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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1/11 22:30:51
Name   알료사
File #1   도선우.jpg (64.5 KB), Download : 0
Subject   늦깍이 문학중년


도선우 (사업가, 46세)

"저는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사람이었어요. 한때는 만난 사람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으면 대학노트 한 권이 꽉 찰 정도였어요.
수천 명의 사람들을 만났어요. 이십대에 시작한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어요. 그러다 IMF때 부도가 났고 오갈 데가 없어 여인숙에서 먹고
자기도 했습니다. 몇 년 동안 방황하다 재기했어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궤도에 올라왔습니다. 부하직원이 김훈의 칼의 노래를
추천하자 그런거 읽을 시간에 시사주간지를 읽으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서른 일곱이 될 때까지."

"언젠가 피터 드러커 책을 주문했어요. (경영학 관련 도서였는듯) 배송된 책에 다른 책 한 권이 원플러스 원으로 딸려왔어요. 뭐야? 소설이이야?
책상에 두고 커피잔 덮는 뚜껑으로 썼습니다. 어느 날 접대 술자리가 있었는데 나쁜 일이 있어 자리를 엎고 나왔습니다. 신림동에서 회사가 있는
양재까지 걸어왔어요. 사무실로 와서 취한 상태로 커피잔 뚜껑으로 쓰던 책을 들춰봤습니다. 새벽 네신가부터 직원들 출근할 때까지 다 읽었어요."

"가끔은 그런 엄청난 사건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이 딱 내 이야기를 발견할 때가 있어요. 말할 수 없이 반갑고
놀라웠죠. 그 책은 호밀밭의 파수꾼 이었어요. 부하직원 책상에 놓여 있던 칼의 노래도 읽었어요. 연타를 맞았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신이 소금창고에서 숨죽여 우는 장면이었어요. 소설이 이런 거였나. 바로 인터넷 서점으로 들어가 소설들을 죽 클릭했습니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주문했어요. 한번 둑이 무너지니 감당이 안 되었어요. 일 년 동안 이백 오십 권을 읽었고 그중 이백 권이 소설이었습니다."

"일 년이 지나자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마감일이 가까운 공모전을 찾아 단편소설을 써 냈어요. 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뿌듯했는데 누가 본심에 올랐다고 알려줬어요. 그 후 육 년 동안 오십번 정도 응모를 했고 모두 떨어졌습니다. 소설도 계속 읽었어요. 일 년에
이백권 정도 십년을 읽으며 블로그에 리뷰를 올렸습니다. 공모전을 계속 떨어지게 되니까 처음에 쓴 단편소설 본심 올려준 사람을 찾아내
때려 주고 싶었어요. 나는 안 되겠다. 이건 어쩌면 공정하지 않은 게임일지도 모른다. 왜 그런 생각을 했냐면, 제가 사는 세계가 공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재미있었어요.  쓰는 게 재미있었어요. 술자리에서도 할 수 없는 말을,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마음껏 할 수가 있었어요.  
무얼 하든 진짜가 되고 싶었는데 사업으로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돈을 버는 것 자체가 진짜와는 거리가 멀어요."

"소설만 쓰면서 살 수 있을까 싶어서 최저생활비만으로 살아봤어요. 평생 이 생활을 반복할 수 있을지. 이십 년은 살 수 있을것 같았어요.
내 글이 책으로 나오지 않아도 원고만 가지고 있어도 좋았어요."





일전에 타임라인에도 몇변 올렸었는데 너무 반복적으로 광고하듯이 올리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조금 길게 소개하고 싶어 티타임에 올립니다. 간단한 감상문도 올림겸 해서요.  

네이버 파워블로그 중에 '까칠한 비토씨'라고 도서 리뷰 블로그가 있었는데 어느날 정확하게 이천 번째 책 리뷰를 하면서 이번에 리뷰할 책은 자기가 쓴 거라는 거에요. 자기가 쓴 '스파링'이라는 작품이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해 책으로 나왔다면서 .

스타 프로게이머 도재욱 선수의 이름을 저는 도재욱이 데뷔하기 약 1년 전에 들었었습니다. 다른 경기 도중에 엄전김이 WCG예선 소식을 전하면서 깜짝 놀란 목소리로 어떤 아마추어가 전상욱에게 질럿 드래군만으로 한 세트를 따냈다는 겁니다. SO1의 오영종 우승 때부터 스타를 보기 시작했던 저였고 그당시 프로토스에게 전상욱은 정말 넘기 힘든 벽이었거든요.. 그런 것이 정말 가능한가.. 하고 넘어갔었는데 1년 정도 지난 어느날 그 도재욱이 SKT유니폼을 입고 티비에 나오더란 겁니다. 반가운 마음에 그때부터 일부러 챙겨봤는데 생각보다 실망스러웠어요. 점차 경험을 쌓으면서 오늘날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물량토스 도재욱으로 성장하기는 했지만 신인시절은 기본기 부족하고 미숙한, 말 그대로 평범한 신인이었습니다.


도선우의 두 소설 '스파링' 과 '저스티스맨' 도 약간은 그런 느낌이네요. 뭔가 소설을 읽는게 아니라 블로그에서 자기 할 말 시원하게 하는 그런 글을 읽는 느낌? ㅋ 까고 싶은 걸 까고 빨고 싶은 걸 빠는데 전체적으로 흥분되어 있는거 같아요. 사이다일때도 있는데.. 마치 커뮤니티에서 어그로들이 지들끼리 말꼬리 물고늘어지면서 싸우고 있는데 보다못한 현자 유저가 통쾌하게 상황정리하는 댓글을 다는 것 같은.. ㅋ



스파링은 타임라인에서도 소개한 것처럼 권투소설입니다. 너~ 무 뻔한 권투소설이에요. 내일의 죠.. 더 파이팅.. 록키.. 등등의 소설 버전..

초반부터 어 .. 이거 설마 이렇게 전개되진 않겠지.. 그럼 너무 뻔하잖아..  그런데 끝날때까지 진짜 그렇게 되더라구요 ;;

작가 인터뷰에서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설정이다. 기존의 이야기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에서 고민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자

'나는 그런 설정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다' 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러고보니까 저도 [권투소설]은 읽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것 같아요 ;; 있을법도 한데...

아마 그래서 익숙한 듯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받으며 읽었는지도 모릅니다. 영상으로 보는 것과 글로 읽는 것은 정말 많이 다르니까요.

그리고 하나 차별화되는 부분이 있다면.. 구조적 폭력과 부조리에 관한 묘사입니다.  

스파링의 주인공은 학창시절에는 일진들과, 권투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상대 선수와 싸우게 되는데 모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적수가 없다시피 합니다.

학창시절에는 거의 원펀치로 기절시켜버리고 권투시합에서도 1~2라운드 안에 케이오승을 거둡니다. 접전을 벌인 상대가 단 한명도 없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한 주인공이 상대해야 했던 건 말하자면 '그 지역 전체를 장악한 조직적인 엄석대' 비슷한 거였어요.

약한 학생들을 억누르고는 있지만 나름 체계적으로 자잘한 폭력들을 근절하여 선생과 학부모들에게조차 인정받는 그런 조직이었어요.

하지만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걷고 그들의 뜻을 거스르면 결국 힘으로 다스린다는 점에서 주인공이 보기에는 똑같이 나쁜 놈들이었고

주인공의 실력을 알아본 이른바 '선도연합회'가 상당한 수준의 대우를 약속하며 협력을 요청했을 때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선도연합회는 주인공에게 얻어터질 만한 적당한 놈에게 보복을 지시했고 언제나처럼 단 한방에 나가떨어진 똘마니에게 변호사를 붙여 고발을 합니다. 주인공은 소년원에 가게 되죠.

소년원에서 만난 '담임'과의 인연으로 권투를 시작하게 된 주인공이 부딪힌 난관은 '연맹'과의 갈등이었어요.

전국체전에서 성과를 보여 국가대표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까지 되자 '담임'은 주인공을 '대한체고'에 진학시키려 합니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주관하는 단체가 '연맹'이었고 모든 경기를 케이오로 이기지 않는 이상 판정에서 '연맹'소속 선수들이 유리하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대한체고'와 '대한체대'가 모두 연맹의 라인이라는 거였어요.

그런 시스템이 싫기도 했고, 대한체고에 입학하려면 '담임'과 헤어져야 했기 때문에 주인공은 거절합니다.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한 주인공은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모든 경기를 케이오로 이기며 올라가다가 사실상의 결승전과 같은 경기에서 대한체고 소속의 아웃복서를 만납니다.

그는 싸우려 하지 않고 계속 도망다녔는데 주심은 한 번도 경고를 주지 않았어요.

주인공은 항의의 의사표시로 두 팔을 늘어뜨리고 서서 상대를 쏘아보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링 외곽을 돌기만 했고 주심은 오히려 주인공에게 경고를 주었어요.

어쩔 수 없이 끈질기게 상대에게 돌격해 겨우 일격을 먹여 넘어뜨렸는데 심판은 카운트를 세지 않고 기다리다가 슬립다운을 선언합니다.

보다 못한 세컨드에서 수건을 던지고 주인공은 그냥 미련없이 집에 갑니다.

국가대표는 포기하고 그냥 '담임'이 관장으로 있는 체육관 일이나 도우며 살기로 마음먹은 주인공에게 어느날 '한영기'라는 프로모터가 찾아옵니다.

'담임'의 보육원 동창이었던 그는 주인공을 데려가려고 하고 주인공이 상업적으로 이용당하고 혹사당할것을 걱정한 '담임'은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지만

주인공이 세계챔피언이 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치며 시합 일정을 '담임'이 통제한다는 조건 하에 계약을 성사시키고 멀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주먹 쓰는 학생인데 싸우는 상대는 주먹 쓰는 학생이(혹은 성인 건달이) 아니고, 주먹 쓰는 권투선수인데 싸우는 상대는 경기장의 권투선수가 아닌, 그런데 주먹밖에 쓸 줄 모르는 주인공이 어떻게 싸워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그런 소설이에요.

아래로는 소설 후반부 개인적으로 감동적이었던 부분 요약발췌입니다. 스포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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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바라보는 빅매치의 막이 올랐고 화려한 조명과 관중들의 함성이 라스베이커스 특설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일 라운드 공이 울렸고 나는 존의 몸통을 향해 파고들었다.

존은 아웃복서답게 치고 빠지는 공격을 매끄럽게 연결했다.

그의 몸놀림이 가벼워 나는 무턱대고 파고들 수 없었다.

담임은 존을 나의 거리 안에 가두라고 계속 고함을 질렀다.

칠 라운드에 들어서면서 팽팽했던 공방이 기울어졌다.

칠 라운드를 뛰어본 적이 없었던 내가 급격한 체력 저하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사실을 존도 눈치챈듯 물러서던 간격이 점차 줄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게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패배의 예감이었다.

느닷없이 나는 가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권투경기는 십이 라운드인데 나는 늘 사 라운드를 넘기지 않았으므로 내가 가짜인지 몰랐던 거였다.

진짜는 끝까지 가야 하는 건데.

공기에서 돌기가 느껴졌고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목구멍이 긁혀 조여드는거 같았다.

폐와 기도 사이에 철판이 놓여 있는거 같아 호흡 자체가 고역이었다.

할아버지가 생각나고 누나 생각도 났다. 미안했다.

담임에게 미안했고 모두에게 미안했다.

그동안 진짜인 것처럼 속여서 미안해요.

그러니까 그게, 나였다.

나는 힘을 가지면 변하는 인간이었다.

선도연합회 깡패들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내가 선도연합회를 경멸했던 이유는 나와 달라서가 아니라 나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그들이 가진 힘이 내게 없었으므로 그들과 다른 척하고 있었다는게 이제 드러났다.

신념도 실력도 모든게 들통나고 말았다.

집중력이 서서히 흐트러지고 날아오는 주먹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누구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건지도 이제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더 검증하려 하는가.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이제 정말 그만하려는 순간 공이 울렸다.

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담임이 링에 올라와 황급히 나를 코너로 끌고 갔다.

관중들이 존을 연호하는 소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았고 내 앞에 담임의 얼굴이 나타났다.

손을 들어 담임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글러브 안에 손이 갇혀 있어 풀고 싶었지만 풀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선생님. 하고 말했지만

입술이 움직인 것은 분명히 느껴졌는데 그 말이 내 머릿속에서만 울린 것인지 아니면 소리가 만들어져 밖으로 나갔는지 헷갈렸다.

문득 이곳은 소년원 교무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임이 내 뺨을 수차례 후려갈기며 말했다.

'시합에 집중해! 저놈도 발이 느려지고 있어! 숨이 가빠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있어! 이번에 올라가서 완전히 끝내! 이번 라운드에 끝내고 집에가자, 태주야!
잘 들어, 저놈 너한테 슥 빡 넣고 뒤로 빠질 때 가드 떨어져. 그때 따라 들어가면서 안면 잽 넣어. 그렇게 가드 올리게 하고 바로 몸통 찍어. 알아듣겠어?
안면 유인하고 몸통 찍어, 알겠지! 너는 아직도 힘이 충분히 남아 있어!'

내게 아직도 힘이 남아 있는가.

팔 라운드 공이 울린 뒤 들어가보니 과연 존의 움직임도 많이 둔해져 있었다.

창의적인 공격보다는 훈련으로 연마된 무의식적인 패턴공격이 자주 나왔다.

다가와서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넣는 것과 동시에 뒤로 물러났는데 정말 담임의 말처럼 안면이 열렸다.

하지만 내가 곧바로 따라 들어가 스트레이트를 꽂기엔 나의 발이 너무 느렸다.

아, 그러네. 무슨말인지 알았어.

나는 안면으로 잽을 넣으면서 거리를 좁히는 동시에 가드를 올리게 하고 비는 옆구리에 어퍼컷을 꽂았다.

담임이 내게 남아 있다고 말한 그 마지막 힘을 거기에 모조리 쏟아넣었다.

존은 옆구리를 감싸안고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주심이 나를 코너로 보내고 카운트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주심이 두 팔을 허공에 휘저어대자 그제야 나의 귀도 트였고 홍수처럼 쏟아져들어오는 사람들의 함성에 링이 흔들리는걸 느꼈다.

담임이 링 위로 뛰어올라와 나를 들어올리고는 사각의 링 곳곳을 돌아다녔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존을 목놓아 부르던 이들이 지금 우레와 같이 미스터 티, 미스터 티를 연호하고 있었다.

나는 미스터 티가 아니고 장태주다.

오만 나쁜 놈들이 착한 척은 있는 대로 다 하고 사는 세계 안에 머물러 있던 장태주가 있었다.

그곳이 그런 세계라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스스로 위악을 선택했던 장태주가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누군가가 나에 대해 평가하는걸 싫어했다.

그들의 평가가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 평가에 휘둘리는 나 자신이 싫어서였다.

나도 모르는 내가 그들의 말에 의해 자꾸 정의되다보니 나는 시종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 모든 불안이 싫었다.

그게 칭찬이든 욕이든 누군가의 가벼운 말에 의해 나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일이 더는 없도록 하고 싶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란 게 오랜 기간 여러 모습이 중첩되어 하나의 형상으로 다듬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모든 모습을 스스로 통제하고 싶었다.

그 방법을 찾아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이 허상을 만들어 외벽을 쌓는 일이었다.

물론 그 허상 또한 내가 가진 모습, 내 안의 일부였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의도한 모습이라는 점에서 나를 흔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내 모습의 일부가 남들에 의해 정의되기 전에 나는 분신술처럼 흥미롭고 자극적인 허상들을 만들어 그들 앞에 늘어놓었다.

그런 다음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나 그 허상을 물고 뜯고 씹어대는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비웃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그들의 가치관이 얼마나 무용한지 확인했다.

그것이 진짜인 것처럼 행동하는 가짜들 사이에서 나 자신을 지켜내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누가 나를 두고 뭐라고 떠들어대도 나는 흔들리지 않고 오롯이 나인 채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잘못된 생각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는 내가 싫었던게 아니라 그들이 기대하는 내가 될 수 없을까봐 두려웠던 거였다.

나는 그 어떤 평가도 괘념치 않는 사람처럼 위악을 부렸다고 생각했으나 그 위악은 실제의 나였다. 내 찌질한 근성이었을 뿐이다.

내가 만든 허상은 허상이 아니라 그게 그냥 나였다.

나는 나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서 무엇을 바라는지만 보고 살았다.

그것에 맞출 수 없을 것 같으면 위악인 척 저급한 성미를 드러냈다.

그런데 내가 어떤 기대에 충족하려고 애쓰지 않고 그냥 나인 채로 있어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게 뭔지 몰라 당황했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그들이 바라는 내가 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고민하다가 나의 천박한 근성을 뒤늦게 발견하고 좌절감 속에 빠져들었던 것인데,

시합이 끝나고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피땀으로 범벅된 나를 들어올린 담임을 보며 나는 어쩌면 그냥 나인 채로 있어도 좋지 않은가, 생각했다.

어차피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니까.

누나도 할아버지도, 내가 어떤 놈이어도 나를 사랑해줄 테니까.

어마어마한 열기의 환호성 속에서 관중들을 바라보는 대신 나를 들고 있는 담임을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기묘한 경험이었다.

그 공간을 온통 둘러싸고 있는 허상과 내가 진짜 지켜야 하는 사람과의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지어진 것이다.

우리 체육관을 찾은 같은반 아이들이 누나를 보고 내게 그런 누나가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하던 그때,

나는 그곳에 있을 수 있다면 국가대표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다.

할아버지가 링 안에 수건을 던지며 집에 가자고 소리쳤을 때, 나는 그들과 함께 돌아갈 집이 있어서 아무 걱정이 없었던 것도 기억해냈다.

그들이 내게 바랐던 건 돈도 명예도 좋은 집도 아니었는데 나는 왜 그것으로 무언가를 바꾸어보려고 그렇게 기를 썼을까.

나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몰랐다.

그래서 막연히 이 눈부신 허상들을 좇은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 이 무대에서 내려가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으로 살아가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달떴다.

아까는 숨조차 쉬기 버거웠는데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몸이 가뿐해진 것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퇴장 도중에 섀도복싱을 했다.

관중들에 함성이 경기장을 무너뜨릴 듯 울려퍼졌다.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니야, 내가 지금 기쁜 것은 당신들 때문도 아니고 세계챔피언이 되어서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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