤 귀엽게 느껴졌었나 보다. 그 애는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 방학때 자기 못 본다고 너무 속상해 하지 말라며 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뒷꿈치를 슬쩍 들어서 내 어깨를 탁탁 치고는 돌아서는 옆 모습에 약간 쓸쓸한 얼굴이 보였다. 그 표정이 어딘가 쿵 하고 마음을 건드린 참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잡아 세운다는 것이 그만 뒷 머리를 잡아버려 학교 복도에는 아야야! 하는 비명소리가 영롱히 울려퍼졌다. 앗차 하고 손을 놓자 뒤로 몇 걸음 휘청 휘청 하던 그 애는 스니커즈를 신은 발로 내 정강이를 퍽 찼다. 그리고는 무슨 놈의 다리통이 이리 단단하냐며 자신의 발을 붙잡고는 쭈그려 앉아서 울상으로 올려다 보는것이다.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들킬까 싶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방학때 밥이나 먹게 종종 보자." 생각보다 무뚝뚝하게 튀어나온 말에 아차-싶었지만, 그 애는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는 찰싹 소리가 나게 내 어깨를 치며 말했다. "진웅! 네가 그렇게 날 보고 싶다면 니가 밥을 사라!" 그 당당함에 푸핫-하고 웃으며, 우리는 여름을 맞이했다.





그 해의 여름은 무진장 더웠다. 집에서 학교까지 오는 버스의 에어콘이 없었더라면, 난 집 밖을 나설 엄두를 못 냈을꺼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바퀴벌레마냥 하루가 멀다하고 만났다. 할일도 없으면서 학교에 기어나와서는 캠퍼스를 빙글빙글 돌다가, 이제는 너무 자주 가서 익숙한 맞은편의 어린이 대공원도 갔다가, 옆 학교의 커다란 호수에 오리를 보러도 갔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하나씩 물고는 뭐가 이리 덥냐며 셔츠를 펄럭이다가 슬쩍 보이는 무방비한 살색에 나도 모르게 눈을 뱅글뱅글 돌리면 되려 "내가 좀 섹시하지? 이쁜건 알아가지구."라며 눈을 흘기곤 했다. 내가 언제 그랬냐며, 너는 그냥 완전 초등학생이라고 당황해서 버럭 할 때마다 그 애는 약이라도 올리는 듯 더 크게 가슴팍을 펄럭이며 그럼 왜 눈을 못 마주치냐고 실실 웃는 것이다. "초등학생 같다면서 뭘 그렇게 긴장하냐! 너 설마.. 어린이쪽 취향이야? 대박 너 완전 변태구나!" 이제 아주 제 멋대로 날 가지고 놀려고 하는 너에게, 나는 오기가 생겨 얼굴을 확 들이밀고 펄럭이는 옷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시선을 옮겼다. 셔츠 안에는 흰 무지 캐미솔이 있었다. 너는 깔깔대며 얼굴이 빨개진 내 얼굴을 두 손으로 팍 밀치고는 배를 잡고 한참이나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그 곳에 있었다.  단발머리로 자른 모습이 너무 예뻤지만 모르는 척 하는 내게 바뀐게 없냐고 계속 머리를 매만지던 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뻥 걷어찰 때에도, 낡아빠진 컨버스를 신는 나에게 어느날 갑자기 대뜸 있지도 않은 오빠 타령을 하며 집에 굴러다니던게 네 것보다 깨끗하다며 준 새 컨버스를 받을 때에도, 사이즈가 맞지 않아 발이 채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며 울상이 된 네가 "멍청한 알바가 그러니까 더 커야 된다고 했는데도.."라며 중얼대며 신발을 다시 뺏아갈때에도, 길가에 피어난 꽃 한송이를 꺾어 머리에 꽂고는, 너도 꽂아주겠다며 숨결이 섞이는 거리까지 다가와서 까치발을 들고 고개숙인 내 머리를 매만지는 너에게. 나는 이 모든 일들에서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갈까 두려웠다. 귀까지 새빨개질것만 같아서 무슨 꽃은 꽃이냐고 도망을 가버렸었지. 갑자기 불현듯 옛날 핸드폰 생각이 났다. 나는 나머지 서랍을 다 뒤집어 엎어 옛날 핸드폰을 찾았다. 바닥은 언제 청소했냐는 듯이 다시 서랍에서 쏟아진 잡동사니가 한가득이다. 충전기를 꽂으니 다행히 전원이 들어온다. 아, 너다. 분홍빛 꽃을 머리에 꽃고 크게 웃는 네가 사진속에 있었다. 너다. 여기 네가 있다.





핸드폰에 남겨진 너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돌려보았다. 언제나 너는 웃고 있었다. 적어도 내게 우리의 매일은 위험한 외줄타기 처럼, 마음을 들킬 까 싶어 조마조마했던 나날들이었는데 너는 참 환히 웃고 있다. 내게는 마음이 아슬아슬하게 살랑이면서도 특별한 일 없이, 시간이 빠른 듯 혹은 느린 듯 지나는 하루하루였다. 언제나 먹는 학교 밥이 질리면 한시간이 넘게 걸어가서 이상한 음식점을 들어가 보기도 하고, 서로 주머니를 탈탈 털어 겨우겨우 소주 두병을 사가지고는 과실에서 둘이 홀짝 홀짝 마시기도 했다. 술이 취하면 배시시 웃는 그 애가 조금 두렵기는 했지만, 다행히 그 아이는 술이 조금만 들어가도 엎어져 잠들곤 했다. 가끔은 아침까지 한 명은 책상에서, 한 명은 쇼파에서 자고 일어나 아침에 안녕-하고 집으로 가서, 다음날 똑같은 시간에 안녕-하고 만나곤 했다. 너는 그 어느때에도 웃어주었다. 핸드폰의 사진을 다 돌려보면서, 조금 더 사진을 찍어뒀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집까지 데려다 달라는 말에 엿이나 먹으라고, 티격태격대면서도 끝까지 쫄래쫄래 너를 따라갔던 일, 내게 한 입만 달라던 아이스크림을 그 작은 입을 힘껏 벌리고 한번에 왕창 넣었다가 코가 시큰거려 눈물을 찔끔거리며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발을 동당대던 너, 때때로 별것 아닌 일에 신나게 투닥대다가 우연찮게 마주친 눈에 말을 잃고 잠깐의 침묵이 부끄러워 금세 고개를 돌렸던 일, 바보도 안걸린다는 여름감기에 걸렸을 때 이마를 맞대며 열이 왜이리 높냐는 말에 속으로 너때문에 심장이 벌렁거려서 그렇다며 비명을 지른 일. 도서관에서 마주보고 앉아 졸고 있는 너의 약간 벌어진 분홍색 입술만 바라보다가 네가 조금 움찔 할 때마다 들켰나 싶어 고개를 숙이느라 한시간 동안 같은 페이지만 수십번 읽었던 일. 술을 진탕 마시고는 화장실을 가고싶다며 비틀대며 책상위에 올라가  볼일을 보려던 너를 들쳐 업고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여자화장실까지 들어갔다 나온 일. 잘 생긴 남자가 번호를 따갔다며 자랑하는 네가 괜시리 미워 오늘은 바쁘다고 차가운 답장을 보내며 이미 학교에 도착해 있을 너를 보기가 싫어져 학교 앞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던 일. 무작정 따라오라며 잡는 네 손이 생각보다 차가워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꼬옥 잡자, 휘둥그래진 눈으로 징그럽다면서도 손을 빼지 않은 채 고개를 돌리던 네 빨개진 귓볼까지. 뜨거운 여름에 하루도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던 나날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정말 하나도 남김없이, 어딘가에 고이 남겨둔 것 처럼 네 기억들이 온전히 살아있다.






2학기를 일주일 앞두고, 너는 내게 가족여행을 간다며 나중에 보자는 짧은 문자 하나를 남겨두고 훌쩍 떠났다. 그때쯤 난 동네 친구들에게 머쓱해하며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슬쩍 운을 띄울 때마다 '오오오오~~~~'라는 환호성을 듣고는 했다. 어색한 쑥쓰러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그러나, 난 태연한 너의 이별 문자가 우리의 마지막임을 알게 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무더운 여름이 끝자락을 맞이하고 2학기가 되어도 너는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여행을 조금 길게 가서 수강정정기간동안에는 자체휴강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주가 지나도록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너를 찾으려 나는 하루 종일 학교를 돌아다니며 네 그림자를 쫒았다. 전화번호는 여전히 먹통이었다. 혹시 나랑 수업을 다 다른걸 듣는 걸까? 전과를 한걸까? 하지만 2학기가 다 가도록 너의 흔적은 학교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내게 남겨진 것은, 네게 노래하며 쳐 주고 싶던 기타와 한 쪽 어깨에 기댄 따뜻한 기억, 그리고 수줍어 자세히 담지 못한 희고 고왔던 살결의 내음과 꽃 한송이가 머리에 참 잘어울리는 네 사진뿐이었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시원히 묻지 못한 채 정처없이 너를 그리며 터덜터덜 학교를 다녔다.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쓸쓸한 가을바람이 옆구리를 간질일 무렵에, 너와 친하게 지냈던 아이가 내게 한 통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나는 빨간색 편지봉투에 네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수십가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그 자리를 피했다. 집에 돌아 오는 버스의 의자에 앉아 쿵쾅대는 마음을 억누르며 살짝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네 편지를 뜯자 빨간 봉투사이로 너와 함께한 여름 내음이 가득히 느껴지는 듯 했다. 마치 옆에서 캐미솔에 얇은 셔츠 한장을 걸친 채 다리를 펄럭거리며 떠들던 그 때 처럼.




안녕! 네가 이거 읽을 때 쯤 나는 독일에 있을꺼야 독일!

넌 분명히 나 없다고 또 우울해져있겠지?
너랑 놀아주는건 나 혼자였는데 이제 어떡하면좋니..
너 혼자서는 친구도 잘 못 만들잖아. 누나는 니가 참 걱정이다.
나 사실 꽤 오랬동안 외국으로 나가! 언제 돌아올지는 아직 모르겠어.
일부러 니가 울고불고 난리칠까봐 이렇게 훌쩍 떠난다!
너무 섭섭해하지 말구..
독일에서 좀 쉬면서 건강해질거야.
살도 좀 찌고 싶고, 키도 좀 더 컸으면 좋겠는데.
잘 되려나? 


한국으로 돌아가면 또 만났으면 좋겠어.
빨리 가고싶다. 벌써부터 보고 싶네.
내 어리광 매일 받아줘서 고마워!
나한테는 꿈만 같은 매일매일 이었어.
나 글씨 진짜 못쓴다..
분명 너 읽으면서 한심하다고 생각하겠지?
되는대로 읽어 임마! 이렇게 써주는게 어디냐! 
고마운 줄 알아야지. 너 나같은 미인이 이렇게 잘 해주는거 흔한 일 아니야. 복받은 거야.

헤헤..


다음에 만날때,
애인 만들구 그러면 배신이다 너!
얼른 군대도 갔다오구! 그래야 나 돌아가면 매일 또 같이 놀지.
나 금방 갈꺼야. 그러니까 진짜, 못 알아 보면 엄청 미워할꺼니까!
잊으면 안돼!

...

보고싶을꺼야..
다시 만나면 말야, 나 꼭 안아줘야한다!!
수줍어 하지말고 멍충아 등치는 산만한게 으휴.
너 남자 맞냐?

...

내 스무살을 행복하게 해줘서 고마워!
내가 많이 좋아하고 있는거 알지?
돌아왔을 때 잘해라 짜식아 히히

그럼 건강하게 잘 있어!
나도 여기서 힘 낼게! 안녕.




짤막한 편지를 읽었을 때에, 무언가 뭉클한 느낌이 들었었다. 학교를 다녀와 채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한숨이 푹 나왔다. 좋아한다고 말할 걸 그랬어. 침대위에 덩그러니 누워있는, 밤마다 연습했던 기타를 들었다. 네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었다. 그날은 조금 늦게 들려주지 뭐 하고 생각하며 나를 달래어 보았지만, 금세 돌아오겠거니 했던 그 아이는 그 뒤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너를 대신해 돌아온 것은 두 통의 편지였고, 그것은 그 아이가 아닌 그 아이의 어머니께서 보낸 것이었다. 국제우편으로 온 두 통의 편지중 내 앞으로만 온 것을 받아 열어보니, 그때 네가 꽂아주려 했던 한 송이 꽃과, 약간 눈물이 얼룩져 쭈글해진 편지지가 들어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미안하다는 말만 잔뜩 있는 바람에 금세 눈가가 흐려져서 잘 읽을 수 없게 되버렸다. 남 몰래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도 자꾸 울렁거리는 글씨는 제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그러는 동안에 난 그 아이가 지금쯤 내가 도저히 찾아갈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갔다는 것을 머리로나마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배웠다. 독일 하늘은 어느쪽인지 몰라서 무작정 기타를 들고 노래했다. 태우지 못한 담배와 덩그러니 놓인 술잔 두잔. 돌아오지 않을 그 아이에게 노래했다. 이제는 도착하지 못할 편지를 노래했다. 부칠 곳 없는 마음을 노래했다. 하늘로 올라가는 담배연기가 독일하늘에 닿을까 싶어 울먹이며 노래했던 그 날이 떠올라서 콧등이 시큰해졌다. 이미 한참이나 지난 일인걸. 청춘이었구나, 하고 씨익 웃어보려했지만 그 여름날의 기쁨이 아파서 요상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선풍기 바람에 대충 땀이 식었다. 나는 다 말라 비틀어진 꽃을 아주 조심스레 버리지 못한 그 편지 사이에 넣고 소중히 접어 서랍 한 켠에 두었다. 깔끔해진 방 한켠에 놓인 먼지쌓인 기타를 보며, 아직까지 애인이 없는건 다 너 때문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레 못된 년, 하고 중얼거려보았다. 다시 만나자더니. 하여튼 너는 너무 제멋대로야. 알았어, 아직 안 잊어버렸으니까 너무 섭섭해 하지마. 기타의 먼지를 툭툭 털었다. 영 키를 잡는 것이 어색했다.



기억해. 너의 활짝 핀 꽃보다 환했던 미소를. 
네 머리에 꽂았던 꽃은 여전히 여기에 있어
너무나 고요한 밤이야. 귀가 쑤실 정도로
나도 너도 잠들지 않은 밤인데
아직 이 목소리로 소중한 것들을 전할 수 있다면
또 다시, 뭐라고 하든 좋으니까 네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을래. 
알고 있어. 이젠 떠나고 싶은 거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잖아. 넌 나의 유일한 사람인걸.
우리들은 무언가를 잃은게 아니야.
동이 트는 순간은 언제나 따분했었지만
너와 함께였을 때에는 평소와 다른 태양빛이 방 한 구석을 비추었어
마치 집시처럼 자유롭게 해메다가
우리들은 만났던 거니까.
그러니까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꺼야. 
언젠가 어디에서라도. 잊을 수 있을 리 없잖아. 넌 나의 유일한 사람인걸.
유쾌했던 때를 떠올려 봐
그 모든 일들이 눈물로 흘러내리는 것, 가끔은 그것도 좋아.
함께 보냈던 나날들이 여전히 여기에 있어. 
틀림없이 다시 만날 수 있을꺼야. 언제 어디선가.
잊을 수 있을 리 없잖아. 넌 내 유일한 사람인걸.
잊을 수 있을 리 없잖아. 넌 내 유일한 사람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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