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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5/12 18:11:52
Name   quip
Subject   Full Flavor


“왜 굳이 이런 잔을 쓰는 걸까?”
손끝으로 위스키 글래스의 기둥을 잡고 빙글빙글 돌리면서 여자가 말했다. 혼잣말 치고는 조금 큰 목소리로, 질문 치고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마시는 쪽이 향을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 여기, 공기에 닿는 술의 표면적은 넓잖아. 이러면 향이 더 많이 나와. 그렇게 술의 표면에서 올라온 향미가 잔의 곡면을 타고 좁은 입구에 모여서 더 강렬해지는 거야.”
딱히 재미있을 것도 낭만적일 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설명이었다. 바텐더가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어보였다. 언젠가 저 바텐더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맞는 이야기인지 틀린 이야기인지는 확인해보지 않았다. 

“오.”
“그렇게 향미 전체를, 풀 플레이버를 느끼는 거지.”
“신기하네.”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도 그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든다. 한 번에 털어넣고, 한 잔을 다시 따른다. 언제나처럼 좋다. 그가 여기서 세 병째의 고든스를 시켰을 때-다섯 번 째 혹은 여섯 번 째의 방문이었다-바텐더는 웃으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거 알아요? 이거, 만들어진 이래로 이백오십년 동안 레시피를 바꾸지 않았다네요. 신기하죠? 이백오십년 동안 사람들의 입맛은 변해왔을 텐데.’ 그렇게 신기한 일인가. 그는 지난 이십 년간 고든스를 즐겨 마셨다. 이십 년간 하나의 술을 즐겨 마시는 사람도 있으니, 이백오십년간 레시피를 바꾸지 않은 술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딱히 신기할 건 없다. 그는 작년에 구 년에 걸친 결혼 생활을 정리했다. 당연할 것 까지는 없지만 이 또한 딱히 신기할 건 없는 일이었다.

“근데 니 잔은 왜?”
그 모양이냐, 라는 문장이 생략되었다. 그는 그녀의 언어 습관을 추억해낸다. 그녀는 말이 빨랐고, 짧았고, 즉흥적이었다. 그와 다르게. 그는 그의 앞에 놓인 작고 땅딸막한 잔을 들고 이야기했다.

“언제나 굳이 술이 가진 향 전체를 촘촘하고 풍부하게 다 느낄 필요는 없잖아. 소주를 마실 때, 소주의 향을 전부 완전히 느끼려고 하지는 않는 것처럼. 차갑게, 향을 죽이고 마실 필요가 있는 술도 있는 거니까.”

있는 그대로 길게 설명하는 것, 은 그의 습관이었다. 아마 그래서 그와 그녀는 십몇 년 전에 헤어졌다, 고 그는 기억한다. 사귀는 사이가 그렇듯 가끔 자주 싸웠고, 그때마다 그는 언제나처럼 상황을 있는 그대로 길게 설명했고,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었고, 서로 지쳤고, 헤어졌다. 정확히는, 그가 차였다. 이게 그가 이해한 헤어짐의 풀 플레이버였다. 그리고 십몇 년 만에, 그가 퇴근길에 가끔 들르곤 하던 집 근처의 작은 바에서, 마주쳤다. 반쯤 연극적이고 호들갑스러운 인사를 건네고 그동안 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 대신, 그녀는 뜬금없이 마시고 있던 위스키 잔의 모양에 대해 물었고, 이제 그의 잔에 손을 뻗었다. 그나저나, 저 반지는 결혼 반지일까.

“윽, 독하네 이거. 이런 걸 대체 왜.”
그녀는 삼분의 일도 마시지 않고 그의 잔을 내려놓았다.
“네가 마시고 있는 게 도수는 더 높을 걸.”
그는 남은 술을 마시며 대답했다. 그녀의 주문을 들었다. 엄밀히는 바텐더의 추천이었고, 글렌파클라스 105였다.
“신기하네. 이게 더 독하게 느껴지는데. 어. 잠깐, 이거.”
그녀가 좋아했던 노래, 로 기억하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전주를 조용히 듣다가, 두어 소절을 조용히 따라불렀다. 이 노래, 정말 오랜만에 듣는 노래로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굳이 좋아하는 노래를 찾아 듣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

“그래서, 잘 살고 있어?”
두어 소절을 따라 부른 그녀가 말했다.
“아,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무난하게 회사를 다니고 있고, 무난하게 결혼했다가, 무난하게 이혼했다. 달리 이야기 할 것이 없었다. 그는 잔을 비우고, 채웠다. 냉동고에서 꺼낸 지 시간이 꽤 시간이 지나 더 이상 차갑지 않은 고든스는, 딱히 유체역학이 고려되지 않은 작은 잔 속에서, 최소한의 표면적을 가진 채 가능한 최대한의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아, 음. 그러니까. 그는 한 잔을 더 마신다. 이번에는 잔을 채우지 않는다. 그녀는 중간 중간 노래를 따라부르다가, 노래 사이에 한숨을 끼워넣고, 말한다.

“똑같구만.”
“뭐가?”
“지 할 말 있을 땐 신나게 혼자 말하다가,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되는 상황에선 갑자기 말 없어 지는 거.”
“어?”
“잘 살고 있냐는 질문이 그렇게 대답하기 어려워? 하긴, 내가 그게 짜증나서 널 차버렸지. 대체 사람이 바뀌지를 않는구나.”

그는 약간의 혼란함을 느꼈다. 그랬나. 그의 기억에서, 그는 언제나 상황의 전체 맥락을 차분하게 살펴보고, 자세하게 설명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헤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맥락을 고려하고, 할 말을 다듬고 있었다. 그는 빈 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할 말을 다듬고 있었어.”
혼란 다음의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그는 말을 다듬고 있었다. 위스키 테이스팅 글래스의 모양 같은 건 굳이 다듬을 필요가 없는 말이다. 원래 그런 거니까. 하지만 잘 사냐, 같은 건 좀 다른, 복잡한 문제가 아닌가. 그녀는 또 한숨을 쉬었다.

“그 대사까지 토씨 하나 안 변하냐, 답답한 인간아. 억울한 표정도 그때랑 똑같네.”
그녀는 그가 채운 잔을 당겨 홀랑 마셔버리고,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자, 이제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내키는 대로 말하는 것보다는, 정리된 말이 더 좋은 거잖아. 아니, 아니야. 그냥 편하게 말하라고. 대충, 적당히, 떠오르는 대로 말야.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돼. 이를테면 이런 건 어때.”

그녀는 조금 남은 위스키를 다 마시고, 위스키 글래스에 그의 고든스를 따랐다. 꽤 많이.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한 회사에 취직했어. 거기서 너랑은 아주 다르고 나와는 비슷해보이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했다가, 작년에 이혼했어. 뭐 이런 거라도 말야. 아, 참고로 방금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란다. 이제 네 차례. 밤은 기니까, 이야기해보라고. 아, 참한 와이프가 집에서 기다리고 계셔서 일찍 들어가보셔야 하려나. 그냥, 편하게 말해봐. 네 앞에 있는 잔처럼 말야. 그러니까, 잘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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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서 고든스는 한잔에 얼마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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