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8/06/15 17:00:02
Name   DrCuddy
Subject   So sad today 감상평
항상 비슷한 패턴이다. 이런 글을 쓸 때는.
근엄한 표정으로 도서관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친다. 보고서가 아니라 내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글을 아침부터 쓴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엄마는 어릴 때 내가 아침부터 뒹굴고 있으면 아침에는 머리가 맑으니 맑은 정신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했다. 어른말 틀린 거 하나 없다더니 자연히 온갖 지식이나 아는 척으로 무장을 하고 스스로를 감춘 정말 재미없는 글이 나온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걸 오전에 보면 재미없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거다. 오후가 되고, 해질녘이 되고, 이성이 지쳐 감성이 찾아올 쯤, 저녁에 밥 먹으며 생각하다 느끼게 된다. 젠장, 글 더럽게 재미없게 썼네. 이렇게 쓰여진 초벌 글은 글에 나를 드러내지 못하고 지식으로만 표현하려는 글이 얼마나 재미없음을 확인 하는 용도로 밖에 쓰이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초벌 글을 반면교사 삼아 다시 글을 쓰는 건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

이 감상평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사실 이 책에 대한 감상평은 이 과정을 한 번 더 거쳤다. 『So sad today』 책을 받게 되었을 때 감상평을 티타임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선물 받으면 읽고 감상평을 쓰는 정도의 정성은 보이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다. 책을 받기 전에 주어진 링크를 따라서 책과 저자에 대해 대강 훑어본다. 외국에세이, 여성젠더, 문화. 저자는 시로 석사학위. 불안장애. 트위터 퀸.
오호라. 책의 내용이 대략 보인다. 아마 저자는 불안장애와 시를 앞세워 사랑과 섹스에 대한 한풀이를 하고 말랑말랑한 감성을 덧붙여 공감을 호소하겠지. 요즘 뜨거운 여성젠더나 페미니즘은 전면에 나설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미 이에 관해 머릿속으로 글을 몇 십번은 썼다 지웠기 때문에 읽지도 않은 책 감상평은 일필휘지로 채워진다.

지방선거일에도 바쁘게 일하는 택배기사님 덕분에 투표하고 오는 길에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세상에, 트위터 퀸이 쓴 여성 에세이라니. 이 책이 앞으로 내 책장의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되다니. 내 스스로의 선택으로 산 첫 번째 책은 당시 유행하던 만화퀴즈와 선택지로 페이지를 찾아가는 게임북 이었다. 세뱃돈을 받아 처음 책을 골라 사오겠다고 당차게 나간 아들이 그런 책을 사왔다는 것을 본 엄마의 한숨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이후, 내 책장에 꽂히는 책은 제목과 작가 이름만으로도 무겁고 명망 넘치는 지식의 전당으로 채워졌다. 번역책은 그에 더해서 출판사, 번역가의 전공, 경력 등 꼼꼼한 심사과정을 거친 뒤에만 입성할 수 있었다. 내 책장에 이렇게 조그맣고 얇고 가벼운 트위터 셀렙의 에세이라고? 당장 두께나 크기에서부터 전공책, 일반 교양서적에 그대로 짜부라져 질식할거 같은 모양새다. 내 돈 내고 절대 사지 않고 서점에서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책. 시간 끌 것도 없다. 오늘 저녁은 지방선거로 피 터지는 전쟁터 현장을 감상해야 하니 내일 오전에 늘 항상 가던 도서관에서 숨통을 끊어주마. 한줌도 안 되는 네놈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해주지.

돌이켜 보면 전장선택부터 나의 완벽한 패배다. 이 녀석은 내가 그동안 도서관에서 보아왔던 기본서, 문제집, 교양서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이런 녀석을 그동안의 관행대로 엄숙하고 다들 문제집과 머리를 싸매고 있는 도서관을 택하다니. 책을 펴들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책 내용과 환경의 부조화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섹스, 섹스, 사랑, 유머, 섹스. 책 내용은 홍대앞 클럽 불금 분위기인데 여전히 정신차리고 좌우를 둘러보면 문제집과 심각하지 그지없는 청년들. 몇 달전 까지만 해도 다르지 않았을 내 모습. 책 내용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과 배경에서 이런 책을 읽고 있다는 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우스웠다. 가보진 않았지만 한국에서 이 책을 읽을 분위기와 가장 맞는 장소는 이태원 스타벅스가 아닐까. 어떻게 이런 책이 번역되어 들어 올 수 있지? 정말 이 책이 정식 발행된 책이 맞는지, 청소년 유해간행물 딱지 없이 발행될 수 있는지 몇 번이고 확인해야 했다. 그렇다고 딱히 청소년 유해간행물 이런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린 시절, 침대 밑에서 찾아낸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탐닉했다. 엄마나 아빠가 책을 읽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진 않았으니 틀림없이 외설스러운 소문에 대한 호기심으로 책을 집에 들였고 어쩌다보니 내 손까지 들어와 읽게 되었지만 난 멀쩡한(?) 어른으로 성장했는걸. 어린나이에 처음으로 접한 『너에게 나를 보낸다』도 꽤나 자극적이었지만 『So sad today』는 이제 이런 자극에 닳고 닳은 어른에게도 가차없이 섹스, 판타지에 대한 솔직함을 보여준다.
뭐? 알라딘에서 추천한 책 속에서 밑줄긋기가 이거라고?
P.97 : 인터넷에는 특유의 빛과 공백이 있어요. 내가 인터넷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이유도 그 빛과 공백 때문일 거예요. 섹시하거든요. 그 안에서라면 뭐든 가능할 것 같고. 삶에도 분명 인터넷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겠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어른으로서 삶을 꾸려 나가야 해요. 인터넷에서는 여전히 열여섯 살인데 말예요.
틀렸어! 틀렸다고! 먼저 이 책은 그딴 말투로 예의를 차리지 않아! 그리고 장님이 코끼리 코만 만지고 코끼리 생김새를 연상하는거 같은 그런 밑줄긋기로는 이 책 겉핥기조차 할 수 없어. 그나마 감상평에서 소개할만한, 내가 이 책에서 찾은 밑줄긋기를 알려주지.
P. 44 : 네가 XXXX라는 사실이 폭로됐을 때 솔직히 마음상했어, 너는 나를 상대로 XX도 안됐잖아 : 사랑이야기

이 책의 감상평을 어떻게 써야 할까. 책 받기 전에 머릿속으로 썼던 감상평은 책을 펼친 지 3분만에 엉덩이를 걷어차서 멀리 내쫓아버렸다. 이미 이 책은 내가 그동안 접하고 생각한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내용이다. 모든 걸 새롭게 생각하고 써야한다. 하지만 기존의 관성을 이길 수 없다. 아니, 이렇게 하면 재미없다는 걸 확인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다. 단거리 달리기에서 출발점에 디딤판이 필요하듯, 쓰레기같이 재미없는 초벌쓰기를 기준으로 삼아야 더 솔직하고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으니까. 초벌쓰기를 한번 뒤엎은 후에야 스스로에게 솔직한 감상평을 쓸 수 있었다. 물론 솔직하다고 무조건 재밌는 글이 되는 건 아니지만 일단 재밌는 글을 쓸 수 있는 소재가 다양해지는 건 틀림없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작가는 솔직하게 발가벗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스스로를 ‘까발린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그래서 더욱 재미있고 와닿는 것일지도. 어느 정도의 ‘까발림’인가를 밝히고 싶지만 여백이 부족하여 적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이해해주시길. 사실 감상평을 글로 적는 것도 생각과 감정을 어느 정도의 선에서 옮겨야 하는지 혼란이 왔다. 나도 책 감상평을 ‘까발려’ 볼까?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적어 볼까? 아서라. 넌 트위터 퀸도 아니고 SNS 셀렙도 아니야. 30대 아조씨의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좋아할 사람은 없어. 다행히도 나에겐 불안장애나 관종에 대한 항상성을 조절할 브레이크가 잘 발달되어 있다.

작가는 스스로 중독에 중독되었다는 표현을 쓰고 그 대상으로 사랑, 섹스, 인터넷 등이 나오지만 결국 유년시절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걸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서 트위터에 이러한 이야기들을 올렸다. 하지만 익명으로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도 유쾌함과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았고 이러한 솔직함과 재미가 크게 인기를 끌면서 책도 출판하게 되었다. 유년기 처음 맞이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람마다 다양한 형태로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에 대한 기억에 발현되어 삶과 생각에 큰 영향을 미쳤고 누구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앞으로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이질적인 녀석을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할까?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부부로서 존중을 넘어 바닥까지 솔직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폴리아모르 부부생활에 대한 스스로의 가능성? 홍차넷에 스스로를 까발리고 커뮤니티 셀렙이 되는 꿈? over my dead 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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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체 무슨 책인지 몹시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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