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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7/19 14:35:09
Name   틸트
Subject   괜찮아. 스로틀은 살아 있으니까.
누군가 주차장 한 구석에 잘 세워둔 내 바이크를 쓰러뜨렸다. 며칠 전의 일이다. 몇 주 전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퇴근해서 바이크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한 시간 정도 자전거 산책을 다녀온 어느 날의 일이었다. 바로 그 한 시간 동안 어느 애미뒤진-만약 아니라면, 3인칭 단수 의지미래로 애미뒤질-새끼가 내 바이크를 엎어놓았다. 덕분에 클러치 레버와 좌측 사이드미러와 깜빡이 스위치와 아무튼 왼쪽 핸들에 붙어 있는 여러 장비들이 박살났다. 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결국 미제 사건이 되었다. 어차피 못 잡을 건 알았지만, 신고라도 하지 않는다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지랄발광을 하다가 동네 주민의 신고로 파출소에 끌려가게 될 게 분명했으니.

덕분에 며칠간 혹은 몇주간 바이크를 타지 않았다. 비도 많이 오고, 자전거도 재밌고, 일도 바빴고, 여러가지 핑계를 대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가지 핑계를 대더라도 결론은 하나다. 아무래도 클러치 레버도 없고 사이드미러도 없는 바이크를 타는 건 힘이 드는 일이고, 애초에 그 꼴을 보고 있는 것도 마음이 아픈 일이다. 아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전용 주차장이라거나, 하다못해 CCTV라도 설치할 돈이 있었더라면.

며칠 전에 알 수 없는 연락이 왔다. 알 수 없는 잡지사에서 바이크에 대한 짧은 기사를 준비하며, 바이크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여기저기 바이크에 대한 똥글을 쓴 덕인가. 그보다는 내 바이크가 워낙 오래된, 그러니까 90년대에 단종된, 꽤나 이쁜 올드 바이크이기 때문일 것이다. 글에는 힘이 없다. 나는 기자에게 사정을 말했다. 아. 제 바이크가 지금 정상이 아니라서요. 그는 그렇다면 세워둔 근처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했다.

다행히 촬영 스팟은 멀지 않았다. 끌고서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역시 무척 더운 날이었다. 3미터쯤 끌다가 시동을 켜보았다. 키기기기기깅. 키기기기깅. 키이이잉. 키잉. 피시식. 키기기기깅. 키깅. 피식. 역시 일발시동 같은 건 무리다. 스로틀을 꺾으며 셀모터 스위치를 눌러본다. 키기기부다다당구가가강키기깅피시식. 키기기깅구다다당다다부아앙오가아아앙. 시동이 걸린다. 바이크에 올라타 끄트머리만 남은 클러치 레버를 당기며 스로틀을 당긴다. 손이 저린다. 1단으로 덜덜거리며 약속 장소에 갔다. 촬영을 마치고, 오랜만에 바이크를 타고 동네 마실을 돌았다. 꼬다리만 남은 클러치 레버를 당기자니 손이 저렸다. 왼쪽 사이드 미러가 없다는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 왼쪽 차선에서 달리는 놈들은 보통은 사이드미러로 감식할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 하이웨이의 미치광이들인지라, 언제나 고개를 돌려 확인하고는 했으니까. 시원했다. 그래. 이 감성이지.

후로 며칠간 자전거에 눈도 대지 않고 바이크를 타고 다녔다. 나란 놈은 정말 가볍다. 한동안 자전거만 탔더니 이제 바이크가 익숙하지 않다. 왜 이렇게 무겁고 둔해. 하긴, 따릉이 자전거는 18kg고 내 바이크는 199kg다. 열한 배의 무게란. 그렇게 모두 예상하다시피, 누웠다. 다행히 구른 건 아니다. 그냥 언덕에서 무게중심을 잃고 제자리에서 넘어졌다. 18kg짜리 자전거를 허벅지 힘으로 언덕 코너에 세워두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199kg짜리 바이크를 언덕 코너에 잠시 정차해두려는 건 역시 보통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번엔 오른쪽이 갈렸다. 염병. 완전히 내 잘못이다. 이번에는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어기여차 바이크를 일으켰다. 다행히 아무 문제 없었다. 시동도 잘 걸렸다. 가야 할 곳에 도착해 브레이크 페달을 밟는데, 어, 공허하다. 뭐야. 내리고 세워 확인했다. 이런 제기랄, 풋브레이크 페달이 휘었다. 허 이거 참 나 원 되는 게 없군. 누구를 탓할 건 없지만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마음인데. 나는 이번에 세무 공무원을 탓하기로 했다. 분명 지난번의 세금 신고때 세금이 이상하게 적게 나왔고, 나는 의문을 표시했으나 담당 공무원은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연락이 왔다. 세금 신고를 잘못하셨다고. 담당 직원의 잘못이니 과징금은 면해 주겠으나 원래 내셔야 할 돈은 내셔야 한다고. 염병, 그렇게 쌩돈을 날리지만 않았어도-나는 그날 굉장히 오랜만에, 내 싸인을 하면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나는 언덕에 바이크를 잠시 세우겠다는 개똥머저리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 제기랄. 되는 게 없군.

하여 엉망 진창이다. 나는 악력기를 쥐는 심정으로 클러치 레버를 당기며 기어 변속을 해야 하고, 다리를 오무린 채 쪼다같은 자세로 풋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며, 차선 변경을 할 때마다 고개를 돌려야 한다. 아무리 감성으로 타는 바이크라지만 역시 이건 너무하다. 수리를 받아야 하겠지만 이번 달은 세금에 출장에 아. 훌륭하군. 뭔가 바이크나 인생이나 꼬라지가 비슷하다. 눈 뜨고 봐주기 힘들군. 아, 情け無い. 나사케나이. 틈틈히 일본어를 공부하다가 얼마 전에 재미있는 표현을 찾았다. 한자 두 개를 통해 '정이 없다.'는 뜻으로 유추될 수 있는 이 단어는 실제로 가끔씩 '무정하다, 정떨어진다' 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나 주로 사용되는 의미는 이러하다고 한다 : <한심하군> 아. 한심하군. 별 의미 없는 이 단어에 꽂힌 이유는 역시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그러니까 aiko가-어느 라이브 영상-그러니까 기모노를 입고 プラマイ를 부르는 영상에서-에서 저 단어를 노래하며 손을 절래 털며 정말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아, 이런 상황마저도 상당히 충분히 한심하군.

에이. 그래도 괜찮아. 바이크나 나나, 아직 스로틀은 멀쩡하게 살아 있다. 엔진도 멀쩡하다. 아, 물론 구식 캬브엔진의 바큠이 제멋대로라 스로틀을 당기는 대로 엔진이 움직이지는 않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스로틀을 당기면 엔진은 움직이고 나는 우리는 갈 길을 간다. 부러진 건 붙히면 되고 고장난 건 고치면 된다. 끝날 때 까지 끝난 게 아니다. 가야지. 가자. 가다 보면 뭐든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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