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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6/12 20:29:36수정됨
Name   구밀복검
Subject   남김없이 분해 가능한 것들
https://youtu.be/DrOo8WjffU0

군가는 예술일까요. 예술이라면 예술이죠. 음악이고, 인간 감정의 표현이고, 예술 아니라고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저 '흔한 예술'이라 가치가 없을 뿐이죠. 왜냐하면 군가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냥 군인들의 전투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에 불과합니다. 군가의 소재가 뭐든 가사가 뭐든 군가는 그 이상이 아니란 게 명확하지요. 그래서 군가는 우리 앞에서 '개성', 오리지널이 될 수 없어요. 군가의 어떤 형식도 사기 고무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기능이고 수단이며 '복제품'이란 게 빤하니까요. 목적에 이반되는 구석조차 하나 없으므로, 군가는 우리에게 완전히 투명하게 분해됩니다. 우리네 담론의 시장에서 군가는 판매가가 명확하게 규정된 서 푼짜리 짭퉁인 셈이지요.

군가 정도로 노골적이지는 않은 일반적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예술이라면 일일연속극이나 아침 드라마 같은 것이 있습니다. 물론 일일연속극이나 아침 드라마도 재미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들 역시 오리지널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류의 작품들은 늘상 다 똑같거든요. 결국 이런 것들은 그저 시청자들의 니즈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결정적으로 시청자들의 니즈가 항상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바톤 터치를 하는 거고, 그러면 돌아가는 꼴이 훤히 보이는 거죠. 어차피 또 배다른 자식이겠지, 어차피 또 먹던 물 끼얹겠지, 어차피 또 겹사돈은 절대 안 돼 하겠지 그런 거요. 다시 말해 사전에 형성되어 있는 일반적인 기대치나 공감대, 곧 우리의 '예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미 연속극은 우리의 네트워크 안에 이미 포획되어 있는 장르인 것고, 기존에 공유하고 있는 담론 안에 머무는 것이며, 그런 이상 사본에 불과해요. 공장에서 찍어낸 양산형 드라마인 거죠.

이상의 예에서 우리는 '어떤 예술 작품들은 사본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기존의 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련의 분석과 평가를 거치면 쉽고 빤하고 간명하게 결론지을 수 있는 것들, 말하자면 '비평으로 남김없이 분해 되는 작품들'이 있죠. 반대로 비평으로 남김없이 분해되지 아니하는, 우리가 갖고 있던 일반적인 기대나 예상 범위를 벗어나는 작품들을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 있을 테고요. 하지만 말은 좋지만 이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걸까요. 분해되지 않는다는 것, 남는 구석이 있다는 것은 도대체 뭘까요.

시각을 달리해 봅시다. 예술작품과 비평의 문제라고 말하면 거창해 보이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이건 개인과 사회, 혹은 개성과 고정관념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어요. 가령 모든 개인은 고유할까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그게 아니란 걸 종종 뼈저리게 직면하게 되어요. '거스름돈 830원이십니다'라는 식의 사물 존대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을 멸시한다며 길길이 날뛰는 손놈이나, 날 만나는 이유가 그저 내가 잠재적 인맥이라는 것 외에 없다는 게 팍팍 티 나는 친구 아닌 친구나, 애정이 식은 게 빤히 보이지만 먼저 책임지기는 싫어서 결별 선고는 계속 미루며 말을 돌리는 ex 파트너(진)이나, 우리에게는 개인이 아니에요. 그네들은 현실에 흔한 존재고, 우리가 익히 봐왔으며, 왜 그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거든요. 그들은 우리에게 투명한 존재죠. 말로는 '아 그 새끼 이해 안 돼 왜 그러고 살지'라고 말하지만 그건 그냥 분노와 거부의 표현이지 진짜 이해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닌 거죠. 그네들이 왜 그러고 사는진 너무나도 명확하니까요. 그렇게 그네들은 우리 사회의 인간군 분류에서 가장 전형적인 이름표를 받아가고, 이름 붙여진 그대로만 행동하며 그로부터 이탈하지 않아요. 개꼰대, 승냥이, 비겁자 등으로. 물론 그네들도 찬찬히 찾아보면 김치 싸대기를 날리는 아침 드라마 같은 개성을 찾아볼 수 있으니까 절대적으로 개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소위 '남다른 사람'이 아니라 장삼이사죠. 고정관념으로 간단히 결론짓고 넘어갈 수 있는 복제인간들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저렇게 극단적인 사람들만 개성이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죠. 사회인으로 세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사회가 요구하는 행동 양식을 자기 안에 복붙하며 살 수밖에 없어요. 좀 더 과거에는 세상이 살라는 대로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안 살 거라고 다짐했던 적도 있던 것 같지만 이젠 매일 쌓이는 세상살이에 덮여 한참 지하로 깔린 지층이 되었죠. 본디 제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고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기는 게 상리인지라 진부하고 편벽하게도 내 가족 내 이익 내 사정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서도 그것을 타인들에게 적당히 에둘러서 드러내며 교양과 예의를 갖춰야 하고요. 상대가 그러면 나도 그렇게 되는 거고 내가 그러면 또 상대도 그렇게 되는 거죠. 그게 사람 사는 생리고 상식이니까요. 그 와중에 우리는 마음 한 켠에 떠오르는 회의를 뇌리에 도달하기 전에 곱게 접어 넣어요. '너도/나도 별수 없구나' 결국 사회와 고정관념을 탈출하지 못하는 개성 없는 개인이기는 모두가 매일반이지요. 서로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 사람도 결국은 기존에 만들어진 이름표를 달고 있는 기성품이란 걸 알게 될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비평으로 남김없이 분해되지 않는 작품이 있을 수 있냐'는 질문은 실은 우리가 얼마큼이나 사회를 벗어날 수 있냐는 질문으로 바꿔놓을 수 있어요. 작품을 먼저 내고 그 뒤에 소문이 붙고 리뷰가 쓰여지고 분석이 행해지니까 작품이 선행하고 비평이 후행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작품 이전에 그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인 의미의 그물망,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차안의 이 현실, 수다스러운 사람들의 입방아로서의 비평이 선재하는 것이죠. 이미 그사이에 차곡차곡 개인과 개성과 작품들의 스타일과 장르와 타입과 유형이 정리되어 있고요. 그 모든 게 따지고 보면 통념이고 고정관념이고 이름표인 거죠.

어떤 작품이든 그런 선존하는 기왕의 통념과 맞서 싸워요. 나는 다르다, 나는 새롭다, 나는 다른 작품들처럼 되지 않을 거야, 나는 전작의 속편이 아니야, 그러면서 자신이야말로 그간의 오랜 세월에 걸쳐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축적된 맥락들로 환원되지 않는, 완전히 창조적이며 과거와 세속과 고정관념과 절연하는 '모던'이자 '뉴 오더'라고 선언하는 거죠. 하지만 이윽고 수 양제가 양성한 크리틱 백만대군이 달려들어 작품을 하나하나 물고 뜯고 씹은 다음엔 이내 단물이 빠지기 마련이에요. 이건 여기서 가져왔네, 저건 이걸 의미하는 거네, 이 요소의 레퍼런스는 머머머네, 이건 딱 보니 제작 예산 후달려서 대충 얼버무린 거네, 이 부분은 무슨 무슨 작품 의식하느라 오바했네, 결국 따지고 보면 이전에 만들던 거 포장지만 바꾼 거네.. 그렇게 개성을 짓밟고 이름표를 붙인 뒤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라는 글귀가 쓰여지죠.

하지만 몇몇 소수의 작품들은 을지문덕처럼 수나라 군대의 공세를 앞서나가기도 해요. 마치 사과 배 감 바나나만 먹고 살던 한국인들이 자몽을 처음 먹었을 때 맛이 있든 없든 새롭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듯, 그리하여 자몽의 맛에 이름표를 붙이고 유형군으로 정립하기 위해 수백 수천 수억 개의 자몽을 더 먹어서 자몽의 모든 것을 이해해야 했듯, 기존의 이름표로 분류되지 않는 진짜배기 고유성을 사람들 앞에 들이대어 단신으로 항복을 받아내고서 분석과 환원을 더 해보라고 강요하는 것이죠. 덤벼라 이 자식들아. 제발 나에게 이름표를 붙여봐라. 나를 양산형으로 만들어 봐. 나를 포획할 수 있는 고정관념이 정립이 될 때까지 대들지 않으면 용서치 않으리. 이렇게 담론의 그물망을 찢어버리고 사람들의 예상 범위를 깨뜨린 것들이야말로 진짜로 작품이고, 오리지널이고, 개성이고, 개인이고, 예술이죠. 백만대군이 아니라 천만대군이 열 번쯤은 침략을 해야 비로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그런 것 말입니다. 몰개성한 우리네 사이에도 가끔은 본받을만한 이들이 나타나기도 하듯이요.

그리고 이런 초극과 이탈은 꼭 작품만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비평으로도 가능하죠. 그러니까 작품을 평가하는 그 자체,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겁니다. '너라고 뭐 별수 있겠냐 세상만사 다 똑같지'라고 심드렁하게 얕보고 있던 세상 사람들의 콧대를 작품이 보기 좋게 눌러줬을 때, 이번엔 반대로 작품이 '너그들이라고 뭐 별수 있겠냨ㅋㅋㅋ 나 빼고 다 똑같은 새끼들이지 ㅋㅋㅋㅋ'라고 비웃고 있을 때, 누군가 나타나서 한층 더 섬세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작품에서 제시된 포인트는 사실은 더 넓은 영역에서 한정적인 지점만을 파헤친 것으로, 따지고 보면 좁은 차원의 통념이며 고정관념이며 사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까발리면서 진짜 개성은 더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거죠. 그러면 그 순간 오리지널은, 이름표 붙일 수 없는 대상은 작품이 아니라 비평이 되는 거고요. 당연히 승패는 병가지상사고 입장은 언제나 뒤바뀌기 마련이라 작품의 수급을 따낸 비평 역시도 또 다른 작품에 의해 수급을 내놓게 될 수 있지만, 어쨌든 창작만이 아니라 평가 역시도 개성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수단이 무엇이 되었든 새로움을 제시하는 쪽이 예술의 근본에 부합하는 거니까요.

다시 돌아가보죠. 비평으로 남김없이 분해되지 않는 작품이 있을 수 있냐는 질문은 결국 '너도 별수 없구나'를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지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어요. 우리 역시 이 세계의 작품들이고 작품들 역시 인간들 사이에서 발언권과 참정권을 갖고 있는 가상인격이지요. 우리에게 밑천이 빤히 읽히지 않는 진짜배기 작품이란 결국 남들에게 낱낱이 동기와 생각이 쉽게 다 까발려지지 않고 자신만의 중심을 가지며 귀감이 되는 진국 친구와도 같아요. 그리고 그런 진짜배기 친구를 얻기 이전엔 먼저 나부터 진짜배기가 되어야 하고요. 스웨덴 친구가 친교의 표시라며 수르스트뢰밍을 가져왔다면, 나도 곰삭은 홍어 정도는 대접해줘야 하는 거죠. 그게 작품을 맞이하는 비평의 태도가 될 테고요. 그걸 포기하면 작품이 '너도 별수 없구나'라고 속삭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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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어 무침 같이 먹으러 가요
  • 이 글은 별수 있구
  • 귀감이됩니다. 잘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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